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조계사 뉴스
내 마음의 자유
날씨 춥죠? (예-)
추워요? (아니오-)
춥다고 하더니 또 물으니 아니라 하네. 또 한번 물으면 예라고 하겠네요. 날씨 춥습니까?" (예- 아니오-..... 하 하하 하)
겨울인데 왜 안 춥겠습니까. 손을 등 뒤로 깍지 끼어 어깨를 한번 쭉 펴보세요. 우두둑 삭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혈류가 딱 잡힙니다. 그럼 편안할 것입니다.
어제가 동지였죠? (예-)
동지가 뭐 하는 날입니까? ( ...... 하 하하 하)
동지는 아는데 동지가 뭐 하는 날인지 물으니 웃음으로 답하시네. 꼭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드니 가섭존자가 미소 지은 것과 같습니다.
이심전심으로 알기는 다 알지요? (예-) 바로 그것이 불가의 도리이고 이치입니다.
여러분들은 동지날 왜 팥죽을 쑤는지 아세요? 잘 모르실 겁니다.
동지라는 것은 24절기 중 하나입니다.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그래서 동지가 지나면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지요. 동지를 '아세'(亞歲)라고도 부르는데 작은 설이라 합니다.
그래서 동짓날에 선망부모를 위해서 천도재를 지내는 겁니다. 그래서 삼일기도를 지내는 조계사의 훌륭한 불자들이기에 이것은 꼭 가르쳐 드리고 싶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동짓날부터 어둠이 짧아지기에 이 날은 어두운 그림자 즉, 일년 동안 지은 죄와 업장을 소멸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즐거움과 행복을 발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동지 불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 팥죽 쓰는 것을 보고 혹자는 불교는 미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양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서양에서도 동지를 셉니다.
오행설로 보면 붉은 것은 양이고 검은 것은 음입니다. 밤 되면 무서워하고 밝으면 기뻐하는 것처럼, 불운을 물리치고 행운을 발원하기 위해서 붉은 것을 씁니다. 그래서 어느 지방에서는 황토를 마당에 뿌리기도 합니다. 어둠과 고통, 재앙을 물리치는 것이 붉은 것이고 가장 적합한 것이 팥이기에 농경사회였던 우리는 붉은 팥을 사용해서 팥죽을 쑨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유목민이 양의 목을 따서 피를 마당과 대문에 뿌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불교에서 미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민속신앙으로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기복 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복신앙이 불교와 만난 것은 아닙니다. 불교가 아무리 돈을 갖다 놓고 기도해도 믿음이 없으면 기도 성취를 못합니다. 그렇듯 이것을 미신이라거나 불교에서 지향하는 깨달음의 경지라고만 보아도 안됩니다. 혼합된 민족신앙이요 진실한 신심을 돋구기 위한 문화적 풍습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요즘은 여자들도 제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은데, 여권신장 시대이기에 해야한다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안됩니다.
옛 문헌에 나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유교에 제례법에 보면 소현과 아현이라는 것이 있는데 소현이요 하면 큰아들이 잔을 올리고 아현이요 하면 며느리가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제를 올린다는 부부공제라는 것이 문헌에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와서 배척을 했습니다. 여자는 안된다고 하니까 소현은 장자, 아현은 둘째 아들이 올린다고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도 죽도록 제물만 차리지 말고, 문헌에 부부가 공동으로 제사를 올린다고 나와있으니 나도 올려야한다라고 이야기 하십시오.
이런 것이 전부 다 '도(道)'입니다. 도는 길입니다. 다른 데로 생각하면 엉뚱한 것이 도인데 . 일체 천하만물이 부처님 법 아닌 것이 없고 부처님 몸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 없습니다. 화중지병(畵中之餠)이라고, 그림의 떡과 같이 아무 쓸모 없습니다.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하지요. 제사 때 밤, 대추, 감을 왜 놓는지 아세요?
유교 제례하시는 분들은 대추는 씨가 하나니까 궁을 표시하고, 밤은 세 쪽이니 삼정승을 상징하고, 감은 씨가 일곱 개니까 칠대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과학적으로도 분석해 낼 수 없는 논리를 전개하고 생활 속에 접목시켰다는 것도 알 수 있어요. 대추는 꽃이 피어서 열매가 맺기 전에는 대추꽃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조한테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바람에서 대추를 놓습니다. 밤은 꽃이 피어야만 그때서야 밤껍질이 슬쩍 뿌리를 벗어납니다. 그것 역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바람입니다.
감을 심으면 감나무가 되겠지요? 아닙니다. 감은 심으면 조그만 열매가 열리는 고욤나무가 됩니다. 거기에 감나무 접을 부쳐야 됩니다. 접 붙인다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사돈 잘 둔다는 뜻입니다. 딸이 있는 사람은 사위 잘 들어오고, 아들 있는 사람은 며느리 잘 들어오는 그런 바람을 선조들한테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망부모에게 기원하고 발원하는 뜻에서 이 세 가지 과일을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 하지요. 절에서는 아들이 죽어도 향 피우고 절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 아닌가 하는데, 마음 푹 놓고 당당히 절 하십시요. 여러분들 어른이라고 대우를 받는 것은 이 세상에 먼저 왔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먼저 간 사람은 선망(先亡)입니다. 먼저 왔기에 어른 대우 받는다면 먼저 간 사람이 어른 대우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은 이치이고 원리이자 법칙입니다.
제가 오늘 읊은 게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높이 있는 절은 산이 깊어서 드나드는 사람이 적다.
집은 멀리 떨어져 있으니 길을 만들거나 닿기가 어렵다.
활짝 열려있는 개선문은 한가닥 미풍이고 뉘엿뉘엿 해 떨어질 때 앞 산 소나무는 더욱 푸르다."
이 이야기는 깊은 산에 은밀히 숨어 있는 절은 길이 험하고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듯이, 훌륭한 도덕도 이와 같아서 우리가 챙기기 힘들다. 높은 절이나 멀리 떨어진 집이라는 것은 바로 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깨달음이기도 하고 여러분이 추구하고자 하는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산이 험하고 길이 멀다고 이야기 한 것은 도를 구하려면 험하고 번거로운 번뇌망상의 세계를 거쳐야만 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번뇌망상이 생기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생깁니다. 그러니 내 마음만 구름 걷듯이 훌떡 걷어 버리면 시골집 사립문이 미풍에 열렸다 닫혔다 하듯, 앞산의 소나무가 항상 푸르듯이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으며 그 번뇌의 늪을 벗어나서 그와 같이 살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제가 읊은 게송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들은 기도처는 고요하고 특정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강화 보문사, 강원도 홍련암, 남해 보리암, 갓바위. 이런 곳은 일년에 한 두번 가기도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면 기도 성취한다고 생각하니, 모처럼 갈 때는 먹던 음식도 며칠 끊고 몸에 때도 벗기고 정말로 간절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갑니다. 가서는 춥거나 덥거나, 잠자리가 안 좋아도 불평 없이 오로지 기도의 원을 세워 성취해야겠다는 생각만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성취됩니다. 그것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성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런 마음을 먹을 거예요, 안 먹을거예요? 그렇게 마음 먹으면 기도처가 어디예요? 바로 여기 조계사가 기도처잖아요. 그럼 집에 갈 때 조계사 떠 가지고 가야겠는데, 떠 가지고 갈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합니까?
마음이에요. 마음으로 짓는 것이니까 마음만 잘 지으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밖으로만 찾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진실한 부처인데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느냐. "
공연히 밖에서 찾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직 내 마음이 부처이고 내 마음에 행복이 있는데, 저기 낙산사, 갓바위, 보문사.... 이렇게 헛된 곳을 찾아다니더라. 그러니 그렇게 헛걸음, 헛된 돈 쓰지 말라.
만약에 밖으로 부처를 구하고, 즐거움을 구하고, 행복을 찾는 사람은 번뇌가 많다. 왜 그러냐하면 보문사 가서 기도해도 안 이루어지니, '아이구 부처님-' 하며 속만 상하니 그러면 그것은 번뇌, 고통, 원망입니다.
제 마음이 청정하고 올곧고 진실하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 복이 되고 고통이 면해지는데 그 원리를 모르고, 내 손바닥 안에 모든 것이 있는데 밖으로만 찾고 다닙니다.
할 일 없는 사람은 정말 자유롭다고 했는데, 할 일 없다는 것은 마당 쓸고 밥 짓는 할 일이 아닙니다. 일체 바랄래야 바랄 것 없고, 구할래야 구할 것 없고, 버릴래야 버릴 것 없는 그 자체가 바로 도인입니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행복입니다. 그렇게 된 사람은 대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스님이 말하길, 산중에서 선정에 들고 계를 지키고 음식을 가려먹고 생활을 조촐히 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스님들은 절에서 공식적인 일정에 의해 움직이니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경계를 당해서도 그렇게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자리를 챙길 수 잇는 것은 결코 정(靜)이 있는 곳만은 아니다. 산중에서 가부좌 틀고 있다고 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어떻게 챙기고,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부처님 염불하고, 기도 축원하고 간경하는 그 결과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고요한 가운데, 짜여진 스케줄대로 사는 것만이 깨달음과 행복을 얻고 소원성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결코 선(禪)이라는 것은 정(靜)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동(動)에도 있습니다. 사(死)에 있는 것만 아니라 활(?)에도 있습니다. 사는 법이 불교법입니다.
생사가 둘이 아니라 했고 아상 인상이 본래 공이라고 금강경에 있습니다. 나라는, 너라는 상이 본래 없으니 분별하지 말라. 너가 차별상을 내서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지 좋고 그른 것도 둘이 아니다. 생각 한번 바꾸면 좋은 것이고 바꾸지 못하면 고통스러운 것이다. 행복과 불행도 둘이 아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보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했습니다.
재산이 늘었을 때는 기쁘지만 줄면 고통입니다. 거기서 재산은 하나인데 그 하나 가지고 고통스럽거나 즐거워할 뿐입니다. 그래서 부증불감은 본전입니다. 석가도 본전이요, 가섭존자도,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도 본전이고, 여러분도 나도 다 본전입니다. 그런데 본전의 이치를 모르고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족하려 하고, 그것만 쫒아 밖으로만 다니다 보니 피곤하고 지치고 원망하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이제부터 내 마음에 고통, 행복, 극락, 지옥, 만족, 깨달음이 있는데 내가 차별상을 했구나. 차별상만 부숴버리면, 바랄래야 바랄 것 없고 버릴래야 버릴 것 없는 최고의 만족인 해탈,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되고 그 사람만이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이런 마음으로 한 마음 훌떡 뒤집어 밖에서 찾지 말고 내 안에서 찾는 지혜로운 불자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흐르는 강물이 흘러가 없어진 줄 알았는데 바다에 가보니 거기 다 모였다.
달이 떨어져 없어진 줄 알았는데 하늘을 의지하고 또 떠 있더라."
이 이치를 잘 보듬어 챙겨보시면 여러분들은 근심 걱정 없는 해탈의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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