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중흥조 경허 대선사 열반 100주년 추모 다례
▲ 한국불교 중흥조 경허 대선사 열반 100주년 추모 다례
몇 달이고 옷도 바꾸어 입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으므로 옷 속에는 말 그대로 이 떼가 득시글거렸다. 얼마나 많은 이 떼가 득시글거렸는지 경허 스님의 온몸은 이 떼에게 뜯겨 짓무를 지경이었다. 사미승이 보다 못해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라고 간청했지만, 스님은 계속 거절할 뿐이었다.
몇 달이 지나 입고 있던 옷이 더러워지고, 이 떼로 범벅이 되어버려 마지못해 경허 스님은 새 옷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그런데 경허 스님은 그 많은 이들을 새 옷에 다 옮긴 후에야 갈아입었다. 경허 스님의 불살생 실천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일화이다.
“경허 선사가 살아있다면 그의 제자가 되고 싶다.” 세계적 종교학자인 로버트 서먼 콜롬비아대 교수가 한 말이다.
열반에든지 100년이 지났건만 왜 경허 스님은 국내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것일까?
6월 14일 오후 2시,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서는 경허 스님 열반100주년 추모 다례가 거행되었다. 수천의 사부대중이 모인 가운데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지현스님의 사회로 식이 시작됐다.
▲ 추모 다례에 참석한 스님들이 대웅전 앞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다.
식은 삼귀의 노래로 시작돼, 한글반야심경 봉독,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월탄 대종사의 행장 소개로 이어졌다. 행장 소개에서 월탄 스님은 경허 스님 용맹정진과 행적과 업적 등에 대해 소개하였다. “선사께서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한국불교의 법맥과 선맥을 우리의 마음속에 심었다. 지금도 우리 곁에는 선사의 법향과 선향이 그대로 머물고 있다.” 왜 경허 스님이 열반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러름을 받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행장소개를 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월탄 대종사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추도사에서 다시 이점을 강조하였다. “불교 전래 1700여 년에 조선 후기에 마치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고 불가의 수향가풍이 명맥마저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맥을 다시 잇고 선풍을 크게 진작시키신 분이다.”
자승 스님의 추도사는 계속 이어졌다.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닌 진속불이의 경지를 보여주셨으며, 참된 무애행을 하셨다.”
진제 법원 대종사의 법어(밀운 스님 대독)가 이어졌으며, 법어에서 진제 스님은 “시회대중이시여, 경허 대선사의 진면목을 아시겠는가? 사오백이나 되는 즐비한 화류항이요. 이삼천 곳에 피리 불고 거문고 타는 누각이더라.”라며 경허 스님의 한국불교에 대한 중흥의 업적을 추도, 치하하였다.
뒤이은 헌화를 마지막으로 다례는 끝났지만 모인 사부대중은 움직일 줄 몰랐다. 경허 스님에 대한 존경의 염이리라.
경허 스님은 1846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동욱, 법명은 성우, 법호는 경허이다. 9살 어린 나이에 경기도 의왕시 청계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1868년 동학사 강사로 추대되어 1879년까지 강의하였다. 1880년에는 ‘코에 구멍이 없는 소’라는 말에 크게 깨달음을 얻어 유명한 오도송을 남겼다.
1882년부터 1898년까지 경허 스님은 동학사, 부석사, 마곡사, 장곡사 등지에서 선풍을 진작하였다. 일생 동안 명분과 사상의 틀에 안주하기를 거부했고, 선의 생활화, 일상화를 모색했다.
경허 스님은 말년에 평안북도와 함경남도로 자취를 감춘 뒤 머리를 기르고 서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다가 1912년 함경남도 갑산에서 입적하였다.
경허 스님의 문하에서 배출된 스님들은 한국 불교 정화 운동을 주도하며 조선 불교의 봉건적 잔재를 떨쳐내고 현대 한국 불교를 새롭게 써내려갔으니, 경허 스님이 한국불교의 중흥조라 추대되는 것은 당연하다.
경허 스님의 오도송과 열반송을 음미해 보자.
홀연히 고삐 뚫을 사람이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사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오도송>
외로이 홀로 밝은 마음의 달
온 누리의 빛을 머금었구나
그 달빛은 온 누리와 함께 사라
<열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