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조계사 뉴스
마음은 무엇인가?
‘마음은 무엇인가?’ 오늘은 마음에 대해 조금 해석을 해보려고 합니다. 마음은 무한한 힘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주 불가사의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착하면 착한 사람이라 하고, 마음이 악하면 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축생의 마음을 가지면 축생이 되고, 미물과 곤충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덕스럽고 인자하면 덕인이라 하고, 성현의 마음이 되면 성현이고, 부처님의 마음을 가지면 부처님이 됩니다.
이 세상, 이 지구상의 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축생에서부터 저 미물 곤충에 이르기, 또 인간부터 성현, 부처님까지 이 세상에 다 존재합니다. 그런데 개개인의 세계는 다 틀립니다. 인간은 인간의 업연에서 이 세상을 보고, 또 삶을 가꿔가고 있습니다. 축생은 축생의 세계에서 삽니다. 개개인은 각자의 업연을 따라 이 세상을 삽니다. 우리보다 차원을 달리한 성현의 경계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 똑같이 생존하고 같이 좋아하고 있지만, 성현의 세계는 우리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런 세계에 계십니다. 우리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중생이 되는 미망입니다. 근본을 잊어버린 망각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능력은 무한해서 생각하면 느끼고, 축생의 마음이면 축생의 행이 이루어집니다. 행이 이뤄지면, 자연히 습관이 되고 업연이 돼 그 이상을 못 보게 됩니다. 성현의 마음을 가지면 성현의 행위를 해야 됩니다. 안하면 안 됩니다. 또 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니까 원력을 갖고 하면 자연히 그 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에 무한한 힘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어느 집에서 아들을 군대에 보냈다고 해봅시다. 그런 집의 어머니, 할머니는 밖에 나가서 군인을 보면 전부 다 아들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은 마음에 아들에 대한 간절함이 차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더러 합니다. 지금 밖에서 새가 울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새소리를 슬프게 들어, ‘참으로 새소리가 슬프게도 운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쁘게 노래를 잘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짜증스런 소리라고 합니다. 개개인의 감정에 의해 그 새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새소리를 참으로 바르게 알아듣는 것은 뭘까요? 새가 슬프거나 기쁘게 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쁜 마음, 기쁜 감정, 슬픈 감정, 자기에게 있는 모든 감정을 ‘딱’ 놔버려야 합니다. 편안하게 그 새소리에 임하면, 그 새가 기쁘게 슬프게 우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여기 참 새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제각기 다른 감정에 의해 듣습니다. 그래서 무한한 힘을 가진 마음을 우리는 잊어버리게 됐습니다. 잠깐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무시겁래로 잊어버려, 이제는 근본이 뭔지 감도 안 옵니다. 우리 중생의 삶이 이렇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의 마음에는 무한한 힘과 법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허송세월해왔습니다. 그것도 갖은 고통과 고뇌 속에서 이제까지 삶을 이어왔습니다. 때론 축생도 되고, 때로는 지옥도 가고 천당도 가고. 사실 가기는 어디를 갑니까? 다 자기 마음에 다 있는데요. 때로는 축생도 지옥도 인간세계도 만들지만, 마음이 다 이렇게 조작한 겁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 알지요? 일체가 마음으로 조작된 거라는 말입니다.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안 그렇습니다. 허망된 경계에 의지해 우리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본래 갖춰진 대능력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보통 각오가 있으면 안 됩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먹고 싶은 것 다 하면, 또 그렇게 해서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힘듭니다.
그럼 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이것을 안하면 안됩니다. 무한한 능력이 나한테 있는데 왜 그것을 버리고 고생을 합니까. 하면 됩니다. 하면 또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을 하는데, 열심히 부지런히 하면 그 일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기 싫어서 게으름을 피우고, 자꾸 일을 편하게 하려고 이리 저리 요령을 피우면 오히려 힘이 더 드는 겁니다. 우리 중생의 업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더 편하게 쉽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병입니다.
불자님들, 우리는 이러한 무한한 마음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금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항하사와 같은 부처님 세계가 있다”고. 모든 부처님 세계의 중생들은 약간의 용심(勇心)이 있습니다. 그것을 부처님은 다 안다고 했습니다.
이 마음이 부처입니다. 우리도 압니다. 불공을 오래하고 딴 데서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을 다스리면 다 됩니다. 그런데 잘 안 되는 이유는 자꾸 하나를 얻으면 둘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또 허망한 경계에 치우쳐 구하려고 합니다. 욕심때문입니다. 허망한 경계에서 얻으려는 그것이 바로 병통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마음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마음을 찾아야 됩니다. 그것이 이제 공부입니다. 공부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인연과 업연, 근기에 따라 공부법이 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참선하는 게 쉽습니다. 요즘 간화선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말은 간화선을 해야 딴 데로 안 빠지고, 바른 길을 갈 수 있고, 또 가기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주장하는 겁니다. 하기 쉽고, 뭔가 열심히 하면 빨리 성취하니까 간화선이 제일 좋다고 강조하는 겁니다.
간화선을 하기 전에 갖춰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 법(공부)은 최상승인이 아니면 감내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최상승인을 우리말로 하면 ‘대(?인)격인’입니다. 먼저 대 인격인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대 인격인이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을,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참선만 하면 된다고 하니 어려운 겁니다. 수승한 근기가 갖춰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도 안 된다고 안 하면 안 됩니다. 해야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하냐? 진실해야 합니다. 가장 진실하고 순수해야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다 안 됩니다. 그럼 가장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이 뭐냐? 그건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어떤 일에 임해서 그냥 억지로, 자기 생각으로 모든 일을 하고, 또 자기가 어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하면, 그건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이가 정한 바, 상황에 맞게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모든 이가 옳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합리적인 생각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헛된 욕심과 무리하고 과도한 생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순수해져, 번뇌 망상도 없어집니다. 우리가 쓸데없는 욕심과 비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에서 모든 것을 취해서 자기 알음알이로 알아서 하려하고, 그것이 안 되니 망상 번뇌가 일어나 다 그르치는 겁니다.
너는 나보다 못하니 내 밑에 있어야 한다며 억지를 부립니다. 그래서 삶의 균형이 깨집니다. 착한 사람이 살기 힘들어집니다. 그러니 먼저 마음이 진실하고 순수할 수 있는 우리의 실질적인 행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공부하는 자세입니다. 일체가 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순수하면 편해집니다. 그것이 제일입니다. 돈과 권력이 있고, 주변에서 칭찬한다고 해도 내 마음이 불편하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마음이 편해야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바로 볼 수 있는 직관(直觀)이 생깁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마음의 안정이 안 되면,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감정이 치성해집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면 그것이 업인이 돼,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듭니다.
이른바 대도(?道)를 공부하는 자세가 이래야 됩니다. 부처님에게 천 배 만 배 기도를 해봐도, 이런 마음이 없으면 공덕이 안 됩니다. 마음이 순수하고 진실하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어요. 만사가 다 이렇게 이뤄지는 그것이 바로 불성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을 먼저 닦으십시오.
여러분, 간화선은 화두를 들어 수행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열심히 드는 법은 무엇일까요? 인격이 이뤄지면 화두가 겉돌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편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앉아서 좌선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마음이 지극히 편하면 간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야만 공부에 진척이 있습니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된다’는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중생의 마음이 동합니다. 오만가지 생각이 툭툭 튀어 나옵니다. 마음이 순수하고 진실해 합리적이면 자기 점검이 됩니다. 감히 알지 못한 사람이 좀 알았다고 하면서 해석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사실 도(道)하고 아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는 것으로 도를 말하면 되겠습니까. 또 그런 분을 스승으로 해서 되겠습니까. 그것은 앞서 소의 비유처럼 진실한 사람으로 순수하면 모든 것을 바로 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꾸로 보입니다. 그르치는 결과가 초래됩니다.
마음공부는 첫째, 마음이 편해야 잘 됩니다. 마음이 편해야 간절한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점검하는 지혜가 열립니다. 선지식도 그렇습니다. 선지식은 형상으로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의해 공부를 한다면 거기에 맞게 선지식이 출현합니다. 그 근기에 맞도록 말입니다. 또 어떤 형상을 필요로 하면 형상이 되고, 형상이 아닌 어떤 무형으로써 마음의 공부를 원한다면 선지식이 무형으로 출현합니다.
우리가 대도를 성취하고 중생의 업을 단절하겠다는 결심이 있기 위해서는 뼈저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 각오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편하게 이것저것 하고 싶은 데로 하면 안 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수행은 ‘고행’입니다. 고행이 전제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대도를 성취하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됩니다. 그래서 갖춰야 할 것이 세 가지입니다.
먼저 대분심(?忿心)입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무한한 능력이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허망된 경계에 치우쳐 자기와 이웃을 망치는 삶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억울하고 분한 일입니다. 그런 마음이 들어야 자기를 깨우치고 자기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발심(?發心). 이것은 어디서 일어나느냐? 먼저 알아야 믿음이 생기고 그리고 간절한 발심이 생깁니다. 마음의 무한한 능력은 절대적인 신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업연에 따라 경계가 나타납니다. 죽음도 각자의 업연에 따라 다 다릅니다. 그 어떤 절대 신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허망된 생각과 잘못된 사고와 판단, 생각에 근본된 마음을 잊었다는 분한 마음을 이제 알았으니, 앞으로 그런 것을 막아야 합니다. 본래 내 힘을 회복하겠다는 마음의 발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심이 이뤄지고 자연히 해야겠다는 발심을 내게 됩니다.
또 용맹심이 있어야 합니다. 큰 용맹심을 내서 철저하게 공부에 임해야 합니다. 고행은 보통 고행이 아닙니다. 못해서 못 먹어서 생기는 그런 고행이 아닙니다. 첫째 인격이 안 되면 그것을 감내하지 못합니다.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가장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이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합리적인 사고입니다. 그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 우리 생활도 이뤄져야 합니다. 이것만 잘 실천해도 우리가 선지식을 만날 인연이 생깁니다. 왜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법한 말씀이 경전에 의해 모두 다 이뤄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부처님은 이미 법상으로 나투셨습니다. 거기에 의해서 말로써 표현된 것입니다. 말로써 부처님의 경계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진실하고 순수하면, 또 인격이 갖춰져 마음이 편안해져 부처님의 경전에 임하면, 부처님의 마음으로 감화되고 동화됩니다. 앞으로 우리 불자님들이 진실한 마음에 순수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이번 법회가 불자님들이 참으로 공부할 수 있는 큰 인연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현장에서 오간 문답
-살면서 어려움이 닥쳐오는데, 그래서 수행을 통해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화두가 잘 안 들립니다.
“가만히 앉아서 화두를 들면 그전에 생각지도 않았던 망상이 일어나고, 화두가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 화두를 처음 하는 사람이 이럴 겁니다. 선방에서 수행하는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에 장애되는 것은 번뇌와 망상이죠. 어떻게 번뇌와 망상을 없앨 수 있을지. 참 그것이 어렵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될 수 있는 대로 생각을 덜해야 됩니다. 한마디로 번뇌와 망상을 없애는 방법은 ‘처음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 한 단계 두 단계로 계속 이어지면 걷잡을 수 없게 돼. 처음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그냥 편하게 버려야 합니다. 편안한 마음에는 어떤 번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감정이 결부되면 더 복잡해져요. 생각을 덜 할 수 있는 방법, 합리적인 사고에 생각을 덜어 내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번 열심히 해봐요.”
-화두를 드는 시기는 언제가 좋을까요?
“화두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만 잘 챙기면 됩니다. 일체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화두는 의심입니다. 여러 가지 화두가 있는데, 스스로 간절해 질 수 있는 화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자 화두를, 어떤 사람은 ‘이뭣꼬’를 듭니다.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간절한 의심이 일어나는 화두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화두를 간절히 들 뿐 이 다음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음 경계를 찾지 마세요. 이것은 우리 공부하는 사람이 희망을 잃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것뿐입니다. 그 다음 것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것화 하려면, 간절히 화두를 찾아 ‘몽중일여(?中一?)’가 되어야 합니다. 똘똘 뭉쳐 그 근본이 확 드러나기 이전에는 내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들어 화두를 깨친다는 것은, 잠자다 꿈속에서 꿈을 깨는 것입니다. 꿈을 깨지도 못한 사람이 꿈을 이야기는 하는 것은 꿈 이야기 일뿐입니다. 꿈도 못 깬 사람이 꿈밖의 이야기를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수행인으로서 열심히 화두를 챙겨 그 근본이 확 드러나기 전에는 열심히 정진을 해야 합니다.”
-독경이나 염불을 할 때, 화두는 어떻게 듭니까?
“독경하면서 화두를 들면 ‘독경선’, 염불을 하면서 화두를 들면 ‘염불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다 길이 있습니다. 참선하는 길도 있고 염불하는 길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염불은 관법에 의해 부처님을 지극히 생각합니다. 요즘 불자님들이 그 길에 대해 분명치 못합니다. 화두를 간절히 들어 의정(의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염불도 간절히 부처님의 길을 생각해 부처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나와 부처님과 내 밖에 부처님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불인지 간경인지 참선인지 뭔지 잘 모르고 다 하나라고 말하면, 부처님이 왜 팔만사천 법문을 말씀하셨겠습니까. 다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끔 빨리 성취하고 편안하게 선택해서 하라는 말입니다. 다 똑 같은 길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공부도 간경을 열심히 해야 지혜가 열립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화선이 제일 공부하기 쉽고 가장 크게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 그 방법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혼자서도 나태해지지 않고, 지속적인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대용맹심이 있어야 돼. 뼈저린 각오와 분심이 있어야 돼. 철저한 자기 믿음이 있으면 나태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나의 무한한 힘을 찾는데 나태심이 생길 수가 있겠습니까. 철저한 신심이 전제돼야 가능합니다. 거기에는 무한한 마음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허망된 경계를 버리고, 대분심과 용맹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혼자서도 지속적인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열심히 마음을 챙겨야 합니다. 혼자서 공부가 잘 안 된다는 말은 수행자가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함주 스님은?
1941년 전북 순창에서 출생한 함주(含周)스님은 60년 대구 동화사에서 입산 출가해, 70년 수덕사에서 일타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고 백양사, 해인사 운문암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은사는 금오 스님으로, 법랍은 45년. 현재 전국선원수좌회 상임대표를 맡아 간화선풍 진작에 앞장서고 있다. 최근에는 ‘조계종 수행지침서’ 발간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저작권자 © 미디어조계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