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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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수행의 요체
世尊(세존) 未離兜? 已降?宮(미리도솔 이강왕궁)이요, 未出母胎 度人已畢(미출모태 도인이필)이라.
세존께서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가비라 왕국에 태어남이요, 마하부인의 모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중생을 다 제도하여 마쳤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이 도리를 아시겠습니까?
이 도리를 안다면 오늘 선 법문은 이것으로 다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이 오셨는데 그냥 내려가기가 서운하니까, 참다운 행복의 삶을 위한 선 수행의 요체’라는 주제를 가지고 초심자를 위해 군더더기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제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 불자님들은 왜 불교를 믿고 참선 수행을 하려고 합니까? 그냥 머리로 어렴풋하게 아는 것 말고 분명하게 이 문제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돼야 합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십시오.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대답을 정확하게 해야만 참선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수행을 하고 참선을 한다고 하면 이것은 유행 따라 남이 하니까, 참선을 하면 좋다고 하니까 한 번 해보는 그런 식의 참선 밖에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얼마 안가서 참선을 그만두게 됩니다. 이래 가지고는 참선하는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 사람, 불교를 제대로 믿고 참선 수행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고 죽고 이렇게 생사윤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생사윤회에 대한 문제도 충분히 정리가 돼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사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생사윤회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좋은 업을 지으면 좋은 과보를 받고 나쁜 업을 지으면 나쁜 과보를 받으며 다음 생에 태어난다는 식으로 생사윤회를 이해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첫 번째도 틀렸고 두 번째도 틀렸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바르게 공부해야 합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생사윤회 속에서 받게 되는 괴로움, 바로 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해결하고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기 위해 참선수행을 해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행복에 관해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론과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론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을 추구하느냐면 내가 원하는 조건이 충족될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 행복감은 머지않아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을 일시적인 거짓 행복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더 큰 것,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것들이 충족될 때에는 행복감을 느끼지만 안 되면 불만족 즉 괴로움을 느끼게 되므로 이런 거짓 행복감으로는 결코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수 없기 때문에 깨달음을 통해서 열리는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기 위해서 참선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이 확립되어야 올바른 수행, 즉 참선 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다 이 말입니다.
참선 수행에 있어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심입니다. 이 신심에 대해서는 화엄경이나 다른 경전에서도 찬탄이 많이 나와 있어요.
"신심은 도의 근원이고 모든 공덕의 어머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온갖 착한 법을 길이 기르며, 의심을 끊고 애착에서 벗어나 열반의 무상도(無上道)를 드러낸다." (화엄경)
그러니까 신심이 없으면 무상도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성불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무리 성능 좋은 컴퓨터가 있더라도 전원에 콘센트가 꼽혀 있지 않다면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 작동이 안돼요. 이와 같이 신심은 마치 전원에 콘센트가 꼽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심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신심은 무엇을 말하느냐. 여러 가지로 신심을 말할 수 있겠지만 핵심은 우리의 참 마음자리, 이것이 본래부터 부처님하고 똑같은 것이다 이런 얘깁니다. 정확히, 아주 정확히 한점 오차 없이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부처님이다 그런 말입니다.
이 소식을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맨 처음에 "아! 기특하고도 기특하구나. 일체중생이 여래지혜 덕상을 다 갖추고 있구나. 그런데 분별망상으로 인하여 증득치 못 함이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인간선언입니다. 사실 생명선언이에요. 이 말은 모든 중생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그런데 분별망상으로 인해서 부처의 삶을 살지 못한다. 깨달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본질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 양면을 말씀하셨어요. 아무리 중생이 번뇌 망상 때문에 이렇게 중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적으로는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 입니다. 정리해서 말한다면 신심 이것은 바로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다' 이렇게 믿고 이해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말하자면 우리는 연기적 진리생명이다. 진리생명인데 이것이 연기작용을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부처라니까 부처님이 실체가 있는 그런 부처님이 아니고 텅빈 진공의 마음, 이것이 우리의 참마음이요. 참마음이 참 부처님이다 이 뜻입니다. 우주의 실상이 진공심으로 되어 있는데 텅 빈 이 진공심이 인연 따라 조건 따라 어떤 현상을 전개하면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묘용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참마음의 내용은 지금 말한 이런 정도로 다 말할 수 없어요. 부처님께서 이 내용을 다 계속해서 말씀 한다고 하더라도 이 내용을 다 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에요. 그런데 하여튼 핵심만 뽑아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린다면 우리의 참마음은 이와 같습니다. 이것을 믿으셔야 됩니다. 아시겠어요? 이게 신심입니다.
두 번째 발심입니다. 이 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본래모습이 위에서 말한 심신의 내용대로 본래 부처인데 다시 말하면 나의 참모습이 부처인데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겠느냐. 때로는 행복한 것 같지마는 조그만한 것에 매달려 가지고 울고불고 하면서 어설프게 힘들게 고달프게 살아서 되겠느냐. 내가 부처님 진리생명인데 이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이런 자각 위에서 나도 나의 본래 모습을 회복해가지고 참다운 행복을 누리며 살자. 지혜와 자비심을 가지고 그렇게 살자.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발심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아까 신심에 대한 정리가 되어 신심이 크고 투철할 때 이 두 번째 발심이 되는 것 이지, 신심이 확립이 안 되어있는데 발심이 되겠습니까? 신심이 없는 사람은 발심도 안 됩니다. 신심이 크면 발심을 크게 할 수가 있어요. 발심이 크게 되어야만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중요한 수심(修心), 마음 닦음 입니다. 바른 수행을 위해서는 지금부터 말하는 내용이 갖추어져야 됩니다. 마음 닦음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첫째는 바르게 수행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마조도일선사가 계셨는데 선지식 80여명을 배출할 정도로 대선지식이었습니다. 그분의 스승은 남악회향선사로 아주 유명한 선사인데, 그 밑에서 마조도일선사가 공부할 때 얘기입니다.
어느 날 마조도일선사가 좌선을 하고 있을 때 스승인 남악회양선사가 마조스님 앞에서 기왓장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상해서 “스님 기왓장을 왜 갈고 계십니까” 하니까 “음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그러네”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조도일선사가 “아니 스님, 기왓장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라고 묻자 “좌선을 한다고 부처가 되나” 하신 겁니다. 그 말에 마조도일선사가 알아차렸습니다. “기왓장을 간다고 부처가 되나” 이 말에 확 깨쳤습니다.
어떻게 보면 좌선을 하지 말라는 말 같이 들리는데 그런 애기가 아닙니다. 부처와 중생을 이원적으로 보고 '나는 지금 중생인데 좌선을 해가지고 부처가 된다' 이런 생각으로 좌선을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나는 중생이 아니라 본래 부처라는 이 반야(지혜)의 안목을 갖추고 지혜와 선정이 등지(等持) 된 수행이 올바른 수행이에요. 이에 대해서 육조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정(定)과 혜(慧)로서 근본을 삼나니 먼저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가 한 몸이요 둘이 아니니 정은 혜의 체요 혜는 정의 작용이다. 정과 혜는 등불과 같아서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나니… 이 정과 혜 또한 이와 같으니라"
화두를 잘 든다는 말은 성성(??․지혜의 측면) 적적한(寂寂․선정의 측면) 가운데 화두의심이 간절하게 뭉쳐 있어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화두 의심은 큰불덩어리 같아서 큰불덩어리에 나비나 벌(망상)이 접근 할 수 없는 것처럼 간절히 화두 의심하는 가운데 망상은 저절로 쉬어지게 되어있는 가장 힘 있는 수행법이 간화선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큰 신심, 큰 발심(분심), 큰 의심(화두의심)을 위해서는 일상의 삶이 무아, 공, 연기의 이치를 잘 알아 자기(에고)를 비우고 자비심과 소욕지족으로 용심(用心)을 잘하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평소의 삶이 탐욕스럽고 집착하고 원망과 분노 등으로 얼룩져, 아무렇게나 살면서 화두만 들면 된다는 식으로 하면 수행이 안돼요.
정리하자면 '단리망연(但離?緣)하면 즉여여불(卽??佛)'이라. 망상만 놓아버리면 본래부처라.
망상을 따로 버리려고 하지 말고 화두만 챙기면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그런 수행의 원리대로 하여 화두만 간절하게 의심하면 됩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없으면 하루 1시간씩이라도 간절하게 하면, 그리고 시간을 늘려서 간절히 하다보면 나중에는 빨래하면서 밥 먹으면서 다 됩니다. 그러면 화두를 착 드는 순간에 망상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참 마음의, 진리 생명의 힘으로 사니까 나날이 좋은 날이 됩니다.
순간순간 매 순간 마다 간절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꾸준히 아주 꾸준히 해야 합니다. 처음엔 어렵지만 하다보면 쉬워집니다. 꾸준히 하다보면 쉬워집니다. 공부에 힘을 얻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경안해지고 참선하는 힘으로 모든 것이 다 잘됩니다. 아주 굳건한 신심을 가지고 공부하다 죽으면 죽지 하는 용맹심으로 바르게 간절하게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묻고 답하기
▲질문 :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는다고 합니다. 크게 의심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또 깨달음에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깨친다는 것은 미세 망념까지 완전히 공해져 버린 상태를 말 합니다 이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합니다. 그 구경각이 되기 전에 변화가 오는 데 이것을 작은 깨달음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크게 의심하면 의심이 강하게 뭉쳐 번뇌 망상이 작용을 못하고 의심의 극점에서 마침내 폭발하는데 이때 확철대오 하게 됩니다 이것을 큰 깨침, 구경각, 돈오라고도 합니다. 의심이 작으면 한 소식하는 정도로 끝납니다. 이것을 작은 깨달음 이라고 하는데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닙니다. 구경각 즉 돈오만이 바른 깨침입니다. 크게 의심하는 방법은 제가 말한 법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질문 : 불교를 접하면서 일체유심조라는 얘기를 듣고 그 얘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도 화두입니까.
-그것은 화두가 아닙니다. 화두는 우리가 모르니까 간절하게 알고 싶어 의심하는 공안으로서 사량 분별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유심조는 우리가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하나의 원리로서 이해해야 할 명제이지, 화두는 아닙니다.
*지환 스님
서울 고등학교 1학년 때 룸비니 불교학생회에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고 대학생 불교 연합회 구도부 시절 성철큰스님을 만나 선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1967년 해인사에서 출가, 1969년 광덕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뒤 해인사선원 성철큰스님 회상과 백양사 운문암 서옹큰스님 회상에서 오래 정진하다가 제방선원에서 참선 정진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지리산 금당선원장을 맡았으며, 2002년부터 현재까지 조계종 기본선원장 겸 동화사 선원장을 맡고 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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