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바꾸세요
"네 생각 한번 바꿔라!" 신광불매만고휘유(神光不昧萬古輝?)하고,입차문내막존지해(入此門內莫存知解)이라.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여러분들 오늘 신중 기도 입재 하셨지요? 초하루부터 초삼일까지 신중기도를 잘하시면 여러분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1년 365일 지나도 부처님을 원망만 합니다. 세상에 부처님은 내가 땀흘려 벌어서 돈 갖다 놓고, 과일 갖다 놓고, 쌀 갖다 놓아도, 내 옆사람은 나처럼 많이 갖다 놓지도 않고, 정성스럽게 잘 하지도 못하는데, 옆사람한테는 복을 주고 나한테는 안 주나 하고 부처님을 한번 쳐다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오늘부터 신중기도를 잘 하시면 참말로 부처님을 대하는 마음이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잘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 것은 자기 스스로 깨달음을 위해서, 쉽게 얘기해서 자기 행복을 얻는 것, 부처님께 떡 주고 과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 행복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 믿으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기도 입재하는 날이고, 초하루이고 부처님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읊은 게송입니다.신령스러운 부처님 결코 어둠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고의 아름다움이 전개됩니다. 날 밝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저녁에는 눈이 어둡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밖에 나가려고 하면 정말로 허둥거리고, 무엇인가를 손에 잡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神光不昧萬古輝?(신광불매만고휘유)신령스러운 부처님 결코 만고에 어둡지 아니하고, 만고에 아름답게 펼쳐지리라.入此門內莫存知解(입차문내막존지해)이 조계사 문 안에 들어서는 사람은 알음알이를 벗어버리십시오. 내가 공연히 불교는 경전을 배우는 것을 불교를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와서 절하는 것이 참회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속으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님, 아미타불님 외우는 것을 우리는 염불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결코 불교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를 알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경을 거꾸로 외고 바로 왼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내가 깨달음의 길을 가기 위한 길입니다. 길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길은 아무리 잘 닦아놓아도 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잖습니까? 많이 알고 많이 배우고 많이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행복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깨달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러느냐? 실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공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교는 이론이나 아량이나 사량으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조계사 문 안에 들어서면서 그것을 집어 던지고, 여러분들이 바라고 원하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원하는 행복을 담을 수 있는 주머니만 가져오십시오. 그래야 거기에다가 담아 가지고 갑니다. 거기에다가 잔뜩 내 생각 또한 부처님 경전 아량 사량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을 모두 담아 들어오면은 받아 갈 수가 없습니다. 자루가 넘쳐서 담을 수가 없습니다. 실컷 와서 조계사 와서 듣고, 바로 법당 나가면서 "원장 스님이 무슨 말을 했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는 마음의 빈 그릇만 가지고 들어오세요. 유명한 소동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짧으면서도 뼈있는 이야기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 소동파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대문장가이자 인류학자입니다. 이 학자가 어느날 중국 옥천사라는 절을 찾아가서 보니까, 스님들이 앉아서 참선한다고 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졸고 앉아 있는 스님들이 공연히 땀흘려서 드린 시주를 먹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혼을 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마침 옥천사 선방에 들어갔습니다. 중국의 대문호인지라 아만과 오만으로 가득찬 사람이 스님을 혼내려고 들어선 사람이 어디 예의가 있겠습니까? 문을 갑자기 열면서 물었습니다. 손으로 스님을 가리키면서 "스님 이름이 뭐요?" 가만히 정신 삼매에 들었던 스님께서 눈을 번쩍 뜨고 관상을 보니, 문장 꽤나 학문 꽤나 한 듯싶은 사람이 와서 버릇없이 그렇게 물으니, "나는 이 절에 사는 중, 승호라고 하오. 선생께서는 어디서 오신 누구시며, 성씨가 어떻게 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소동파가 오만스럽게 앉지도 않고 인사도 안 하고 꼿꼿이 서서 "나는 중국의 대문장가이자, 대학자인 소동파요. 성은 칭씨요." "무슨 칭자를 쓰시오?" "저울대 칭자를 씁니다." "하필이면 그 많은 글자 중에 저울대 칭자를 쓰는지요?" "본래 대학자들은 전국의 누구누구 학문이나 지식이 충만한 사람들은 달아보기 위해서 저울대 칭자를 쓰지요." 선가의 그 청백이라고 하는 것은 맑고도 맑아 저울대 머리처럼 수평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에는 파리가 앉아도 기울어집니다. 불가에는 이와 같이 진리가 엄한 것인데, 그래서 저울대 칭자를 씁니다. "세상에 있는 지식이나 유명한 학자를 달아보기 위해 저울대 칭자를 씁니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승호스님께서 "으악!"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선생께서는 남의 학문이나 달고 지식이나 재려고 저울대 칭자를 쓴다고 하셨는데, 내가 지른 소리는 지식이 얼마나 되고, 학문이 얼마나 되는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유명한 학자요 대문장가이지만, 소리를 지르면서 그것을 재어 보라는 사람은 처음 보는지라 그대로 말문이 막혀 말 한마디 더 이상 못하고 돌아서서 나갔습니다. 그런 후에 어느 절에 가는데 이 사람이 가는 것은 자기 생각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소리 한번 지른 순간부터 자신이 가졌던 학문이나 지식이나 문장이라는 것을 일시에 완전히 잊어버리고, 승호스님께서 지른 그 소리만이 머리 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느 절에 갔는데, 진영각이라고, 옛조사스님들을 모셔놓은 전각이 있었습니다. 거기 가서 소동파가 "스님의 진영은 여기 있는데 그 주인공은 어디 갔는가?"라고 안내하는 젊은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진영은 여기에 있는데, 그 스님은 어디에 갔는가?" 라는 그것에 답변할 수 없었습니다. 젊은 스님이 답변을 못하자 옆에 있는 노장이 묻기를 "소동파 거사지요?" "예." 그러자 "대답한 사람은 묻지 않겠지만, 진면목은 어디 있는가?" 그럼 진면목과 그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 너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 그러나 너의 진면목은, 너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니 얼마 전에 승호스님한테 벽력같은 소리를 들은 후 또 그 노장이 말하기를 "말한 사람은 더 이상 묻지 않겠다. 그러나 너의 진면목은 어디 갔는가?"라고 하니, 의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의심을 가지고 제방의 선지식들을 쭉 돌아다니면서 그 의심을 깨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높은 선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곳을 찾았습니다. 상총이라고 하는 유명한 선사가 계셨습니다. 그 스님을 찾아가서 "스님한테 법문을 들으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은 유정설법만 들으러 다니는가? 무정설법을 놔두고 유정설법만 들으러 다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유정설법은 내가 이와 같이 나와서 여러분들을 보고 부처님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무정설법은 일체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이러한 것들이 전부다 부처님 말씀이 아닌 것이 없고, 그렇게 놔두고 왜 꼭 형상만 찾아다니느냐?" 유명한 문장가요 유명한 학자인데, 놀고 앉아 있는, 시주밥만 얻어먹는 스님들한테 야단을 치겠다고 했다가 말 한마디 못하고, 머리 속에 그것이 다 차 있어서, 그 차있는 생각이 부스러지지 않고, 버려지지도 않고, 놔 버려지지도 않고, 누가 뭐라고 해도 승호스님께서 지른 소리가 꽉 차있습니다. 또한 진면목, 무정설법이 머리 속에 꽉 차있습니다. 앉으나 서나, 먹으나 먹지 않으나 머리 속에 꽉 차있습니다. 이 상총스님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귀가를 하는데, 이 소동파는 말이 끌고 가는 대로 갈 뿐 자신이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통 머릿속에 그 생각뿐. 산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개울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소동파가 승호스님께서 지른 소리의 안목을 알게 되고, 또 진영은 여기 있는데, 그 진영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정설법과 무정설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읊은 게송이 계성변시장광설 (溪聲便是長廣舌) 이요,산색기비청정신 (山色豈非??身) 이리오.야래팔만사천게 (?來八萬四千偈) 하니타일여하서사인 (他日?何擧似人) 이랴. 바로 이런 게송 뜻은 본래 계곡에 흐르는 물은 부처님의 설법이 아닌 것이 없고.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모든 일체 만물의 소리가 바로 진실한 진리의 말이 아닌 것이 없더라는 뜻입니다. 산색은 청정색이요. 산에 있는 소나무, 잣나무, 바위덩어리 전부다 부처님이었습니다. 내가 생각 한번 바꾸는 ‘야래팔만사천게’ 하니, 내가 밤사이 팔만사천을 외우고 순간에 깨달아서 읊고 보니까, 승호스님께서 나에게 팔만사천 법문을 소리 한번 질러서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 노장한테는 사진은 여기 있으되 그 본체, 진면목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진면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왜 유정설법만 들으러 다니느냐? 단지 안목을 밝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소동파의 오도송입니다. 바로 여기서 제가 우리 불자님들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부처님서부터 역대 조사님들께서 가르치신 것은 바로 “네 생각 한번 바꿔라!”입니다. 너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만사에 편하지 못합니다. 고통스럽고, 짜증스럽고, 원망스럽고, 미웁고, 이쁘고 시비를 가려야 하니 평생을 편하지 못하게 됩니다. 너의 생각을 바꾸라고 이렇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조계사 초하루 신중 기도 법회에 참석하신 불자님들게서는 오늘 이 순간이라고 관념적 사고를 깨서 부숴 버리고, 새로운 신심으로 새로운 원력으로 실천할 때만이 여러분들이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서 가장 자유스럽게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여기서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느 스님이 천일 기도를 하는데, 한 백성이 찾아와서 자신이 천일 기도를 하겠다고 부탁했습니다. 백성이 하는 말인즉, 주지 스님께서는 목탁을 치시나 안 치시나 매일 그대로 기도를 하는 것이지만, 자기는 신심과 원력이 부족해서 자기한테 양보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지 스님께서는 학문이 출중하고 아주 청청한 스님이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간청하는 바람에 자신의 자리를 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축원은 스님께서 직접 하셨습니다. 3∼4일 지나서 법당을 지나가면서 보니, 법당 앞에 빨래줄을 만들어서 속옷을 너저분하게 걸어 놓았습니다. 수행과 법력이 높은 스님께서는 어의가 없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신성한 법당 앞에 누가 그렇게 했느냐?" 엊그제 기도하겠다고 온 백성이 "모든 것이 어리석고, 진실도 없고, 원력이 부족해서 제가 무지한 탓에 청정한 성불전에 저의 속옷을 걸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음날 법당에 들어가서 주지스님이 아연실색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야단맞은 백성이 몸뚱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홀딱 벗고 앉아 있었습니다. 주지스님이 “당장 나와라. 어제 야단을 맞고 정신을 차려야지, 신도들이 다니는 법당에서, 신성한 성전에서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고, 이것이 무슨 짓이냐?”그러니 그 백성이 주지스님께 삼배를 하고, “대자대비한 스님, 오늘 더러운 속옷과 양말을 하염없이 걱정하다가 주지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정이기에 제가 벗고서 법당에 들어갔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주지스님이 활연대오를 했습니다. 크게 깨우쳤습니다. 아,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로구나! 모든 것이 내 마음으로부터 더럽고 깨끗한 것이 있는 것이 있는 것이지, 더럽고 깨끗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판가름할 줄 아는 안목이 열릴 때만이 여러분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정말로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하면 생각을 한번 바꾸세요. 생각 바꾸지 못하면 안 됩니다. 형식으로, 의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연히 입으로 종알거리는 송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과 마음. 바로 외우는 송불과 염불. 진정으로 이참과 사참. 마음으로 참회하고 몸뚱이로 참회하고, 진정 마음으로 참회하고 물질로 참회하고, 기차 레일처럼 함께 갈 때만이 여러분들이 진실한 행복과 깨달음의 성취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을 한번 텅 비우고 생각해 보십시오. 법당에 어떤 마음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염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정 불퇴전의 용맹심으로 기도에 임하지 않으면 죽을 때 극락을 찾는 겁니다. 평생 믿고서도 극락을 찾습니다. 이것은 욕심입니다. 극락을 찾지 않으면 지옥이 없어집니다. 극락이 하나 생기면 지옥이 생기는 것입니다. 지옥이 없어지면 그대로 극락입니다. 그런 불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법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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