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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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이 곧 부처다
(주장자 세 번 내려치시고 주장자를 들어보이시고)
시회대중은 회마? 아시겠습니까? 이 산승은 학림사 오등선원에서 한걸음 나오기 전에 이미 모든 법문을 다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께서도 집에서 한걸음 내딛기 이전에 이미 법문을 다 들은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 이 자체도 크게 기특한 말이 못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 자리에서 대중들에게 뭐라고 말씀을 드린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인격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 허물을 면치 못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앉은 것은 조계사 주지 스님 그리고 여기 계시는 사부대중의 요청 때문입니다. 앉기는 앉았지만 한 글귀도 여러분에게 드릴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한 글귀도 들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바로 아신다면 오늘 참석하신 대중은 정말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드려야 할 말이 있고 여러분이 들어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흙 바닥에서 뒹구는 꼴이 되고 오줌을 뒤집어쓰는 꼴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바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석한 사부대중 가운데 바로 보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을 위해서 이 산승이 부득불 동설수설(東說西說)이라, 동을 말하게 되고 서를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그 거짓말에 대해서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선과 깨달음’을 주제로 법문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선’이냐. 그것을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을 드립니다. 찬풍음로(餐風飮露)라. 바람을 먹고 이슬을 마신다. 이렇게 대답을 드립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깨달음이냐’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석인정오타삼경 산고수심백화향(石人正午打三更 山高水渙百花香)’이라. 돌사람이 정각 낮 열두시에, 밤 삼경의 종을 치니 산은 높고 물은 깊은데 백가지 꽃의 향기로다. 이렇게 저는 대답을 드립니다.
저는 아주 간단하게 말씀을 다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시 좀 더 깊은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원각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글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원각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체중생 종종환화(一切衆生 種種幻化)가 개생여래원각묘심(皆生?來圓覺?心)’이라 했습니다. 일체 모든 중생이 다 환하다. 모두 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생은 꿈속에 살면서 꿈인 줄 알지 못합니다. 꿈을 진실로 착각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꿈을 꿈으로 바로 본다면 그 사람은 꿈을 여읜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작방편(不作方便)이라. 거기에는 방편이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이환즉각(離幻卽覺)이라. 꿈을 여읜즉 바로 깨달은 것이라. 역무점차(亦無漸次)라. 점차가 뭡니까. 깨달음의 오십오 점차를 논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 조사와 팔만사천법문이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두 다 꿈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묘심(?心)은 어떤 것입니까? 이렇게 묻자, 회당 선사가 답하기를 그랬습니다.
(주장자 한번 내려치시고)
비단 이불에다가 원앙수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놓은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지만 수놓은 바늘은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 일구(一句)에서 터득하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라 했습니다. 제 이구(二句)에서 터득하면 인천(人?)의 스승이라. 하늘세계와 인간세계의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제 삼구(三句)에서 터득하면 자기도 구하기 어렵다 이랬습니다.
어떤 것이 제 일구냐. 이 산승이 학림사 방에서 한걸음 내딛기 이전이 일구이고 자리에서 일보이보를 걸어서 이 법상에 말없이 앉아있는 이것이 제 이구 입니다. 어떤 것이 제 삼구냐. 이 산승이 법당에서 말을 하고 묻고 답하고 하는 것이 제 삼구입니다.
(주장자 한번 들어 보이고 내려치시고 이르시대)
이것은 어느 글귀에 해당합니까? 이것은 마음입니까 부처입니까? 아니면 물건입니까? 아니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있다고 해야 됩니까? 없다고 해야 됩니까? 아니면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해야 합니까? 뭐라고 해야 합니까?
일구라고 해도, 이구라고 해도, 삼구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있다 없다 해도 맞지 않습니다. 중도실상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중도실상이 무엇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어디에 중도실상이니 그런 말을 합니까? 그런 표적을, 규정을 둔다고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것은 만약 있다고 해도 실상이요 없다고 해도 중도실상입니다. 중도실상이란 양변을 여의고 중도실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중도실상으로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아함경에서 양변을 여윈 것을 중도라고 하신 것은 하근기 중생들을 위한 말씀이고 대승경전의 차원에서는 ?卽菩提라 (망상이 곧 보리라) 말씀하셨다. 양변과 실상이 다르지 않는 것이다. 양변이 곧 중도 실상이고 실상이 즉 양변이다. 양변을 여의고 따로 중도실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중도실상이란 것을 딱 규정 짓지 말아라. 이것이 곧 중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이름 뿐이니 속지 말아라.
어떤 사람은 법거량을 하러 와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고 주먹을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빙빙 도는 사람이 있고 절을 하는 사람이 있고 문을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이 있고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 세상이 이뤄지기 이전에 나는 일렀다. 또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기 전에 나는 이미 일렀다. 또 부처님이 오시기 전에 일렀다. 또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기 전에 일렀다. 이렇게 한다면 그것이 옳을까요. 벌써 그것은 제 이구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바로 넉넉히 너에게 10가지를 만족하게 다 일러줬다. 그렇다 해도 좌지우지를 면치 못함이라 도리어 알겠는가?
태평세상은 본래 장군이 이루었지만 그 장군은 태평세상을 보고만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것이 일구인고?
(스님이 조금 있다가 으--악 활하고)
게송을 일러시데
붉은 해가 하늘에 솟아오르니
만국의 세계가 밝고
구름은 스스로 높이 날고
물은 스스로 흐름이라.
바로 여기에서 깨달아 계합하면 찰라에 여래의 지위에 들어감이라.
혹 그렇지 못할진덴 귀신굴에 떨어짐을 면치 못함이라 팔만사천 깊은 법문이 문마다 길이 있어서 하늘 땅을 뛰어 났는데 저 어떻게 낱낱이 밟아서 착하지 못하는고.
그런데 여기에서 법문하는 글귀를 하나만 알아 듣는다면 상당한 수준에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왔지만 사실은 큰 맛이 없는 소리입니다. 맛이 없지만 여러분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를 때는 깊이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팔만사천 부처님 법문이 전부 깨달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조사 스님 말씀이 모두 깨달음의 말씀입니다. 바로 그 말씀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전부 깨닫는 말씀을 해 놨는데 왜 깨닫지 못하느냐 말입니다.
지네는 발만 많은 게 아니라 입도 많습니다. 게다가 입은 못으로 된 입이요, 혓바닥은 쇠로된 혓바닥입니다. 그래서 더욱 부질없이 추한 것만 더했다. 여기에 이르러서 모든 것을 몽땅 다 털어버리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어떤 사람은 주장자를 이렇게 들어서 세우고, 어떤 사람은 불자를 들어서 보이고, 어떤 사람은 눈을 깜빡깜빡 하고, 어떤 사람은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불자를 든다든지 주장자를 든다든지 하는 것은 진흙 밭에서 진흙을 닦는 것과 같습니다. 눈을 깜빡깜빡 한다 미소를 짓는다 하는 것은 닭이 둥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부처님도 조사도 이르지 못한 것에 가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컨대 알라. 불조도 이르러지 못한 곳에 문을 닫으니 꽃은 떨어지고 봄에 새는 운다.
오늘 법문은 간단하지만 이것으로 다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선 법회라고 하니 조금 더 차원을 낮게 해서 몇 말씀 덧붙이겠습니다.
40년 정도 선방에 다니셨다는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공부를 지었으며, 어떻게 깨달은 바가 있으며, 어느 분에게 선지식을 지도받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분 말씀이 기가 막힌 말씀을 했습니다.
그 스님이 “저는 선지식(善知識)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무엇을 믿습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스님은 “열심히 정진을 하면 불보살님이 나타나서 가르쳐줍니다. 가르쳐 준 것을 공부하면 되지 뭐 믿을만한 선지식이 있어야지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처님 밑으로 가섭존자, 아난존자 밑으로, 우바국다 존자가 있습니다. 부처님과 우바국다 존자까지 100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바국다 존자는 항상 마음속에 그리워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다가 백년 뒤에 태어나 부처님을 왜 만나 뵙지 못했나, 억울하다 이겁니다.
하루는 오늘처럼 우바국다 존자가 법회 도량에서 법문을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풍악 소리가 울리고 천지가 진동을 했습니다. 꽃비가 날리고 허공에서 오색 무지개 광명이 내리더니 그 광명 한줄기를 타고 어떤 거룩한 사람이 큰 코끼리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기가막힌 일이라서 사람들이 존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거기에 집중했습니다. 존자가 선정에 들어서 살펴보니 그것은 마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왕의 신통술을 제압했습니다.
그러자 그 마왕은 “아직은 정법의 기운이 있어서 안 되겠군요” 하면서 존자에게 절을 했습니다.
존자가 “그대가 마왕이라면 신통술이 있으니 부처님 모양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내줄 수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마왕은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께서 저에게 절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부처님 모양 그대로 나타냈습니다. 그러자 존자가 자기도 모르게 절을 했습니다. 마왕이 “존자여 절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존자는 “제가 절을 한 것은 마왕을 보고 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를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왕은 “존자께서 이러 하건데 이천년 삼천년 후 말세에 제가 부처님 몸으로 나타난다면 그 누가 속지 않겠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우바국다 존자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속지 않으려면 回光反照하라 전면에 나타난 것을 보는 이놈이 무엇인지 돌이켜 살펴라. 무엇인고? 하고 깊이 의심 觀을 하면 모든 마구니는 머리가 깨지고 흔적조차 없어진다 했습니다. 이-뭣고! 하는 곳에 속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스님에게 “선몽으로 보인다면 마구니도 부처님의 몸으로 나투실 수 있는데 어떻게 가릴 수 있겠습니까. 가릴 수 있다면 스님은 선지식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와 같은 공부는 정말 위험천만입니다. 참선을 하다가도 이상한 경계가 나타나고, 염불 기도를 하더라도 이상한 경계가 나타나고, 주력을 하다가도 이상한 신이 나타나고, 이렇게 속아서 외도로 빠지는 사람이 무수히 많습니다. 속지 않으려면 올바른 선지식을 만나야 합니다.
이몸을 끌고 다니고 부리는 이놈이 무엇인고? 깊이 의심을 하여 회광반조 하면 일체에 속지 않고 바로 여래지에 들어 갈수 있습니다.
본래 깨칠 것이 없다고 말하는데 여러분이 왜 이 자리에 와 있습니까? 깨칠 것이 없는 것을 알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이 뭣고’ 화두는 내려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모든 공부를 다 해봤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보리수 나무 아래서 일주일 동안 앉은 다음 깨닫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은 무엇을 했을까요? 이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어느 날 나무 밑에 앉았는데 장사꾼이 돼지새끼를 메고 가는 것 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네가 메고 가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상인이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춘 분이 이 돼지새끼도 몰라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냥 물어 봤노라” 그랬습니다. 왜 물어봤겠습니까. 이러한 곳에서 부처님은 무엇이냐. 법문한 사람이 무엇이냐.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뭣고 화두가 들어 있습니다.
육조 스님한테 남악회양 스님이 찾아갔습니다. 남악회양 스님은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이 많이 안다 하니까 내가 대적해 봐야지 하고 찾아갔습니다. 갈 때 무엇을 물으면 이런 대답을 할 것이고 이런 것들을 다 준비해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는고’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리에 준비해 간 것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망연자실해서 돌아가 팔년 동안 연구해서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육조 스님이 ‘그렇고 그렇다. 모든 부처님이 그렇고, 모든 스승이 그러하고, 나도 그러하고 너도 그러하다. 그래 닦아 증득한 것 있느냐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남악회양 스님이 답하기를 “닦아 증득 할 것이 없지는 않으나 물 들일래야 물들이지 못합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여기에서 완전히 인가를 했습니다.
남악회양 선사 회상에 또 마조 선사가 있었습니다. 마조스님 역시 8년동안 앉아서 좌선을 하고 있는 중에 남악회양 선사가 앞에 다가가서 “뭘 하느냐”하고 물었다. 마조 선사가 답 하기를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해 앉아있다”고 했습니다. 남악회양 선사가 기왓장을 갈고 있는데 마조스님이 다시 묻기를 “기왓장을 왜 갈고 있습니까?” 남악회향스님이 답하기를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려고 한다네.” 마조스님이 말 하기를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 만든다는 말은 스님께 처음 듣습니다” “이 사람아 앉아서 부처가 된다는 말은 자네에게 처음 듣네. 앉아서 부처가 될 모양이면 산이고 바위고 다 부처가 됐겠다. 앉아서 부처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너밖에 못봤다”라고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자 마조 선사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다시 남악회양 선사가 “소가 가지 앉을 때는 소를 때려야 되겠느냐 수레를 때려야 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옛날에 어느 절에 공부 많이 한 훌륭한 조실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 그거야 소를 때려야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저는 웃었습니다. “왜 웃느냐”고 조실스님이 물었습니다. 제가 “스님 소를 때리는 것은 거리가 멉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만약 마조 스님이 회양 선사에게 소나 수레를 때려야 된다고 했으면 너는 아직 안됐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마조 선사는 그 한마디에 뒤집어 엎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깨달았습니다.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모든 게 선이어서 선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빔밥처럼 모두 선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선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선에는 범부선, 외도선, 소승선, 대승선, 최상승선 등이 있습니다. 범부, 외도선 등은 선이 아닙니다. 최상승선이 바로 여래선이고 조사선입니다. 범부선은 중생들이 생활고를 해결하고 욕망과 욕심의 생명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생활 다툼을 하는 이것이 범부선이고, 단전호흡 신통변화를 배우고 건강비법을 닦고 법술을 익히고 사주관상과 영통술을 하는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것이 외도선이며, 사무량심 사념처관 사선팔정 12인연 고집멸도 사제법 이것은 전부 소승선에 속하며 아라한과를 증득한 뒤에 10천겁을 지난 뒤에야 55위의 지위 첨차에 속하는 10신 초문에 들어옵니다. 단 사념처관에서 대승의 불지를 깨닫는 분도 있습니다.
대승선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자리를 깨닫고 자타가 성불하기 위한 마음으로 수행을 하는데 이것은 전부 무량아승지겁을 닦은 후에야 깨달아 성불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소비 해 가면서 공부를 해야 되느냐 빠른 시일 내에 깨닫는 도리를 말씀하신 것이 최상승선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관법과 사선팔정의 선을 닦았지만 자기를 완전히 깨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마지막 보리수 나무 밑에 앉으면서 “깨치지 않으면 나는 일어나지 않으리라”하고 일주일을 용맹정진 한끝에 성도절 새벽별을 보고 대각을 했습니다.
최상승선 이 자리는 깨치고 안 깨치고를 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래의 대각자리를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역대 조사 스님들이 ‘왜 뜰 앞의 잣나무’나 불성이 ‘없다(無)’고 합니까. 그분들은 대각의 이 자리에서 바로 전해줬습니다. 그 자리에서 심정 변화가 일어나 계합(?合)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안 되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면 십년이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생에서 마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돈오, 최상승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년 동안 해서 안되면 내 목을 자르십시오. 그래서 오늘날도 수좌들이 선방에서 공부를 합니다.
여러분이 태어나서 지향하고 추구하는 것이 행복하게 살자. 그러면 무엇이 행복한거냐 물으면 답하지 못합니다. 행복은 불행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행복은 편안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 불행한 것이냐 하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면 편안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편안하느냐. 이게 바로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라. 안심입명처는 마음이 편안함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요약하면 바로 안심입명처 입니다. 우리 중생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욕심으로는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바로 알면 영원한 안심입명처를 얻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산승의 지난날 출가한 시절 공부한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공양주 5년 동안 일주문 밖을 나가지 않았고, 떨어진 옷에 내복도 없이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 공양주를 해야만 했습니다. 주지스님께서 쌀두말을 주시면서 5일 동안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절 집안의 대중이 일정하지 않아 들쭉날쭉 정 할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절 사정 이었습니다. 5일을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3일 혹은 2일 만에 쌀을 얻으러 말을 들고 가면 ’이틀치 쌀을 어디에다 감추었는지 가져오라‘ 하시며 크게 야단을 치고 문을 닫으면 추운 겨울에 내복도 입지 않고 한시간 두시간을 밖에서 떨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전신(全身)이 톱으로 잘려 나가는 아픔을 견뎌야 했고 수도 없이 반복되는 고행을 참아야 했습니다. 주지스님께 다시 묻지를 못했습니다. 변명을 대면 스님께서 대꾸한다고 꾸짖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스님께서 ‘사라‘를 가져 오라고 하셔서 무엇인지 알지 못해 묻지도 못하고 무조건 채공간에 가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가지고 갔습니다.
4번의 꾸지람을 듣고서야 한 생각이 나서 ‘알았다’ 하고 스님께 갔습니다. ‘사라 가지고 왔느냐?’ 하시기에 ‘예’ 하고 대답 했습니다. 그때 생각에는 그릇을 전부 가져 가도 맞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사라사라 시리시리’의 진언이 있는데 사라사라가 이 대목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사라사라 시리시리’가 아닙니까‘라고 대답하니 스님께서 노발대발 하시면서 ‘저놈이 미쳤다’ 하시면서 다시 가져오라 하시므로 다섯 번째 쟁반을 가지고 가서 합격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5년 동안에 행자들 500여명 정도가 도망을 갔었습니다. 행자가 없을 때는 혼자서 공양주, 채공, 갱두까지 도맡았습니다. 그 당시 인천의 보각사 조실로 계셨던 만옹 대선사께서 조실을 그만 두시고 남장사에 주석 하셨습니다. 저를 보고 대근기라고 칭찬 하시고 묻기를 ‘요사이 너는 무엇을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관세음보살을 일념으로 염불을 해서 앞일이 훤히 알아져서 견성을 했다고 말씀을 드렸드니 ‘아 이놈이 마구니가 되겠는걸’ 하시고 주장자로 한대 때려서 맞았습니다.
그리고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 ‘탕탕’ 땅을 두드리시며 묻기를 ‘이것이 무슨 법문을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는 관세음보살을 일념으로 염불하고 있었는데 만옹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는 의심이 불길처럼 크게 일어 났었습니다.
청솔가지를 때고 밥을 짓는데 여러 개의 나무가 활활 타는데, 한 무더기의 불길이 솟아 법계에 충만한 광명을 보는 순간, 밥솥에서 밥물이 끓어 ‘푸르러 퍼시시’ 하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대교(?敎)를 본 스님이 한분 계셔서 이렇게 깨달았으니 한 글귀 좀 적어 주시길 간청했더니 꾸지람을 주고 무시 하길래, 이렇게 말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행자지만 저도 이력종장(履歷宗匠) 될 수 있는 자질이 있으니 무시 하시지 마시고 저의 깨달은 바를 글귀로 옮겨 적어 주시오’라고 간청 했더니 마지못해 저의 뜻을 불러 주는 대로 적어 주셨다.
(부엌 조)內火光 蓋?地 鼎中湯聲 脫古今
無?說法 非別界 目前歷歷 只底是
부엌 안에 한 무더기 빛나는 둥근 불빛 천지를 덮고
솥안에서 끓는 한 소리 옛과 이제를 벗어 났음이라.
무정설법이 별 것 아니니, 목전에 역력하여 다못 이것이다.
만옹 큰스님이 보시고 극찬하셨다.
일생 절 집안에 살아도 이런 말을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시면서 더욱 정진하기를 당부 하셨습니다. 그 후에 혼해 큰스님과 고암 큰스님께 두 번의 깨달은 기연이 있지만 지금은 시간상 다 소개 해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이 공부는 절대적으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극치에 달하면 한 글귀 깨닫습니다. 옛날에는 법문을 한다면 백리 길도 걸어서 갔습니다. 오늘은 무슨 법문을 할까 하고 걸어서 가면 법문을 듣고 바로 깨닫습니다. 그러나 법문을 들으러 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가서 죽치고 앉아있으면 들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법문은 철저한 믿음으로 다 비워버리고 놓아버리고, 산승의 말을 듣는 동시에 몰록 여러분의 사는 자리가 무너지고 부서지고 뒤집어져서 바로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난새가 하늘을 높이 날으니 그 자체가 없고
영양이 높은 나뭇가지에 뿔을 걸고 잠을 자니
자취를 찾아 볼 길이 없네.
뿔과 손을 놓으니 의지할 곳이 없는 곳에 전체가 드러나고
조각배를 탄 어부는 갈대밭에서 잠을 잔다.
(주장자 세 번 내려치고)
어~억!
<대원스님 약력>
1942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1957년 16세에 상주 남장사로 출가했다. 윤고암 스님을 은사로, 하동산 스님을 계사로 득도수계 했으며, 20세에 하동산 스님에게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그 뒤 오대산 상원사, 도봉산 망월사, 문경 봉암사, 김룡사, 범어사,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극락암등 제방선원에서 안거하면서 효봉, 동산, 고암, 경봉, 전강, 향곡, 성철, 구산, 월산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모시고 공부를 경책 받으며 오로지 선 수행으로만 일관했다.
<질문과 문답>
△스님께서 법문 도중에 게송을 읊으시면서 마지막에는 꼭 아미타불을 찾으시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0대 보살님 질문)
→천년 요괴가 몸을 벗어 버리니 붉은 다리에 맨발에 머리에는 쓴 모자도 없고 한쪽 눈만 갖춘 사람이라.
△깨치기 전과 후의 세계는 어떻게 다릅니까.(50대 거사님 질문)
→나귀 다리는 짧고 노새 다리는 길다.
△“수레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소를 때려야 한다”고 하지만 스님께서는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40대 보살님 질문)
→구멍 없는 쇠뭉치요 활활 타는 불구덩이니라.
정리: 남동우 기자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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