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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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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행사

열반으로 가르치신 부처님

  • 입력 2004.03.08
  • 수정 2025.01.15

불자, 법우 여러분. 감사합니다.

 3월에 내린 눈으로는 서울 역사 백년 만에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덮어서 깨끗한 하얀 눈만 보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고 기도하는 것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번뇌 망상을 다 쉬고 비우고 소멸시켜서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 본래의 마음을 순백의 눈처럼 만들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 티끌도 없고 아무 것에도 오염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덮어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이 눈의 모습이야말로 우리 본래 마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 열반의 마음도 온 세상을 덮은 하얀 눈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 합니다. 모든 번뇌 망상을 다 쉬어버리는, 그래서 삼독의 불길에 의해 타고 고통받는 것이 다 소멸된 상태를 열반의 세계, 열반의 마음이라고 경전에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얼마전에는 출가재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출가열반 정진주간을 선포하고 열심히 수행을 했습니다. 각자 부처님의 출가한 뜻을 새기면서 출가의 마음으로서 기도정진을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그 출가열반 정진 기도 기간에 어떻게 정진을 했고, 그 정진의 성과 또는 기도의 성취를 어떻게 했는지 각자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러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출가열반정진 회향을 하는 날이고, 열반재일이기도 하고 조계사 16대 신도회가 회향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회장님을 비롯한 고문, 지도위원, 회장단 각 사무처 부장, 각 진행단체, 단체 임원들, 그리고 모든 일반 신도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조계사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기 위해서 그동안 우리는 많은 몸부림을 쳐왔습니다. 여기에 신도회가 일심단결하여 조계사를 수행과 기도의 도량으로 위신력 있고 청정한 도량으로 가꾸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도 한사람 한사람이 수행과 기도의 큰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 교육도 받고 신행활동도 하고 신도회와 함께 화합을 통해서 열심히 해 왔습니다. 정말 그 어느 때 보다도 일심단결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16대 신도회는 임원, 일반 신도, 사무처, 종무원, 스님과 더불어 일심단결 화합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정진했다는 것을 자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15대 14대 신도회에서도 우선적 목표였지만 16대에서 그것을 완성시켰습니다. 각자의 기도 정진을 통해서 자신이 한 발 더 정진하고, 업장을 소멸하고, 삶의 모든 부분을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고, 사찰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불교가 사회적 역할을 하는데 일조하는 중심이 되었고 그 주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과는 욕심껏 되지 않았다 해도 한 발짝 옮겨 놓았다는 것이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박수를 보내고 찬탄을 하고 동참을 해야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모았을 때 불사가 되는 것이지, 독지가 한 사람이 몇 억을 내놓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도 한 분 한 분이 불사의 가치와 의미를 공유하고 원력을 발원하고 함께 호흡 맞추어 나가는 힘이 어떤 물질적 힘 보다도 큽니다. 그 힘이 없으면 조계사가 운영이 되지도 않고, 불교의 발전도 안되고, 수행정진을 통해서 기도성취를 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17대 신도회가 출발합니다. 17대 신도회는 16대가 일구었던 기반 위에서 더 확실하고 가시적이며 그 뜻을 깊이 확대시키는 일들을 하리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열반재일입니다. 출가열반 정진재일을 회향하면서 출가의 참뜻과 열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참뜻이 무엇이었느냐? 한마디로 인생에 대한 무상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기 전에 인생의 무상을 느끼는 과정을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합니다. 동서남북의 네 방향의 성문을 나가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인생의 근본적인 고통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런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고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마지막 문에 나가서 수행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수행자가 중생의 근본적 고통의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행한다는 것을 듣고는 바로 이 길이 내가 갈 길이로구나 생각하고 결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성을 넘어서 출가합니다.

 우리 중생들이 오욕(五欲)에 젖어 노예적 삶을 사는 모습을 보고 거기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찾기 위해 출가를 선택했습니다.  출가해서 육 년간 고행 끝에 성불하시고 중생을 제도하다가 81세에 열반에 드십니다. 열반의 의미는 무엇이냐? 탐진치(貪嗔癡)의 삼독(三毒)이라는 뜨거운 불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열반이라고 했습니다. 출가의 계기나 열반의 의미나 같습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무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본래 모습을 찾는 길이 출가의 길이고 열반의 가르침이고 의미입니다.

 연세 많으신 앞에서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이제 저도 '인생의 마무리를 준비해야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그런 감정을 가질 때는 아닙니다만 나이가 오십이 넘으니까 옛날에 하지 않았던 생각이 저절로 들때가 있습니다. 너무 이른가요? 이르든 늦든 그런 생각이 드는걸 어떡합니까.

 일이라는 것이 수행과 다르지 않고 수행이 일이고 일이 곧 수행입니다. 포교나 복지사업도 일이자 수행이라고 볼 있지만 어쨌든 일과 수행을 분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행을 하는 것이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을 놓고 수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느냐하면,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변화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약하게 되고, 예전에는 강력했던 추진력도 이제는 한 발짝 뒤에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더라구요.

 어느 스님이 '무식한 포수가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을 하더라구요. 이 말은 호랑이가 굉장히 무섭다는 것을 모르는 무식한 포수가 호랑이를 때려잡고, 유식하면 무서워서 잡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제 유식한 포수가 되었습니다. 일에 대해서 무식하게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죠. 일이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것이죠. 옛날에는 꾀부리고 피할 생각 자체가 없었는데 지금은 자꾸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쉬운 길은 없을까, 골치 아프지 않고 하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 법당 보수공사를 시작할 때도 전 원장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게 얼마나 어려운 공사인데 무식하게 시작하느냐. 적당히 살다가 가지.' 라고 했는데 이제야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알겠습니다. 삼 년간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싸워야 할 일이 많습니다. 관급 공사이기에 구청이나 문화재청이랑 실랑이해야 할 일도 많아요. 하지만 이 일은 전면으로 부딪쳐서 진검승부를 해야하는 것이죠. 내가 부서지든 그 사람들이 넘어지든 누군가는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야만이 완성이 되지 피하고 돌아간다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었을 때 결국은 제가 결정을 하죠. '우리 공사 안 한다. 너네들 철수해라.' 이렇게 해서 결국은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되든 안 되든 해봐야죠. 지금까지는 그것이 먹혀왔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이 먹으니까 변해가더라. 이것이 사람이 늙어가는 과정인지 현상인지, 아니면 바보가 되어가는 현상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노병사의 고통과 두려움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자유스럽지 않습니다. 이것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풀어야 할 과제이고 생명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의 근본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싯달타 태자는 이런 근본적 문제에 추가적으로 생각한 것이 있는데, 당시 사회의 중생들이 고통 받던 전쟁과 신분 차이로 인한 불평등의 사회적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들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네 번째 성문을 나가서 수행자를 만나는데, 수행자가 인간의 근본적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행한다는 말을 듣고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 생각하고 왕자의 지위, 명예, 부귀를 마음에서부터 모두 놓아버립니다. 싯달타 태자의 자신의 개인의 문제가 해결되면, 결국 이 문제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 문제이기에 모든 중생도 그 길을 따르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길이고 인간의 근본적 고통이 해결되는 길이며, 자기를 버려서 모든 중생을 건지는 최선의 자비행위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당신의 한 생을 희생하더라도 이 길을 찾고 말겠다 하고 떠납니다.

 그것은 싯달타 태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찾아 내 문제를 해결하면, 우리 모두의 공통적 문제이기에 모두가 그 길을 가면 근본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오늘날 출가의 참뜻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배워서 늘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평화스러운 가족을 꾸미고, 평화로운 사회를 꾸미고, 평화로운 내 삶을 찾기 위해서라도 늘 새로운 출발을 결심해야 합니다.

 싯달타 태자는 왕궁에서 호화롭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편리한 생활에 길들여져 있는데 이런 생활 습성을 하루 아침에 버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요즘 직장에서 실직되었다해서 인생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편이 실직되었으니 우리 가정은 다 끝났다 생각하고 남편을 구박하고 기를 꺽어서 가정이 파탄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조그만 것에 의해서 그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포기해야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싯달타 태자는 자기가 사는 길을 찾는 것이 모두에게 큰 자비를 베푸는 길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죠. 그래서 왕자 자리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직하고 사업 실패를 했어도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차피 빈손으로 세상에 나왔는데 다시 빈손으로 출발하면 되죠. 집에서 놀면 안됩니까? 고급차 타다가 조그만 차를 타면 안됩니까?  셋방 살다가 호화 주택으로 가기도 했고 반대로 할 수도 있는 거죠. 마음을 비우고 다시 출발해서 새로운 삶을 꾸리면 살아갈 수 있죠.

 그런데 이미 익숙해져있는 지위, 경제적 생활수준, 문화적 생활수준을 버리면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아 못 사는 줄 압니다. 이것이 업이라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마음을 비워 소멸시킬 수도 있는데 그것을 못 버립니다.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싯달타 태자의 수행이 곧 고행이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편리한 생활에서 모든 것이 고통스런 생활로 바뀌었을 때 차라리 왕궁으로 돌아가 중생들에게 보시하며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계산도 했을 겁니다. 그러면 돌아가는 것이 훨씬 계산이 맞죠.

 하지만 결국 6년간의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습성, 생각, 사람을 보는 눈, 세상을 보는 견해, 삶에서의 가치 의식 등 모든 것을 바꿉니다. 완벽하게 바뀌는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먼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바꾸는 과정이 육년 걸린 것입니다. 이 바꾸는 과정이 그만큼 힘들었기에 육년간의 고행이라는 것입니다.

 

 깨닫고 난 다음에는 체득한 내용을 중생들에게 45년 동안 수행하고 마지막으로 육신의 생명이 다 하는 순간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열반이란 이처럼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걱정, 미련, 갈등도 없고 중생을 제도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는 그 일념으로 산 것입니다. 거기에는 삼독의 불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해서 유여 열반(有餘涕槃)입니다. 무여열반(無餘涕槃)은 완전히 육신의 집착으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입니다.

 열반에 드시면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입니다.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고, 또 계율에 의지해서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 자기 양심을 믿고 의지하고 양심의 판단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자기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법에 의지하는 것은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고, 계율에 의지하라는 것은 수행에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를 스승으로 삼아서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가르침이자 마지막 유산입니다.

 일생을 통해 사신 모습으로 유여열반을 가르쳐주셨고, 무여열반 직전에 가르치신 것은 자신, 법,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있거나 없거나 마찬가지다. 내가 있더라도 이것보다 더한 가르침 없다. 이것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하면 내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양심에 따른 생활을 실현하기 위한 수행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출가의 참뜻과 열반의 가르침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번 정진 기간 동안 각자의 처지에 맞게 열심히 수행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기간만 아니라 일생 동안 수행하는 불자가 되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장훈 (조계사 보도부 법문팀)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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