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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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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행사

공화(空花)를 벗고 본래 나를 보라.

  • 입력 2003.11.23
  • 수정 2025.01.15

 제 은사스님은 송광사 방장으로 계시던 구산 큰스님입니다. 저는 송광사에서 출가해 송광사에서만 삼십여년 살았어요. 외부 출입을 한 것은 청암사 수도암 선방과 해인사 성철 큰스님 모시고 지낸 기간 합쳐 3년 밖에 없어요. 그리고 총무원은 2001년 2월 26일, 얼마전 열반하신 정대 큰스님께서 아무 인연이 없는데 입소문만 듣고 와서 수고해 달라고 해서 생각지도 않은 소임을 맡게 되었어요.

 그렇게 일 년 반하고 내려가 있는데 원장 스님이 바뀌어 또 어떻게 소문 들었는지 소임을 봐 달라해서 같은 소임을 다시 와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다보면 나도 별수 없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사판승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지 않나 우려하고 있어요. 사실 그 전에는 송광사에 있으면서 저희 사형스님들과 중창불사를 했어요.

 

 인생의 황금기인 삼, 사십대를 집 짓는데 세월 다 보내니 사람들이 저더러 노가대 십장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집을 백 오십채를 지었어요. 열두시에 자고 새벽 세, 네시에 일어나기를 이십년을 살았어요.

 그런데 일을 한참 할 때는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몰라요. 해 떨어지는 줄 모르고, 밤이 돼서 자는 게 아니라 졸리면 밤이에요. 배 고프면 그때가 끼니인 거예요. 대장부는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열심히 산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 살았다고 말 못하는 거에요.

 저희들이 그런 일에 몰입하게 되 이유는 은사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승보종찰인데 가람에 위용을 갖추고, 후학을 위해서라도 도량을 일신하라는 유업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형 스님과 제가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렇게 살다보니 좋은 세월 다 갔습니다.

 그러다가 출가수행자 본분을 해야하는데 요구를 받고 사판에 들어와 보니 천지가 일입니다. 종단이 할 일이 너무 많고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종단은 정부나 사회를 향해 권리로 주장해야 할 일을 구걸을 해요. 그런 것 보면서 정부나 사회를 향해 당당한 주장을 하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합니다.

 지금 현재 모시고 있는 법장 총무원장 큰스님은 예전과 다릅니다. 확실한 수행자적인 가풍으로서 선지가 있는 도량에서 성장하신 분이라서 만만치 않습니다. 자기 목소리 다 내고 불자로서의 자긍심을 바로 세우는데 노력하십니다.

 

 여러분께서는 무엇인가 유익한 말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왔으니 부처님 말씀 몇 가지 전하고, 여러분들은 왜 조계사 신도로서 정체성과 자긍심이 있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다시피 지난 12월 16일 저희 종단의 원로 의원이신 청화 큰스님 열반하신 거 아시죠? 어제는 삼십대 총무원장 역임하셨던 정대 큰스님 영결식과 다비 하신 거 아시죠? 종단을 대표해서 두 어른의 영결식과 장례 현장에 줄곧 있었습니다.

 청화 큰스님은 철저한 이판승입니다 수행자입니다. 그에 비하면 정대 큰스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판의 종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극대극입니다. 그런데 두 장례 현장에 사람이 많이 온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청화 큰스님도 삼, 사만여명이 왔고 정대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주사 도량에 빈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운집한 대중의 모습이 청화 큰스님은 재벌들이 많이 와 있다는 것을 느꼈고  정대 큰스님은 정치인, 관료들이 많이 왔습니다.

 신도들 반응도 다릅니다. 청화 큰스님의 열반 현장에는 고개를 숙인 사람, 우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이에 비해 정대 큰스님 신도들은 다 고개를 들고 우는 사람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무엇이 좋고 나쁘고가 아닙니다.

 이 두 어른의 열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말이 '공화(空花)'라는 말이 있습니다. 허공에 핀 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허공에는 꽃이 없습니다. 허공에 핀 꽃은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공화가 언제 핍니까? 눈다리끼 나서 눈을 한참 비비고 나면 마치 붉은 듯 푸른 듯 꽃이 허공에 있는 듯 보여요. 그것을 공화라고 합니다.

 청화 큰스님은 장좌불와하고 세상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고, 영가천도를 열심히 해주고 청정한 가풍에 대해서 재가불자 들이 존경하고 그렇게 큰스님이 되신 거에요. 그런데 왜 잘 사신 어른이라고 평가받지만 그래도 돌아가시니 허공에 핀 꽃처럼 될까?

 또 사판에서 보면 조계종 총무원장까지 하고 동국대 이사장 등등 사판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거예요. 정상에까지 다 갔어요. 그런데 왜 그분들 가시는 모습이 허공에 핀 꽃과 같을까? 

 

 경전에 이런 말도 생각이 납니다. "우주 만법은 꼭두각시, 그 모양과 같아서 자성도 없고  타성도 없으며 우리가 꿈속에서 욕심대로 물건을 가져갔다가 깨어보니 모두 허무한 공화와 같다." '유마경' 말씀입니다.

 또 '원각경'에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 마음의 그림자로서 꼭두각시 공화인줄 알 때는 벌써 방편을 써서 이것을 멀리 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곧 집착을 여의고 원래 청정한 본심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말대로 하면 저는 반 도인이 되고 선지식이 되고 원로가 됐어요. 큰스님 가신 것을 봐도 공화로 보이고 사판의 최정상에 오르신 총무원장 스님이 가신 것을 보더라도 그냥 공화로 보인단 말예요. 

 원각경에도 나와있어요. "우리 마음의 그림자로서 꼭두각시 공화인줄 알 때 벌써 그 생각을 방편을 써서 이것을 멀리 하려 않더라도, 곧 집착을 여의고 본래의 청정한 본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삶 자체가 무상하고 근본이 공한 것을 느끼고 알면, 여러분은 선지식이 부럽지 않고 총무원장이 부럽지 않습니다. 원로 선지식이나 총무원장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고, 확실이 별거 아니더라구요. 우리는 늘 이런 마음이 있어야 되요.

 대통령, 장관, 재벌총수, 재벌총수도 어려우니 자기 생명을 버릴 수 있고,  대통령도 죽을 일이 안 죽어지는 것도 아니고, 무상하게 흘러간다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알면 이제 선지식, 총무원장도 부럽지 않은데 뭐가 부럽겠어요. 부러울 것 없어요.

 

 그런데 나는 나이는 오십대 중반 넘어섰는데 생각해보면 이판도 아니고 사판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새 건물을 멋있게 지으면 가게들이 들어와 간판을 많이 붙입니다. 간판만 보이고 건물이 안 보여요. 그 건물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런 것 같아요.  '현고' 그 진면목은 어디로 가고 간판만 잔뜩 붙어있는 것인가.  아상이라는 간판, 잘난척 하는 간판, 똑똑한 척하는 간판, 유식한 척 하는 간판, 이기려만 하는 간판, 온갖 간판이 많이 붙어있습니다. 세상에 붙여놓은 간판도 많습니다.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어느 단체 대변인, 불교신문사 주간, 환경운동 단체 대표이사장, 조계종 환경대책위원회 간판, 경실련 무슨 대표, 복지발전 기획단장,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보니까 나는 없고 간판만 엄청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두 어른 가신 것 보니, 요놈의 간판을 싹 뜯어서 불 싸지르고 싶어요. 본래 내가 어디서 왔어요. 세상 속에 즐거움을 못 느끼고 출가, 수행하려고 왔잖아요. 집 지으려고 온 것도 아니고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이 말을 여러분 자신에게도 물어보세요. 여러분 마음속에 어떤 무형의 간판을 가지고 있는가 물어봐요. 어울리는  간판, 안 어울리는 간판, 어느 학교 출신이라는 간판.

 그래서 간판 떼고 본래 있는 그 집, 그 모습이 어떤 지 되찾아 봅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뭐라고 그랬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上?下 唯我獸尊)'. 이 말은 각자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우 존귀한 것이다. 여러분 자신보다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어요. 이 세상에 어떤 장엄하게 만들어 간판을 붙여 논다 하더라도, 대통령, 부처 간판 붙여 놓는다 하더라도 허망해요. 여러분 자체가 가장 존귀하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 생각을 놓아버리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누구의 아내이고, 어느 똑똑한 판검사가 된 자식의 어머니가 된다한들 그게 존경할 거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가장 존경받아야합니다. 여러분은 결코 작거나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부처님 말씀 중에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有佛?)'이다. 여러분은 이미 다 부처이다. 무엇과 견줄 것이 없어요. 여러분 그냥 자체로 완벽해요. 이것을 믿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고마운 줄 알면 다 끝입니다. 굳이 쓸데없는 방편 써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더라도 현실과 우리 상황의 모든 것이 허공에 핀 꽃인줄 안다면 더 할 거 없습니다. 

 

 우리 근본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인고 '실유불성'이다. 실유불성은 우리가 갖고 있는 잠재능력이 무한하며 부처에 하나도 뒤지지 않는다. 부처가 될 씨앗이라는 초보적 관점이 아니라 그냥 부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을 어떻게 삽니까? 분별(分別), 습(習), 업(業) 이것에 쌓여서 삽니다.

 

 그러면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되요. 현실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제행무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행무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철저한 연기적(緣起的) 관계에 의해서 지속되고 있다는 내용이 제행무상입니다.

 따라서 결과는 없고 변화되는 과정만 있다. 시작과 끝이 있다면 태어나고 죽는 것이 있을 텐데 제행이 무상해서 뱅뱅 도니 시작이 없으니 끝도 없지요.

 그러니 태어나는 것이 없으니 죽을 것도 없다. 이 말이 제행무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단히 허공 속에 꽃을 만들어 놓고 꽃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시작이 있다고 생각하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생사에 걸려서 죽지 않아도 될 것을 자기가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생(生)한 것이 없으니 죽음(死)도 없다.

연기적 관계망 속에 철저히 흐름만 존재할 뿐이다. 그냥 흘러가는 것만 존재하지 시작과  끝이 없다. 무시무종(無?無終) 입니다. 이런 것들이 제행무상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라는 말은, 우리가 아무리 내 것이라고 붙들고 집착해 봤자 내 자체가 공해서 변하는 과정만 존재하지 실체하는 존재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악시비(善?是非), 대소유무(?小有無), 애증(愛憎) 이런 것 자체가 없다는 것. 그래서 결국은 내가 없으니 제법무아입니다.

 내가 없으니 생(生)할 것도 사(死)할 것도 없다. 내가 없으니 죽으려 해도 죽을 내가 없고 살려 해도 살 내가 없다. 행복하려도 불행하려도 그럴 내가 없다. 내가 원래 공하다. 세상도 원래 공하다. 허공에다 주먹질하면 누가 맞아 죽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불교인들의 삶이라는 것은 최고가 없습니다. '최적'. 지금 처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부처님 법에서는 최고가 없어요. 기독교에는 하느님이 최고입니다. 최고가 되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주어진 여건과 조건 속에서 가장 적절한 것을 연출하고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불교 수행을 통해서 얻어내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입니다. 가장 똑똑하고 높고   가장 위대한, 그런 것은 없어요. 그냥 농부면 농부로서 주어진 상황에서 최적을 선택하라는 것, 이것을 항상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큰스님, 원로, 선지식이 되고 총무원장이 되는 이런 것들이 다 실제로 보니 공하고 무상한 것이더라. 아무 것도 아니라면 무기에 빠져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 아니냐?

 그것이 아닙니다. 공화로 허무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 뒤에 어떤 지식이 들어있는 것이에요. 이것이 아니고 진짜 무엇이 있을 텐데?

 그 진짜가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에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리고 '일체중생 실유불성', 니가 곧 부처이다. 그리고 너 밖에 아무리 좋은 간판을 달아주어도 간판일 뿐이지 실체가 아니다. 이 말을 들어보니 진짜가 무엇이 있긴 있구나. 그 진짜배기 때문에 나머지가 가짜로 인식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무엇이 진짜라는 것이냐.

 

 제행무상하고 제법무아인데 그것을 모르고, 뭘 해 봤자 항상 할 수가 없습니다. 다 내것인줄 알았는데 내 것이 없습니다. 내 자신이라는 집이 시원찮아서 변하니 나에게 담아놔 봤자이다.  그러니 변하지 않는 물건도 없고 변하지 않게 간수해 둘 내 집도 없다.

 그렇다면 어떡하느냐? 인연 따라 살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적절히 사는 것이고 최고가 아닌 최적입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일등 하려고 하고 그러지 마십시오.

 

'자리이타(自利利他))' 또는 보시를 하라고 하는데, 자기 있는 것을 다 내놓고 희생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이타를 강조하지 않고 자리와 이타의 조화를 말합니다.

 자기가 이익 되어야만 남도 이익 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자기 희생하고 남을 도우라 하는데 불교에서는 용서도 없고 희생도 없습니다.

 진실로 자기에게 이익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이익되지 않는 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희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간을 짧게 놓고 보면 희생 같지만, 길게 인과론과 연기적으로 보면 희생은 없습니다. 용서도 없습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내가 지은 죄는 내가 받고 내가 지은 복은 내가 받습니다.  남이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니가 내 죄를 대신 사하라고 기독교에서 많이 하는데, 그건 안됩니다.

 

 그 과보를 감당할 능력과 지혜가 내게 있으면 감기 잠깐 걸리듯 살짝 지나가는 것이고, 그 과보를 감당할 내 몸이 안되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감기처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혜가 있고 복덕이 있으면 쉽게 넘어갈 뿐이지 용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자기에게 이익되어야만 남에게도 이익된다. 그러니 일방적 희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존중한 만큼 남을 존중해야 하고, 남을 이익되게 한 만큼 나를 이익되게 해야합니다. 나도 천상천하유아독존인 만큼, 너도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귀한 만큼 남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자리이타이고 보살입니다.

 일방적인 희생은 없습니다. 자꾸 내가 손해보고 그렇게 도와 주었는데 저 사람이 배은망덕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에 지어 놓은 복은 날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는 시간만 나면 혼 빠진 사람처럼 자기 생각에 깊이 빠져야 해요. 생각을 밖으로 돌리지 말고 자기와 대화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이야기 하세요. 진실로 대화할 사람은 부처님 밖에 없습니다. 괜히 남하고 이야기하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어딘가 새나갑니다.   비밀을 완전무결하게 하시는 분은 부처님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부처님이 자기 자신이에요. 자신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니 그 은밀하고 깊은 대화를 자신에게 하세요. 그러면 금방 부처님 되고 도인됩니다.  밖으로 이야기하니 자꾸 해결 실마리 없고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조계사 신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조계사는 보통 절이 아닙니다. 양산 통도사나 순천 송광사는 삼보종찰이고 과거에 누적되어 온 명성입니다. 그런데 조계사는 한국불교의 새로운 자존심과 명예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1937년에 총본산 건설을 시작했는데, 당시는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황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스님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대 한용운 스님과 권상노 라는 분이 계셨는데,  불교가 새롭게 일어나기 위해 한용운 스님께서는 본산계를 중심으로 총본산을 빨리 만들자.  권상노 씨는 통일적 교단을 만들자.  스님들이 결집해 하나의 종단을 만들어내자라고 주장했습니다.

 한용운 스님은 가톨릭처럼 획일적 체계 말고 전통적 본산 제도를 자립적으로 유지한 상태에서 상징성만 있는 총본산만 만들면 되겠다는 민주적 발상과 보수적 성격의 권상노씨의 생각이 대립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용운 스님의 기본 주창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총본산 건설이 시작됩니다. 1937년 총본산 건설 위원회가 구상됩니다.

 그런데 이 대웅전 건물은 원래 전북 정읍에 보천교 십일전이라는 건물을 사다가 지은 것입니다. 여기는 원래 명성여자 중고등학교 자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조선 오백년 동안 스님이 사대문 안에도 못 들어왔는데 사대문 안에 절을 짓는다는 것이 통쾌한 일입니까. 그때 집을 짓는 불교도의 마음은 오백년 묵은 쳇기가 가라앉았을 것입니다. 그런 환희심이 있는 곳이 여기 이 건물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은 매우 소중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런 역사적 현장에서 부처님 말씀 배운다는 자부심도 남달라야 합니다. 기둥 하나, 석가래 하나 예사로 보지말고  손으로 만져보고 귀에 대면 옛스님들의 소리가 귀에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1938년 완성 되서 낙성식 했습니다. 원래 조계사의 이름은 태고사인데 1954년 종단 정화운동 시작하면서 마지막으로 청정 비구스님이 주인 되는 날 우리는 이 절을 태고사라 하지 않고 조계사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조계종이 만들어집니다. 정화 운동할 때 장가 안간 스님은 500명이었고 장가간 대처승은 2500명이었습니다. 500대 2500명이 전쟁해서 싸워이겼습니다. 어떻게 이겼나? 우리는 청정하고 당당하니까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처승의 본거지로서 태고사가 비구승의 본거지로서,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되찾아가는 선언적 의미로 조계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조계종이 조계사이고 조계사가 조계종입니다.

 오백년 배불의 한을 걷어내는 선언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조계사 신도는 제일 똑똑하고 올바른 신행하고 조계종 종지의 전통을 올바로 승계하는 신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조계사 신도는 정법수호의 씨앗이 되어야 하고,  불공 위주에서 수행 위주로 전환해야 합니다. 종교적 카타르시스의 감상 중심에서 이성적 중심의 불교로서 바로 보고, 알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감상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불교에서 이타중심.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그런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 자기 개인과 가족 중심의 불교만 하지 말고, 세상과 이웃과 사회에 관심을 갖는 조화를 이루는 조계사 신도가 되어야합니다.

 병도 낫고, 아들 출세하고, 남편 진급하고, 돈 버는 이런 현실 문제나 욕구를 하지 말란 말이 아니고 물질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생각하여 만족을 추구하고 금시일만 집착하지 말고,  미래와 내생의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마지막 제일 중요한 것은 계행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불교의 위기는 청정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파계를 서슴없이 하는 것을 빨리 바로 잡는 여러분이 되어야합니다.

 

 아무쪼록 조계사 신도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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