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담(性潭) 이영상 자율선원 부선원장(새벽기도회 고문)
염불과 화두가 하나인 도리두 목숨을 건 백일기도법대를 나와 군 복무까지 갓 마친 청년 이영상에게 세상은 푸르렀다. 유복한 가정환경도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란 그에게 거침없는 도약을 꿈꿀 수 있는 날개였다. 물 흐르듯 삶이 유유하고 넉넉하게 그리 펼쳐질 줄 여겼다.그러던 중, 여섯 남매의 막내인 여동생이 쓰러졌다. 결핵성복막염이었다. 열한 살, 여리디여린 막내딸이 수술대에 올라도 두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에 어머니가 기함하셨다.“얘야, 막내가 잘못되면 나도 살 수 없을 것 같다.”청천벽력이었다. 어머니의 부재라니…. 여동생에다 어머니까지 잘못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세상이 곤두박질쳤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매달릴 건 종교밖에 없었다. 당시 소요산 자재암 주지였던 추담 스님을 찾아갔다.“기도해라. 기도하는 동안은 절대 죽지 않는다. 목숨 내놓고 해라.”불교의 전혀 모르던 청년 이영상의 백일기도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벽 4시부터 아침 11시까지 꼬박 7시간씩, 조계사 대웅전 부처님께 혼신을 다해 매달렸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목숨을 비는, 자기 목숨을 내놓은 절체절명의 백 일이 조계사 법당에서 흘렀다.온갖 마장을 겪으며 백일기도를 회향한 날, 여동생이 꿈을 꿨다. 천지가 흔들리면서 금빛 광명과 함께 조계사 부처님이 법당 지붕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르더란다. 그러고는 놀라 도망치는 여동생 앞에 “애야, 신발은 신고 가야지” 하시며 가지런히 신발을 놔주셨다는 것이다.그러나 기도가 끝난 지 4~5일이 지나도 병세에 차도가 없었다. 상심한 채 군 복무를 했던 용산 미군부대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그이 앞에 미군 중령이 차를 세웠다. 공항에서 곧장 오는 길이라는 그는 미8군 병원이 어디냐고 물었다. 새로 부임하는 미8군 병원장이었다.짚차에 올라타서 자신도 모르게 여동생 이야기를 꺼냈다. 와이드헤드란 이름의 병원장은 숙소에 짐만 풀고는 곧바로 앰뷸런스로 여동생을 태워다가 수술해주었고, 환자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부처님의 가피였다.“그놈이 화두를 들더냐!”, 성철 스님의 호통백일기도의 체험은 이영상(73, 새벽기도회 고문, 자율선원 부선원장) 고문의 삶을 바꿨다. 기도 중에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겪었다. 잠시 기도하는 마음을 놓치면 가차 없이 마장이 덮쳤다.기도에 어찌나 몰입했던지, 무릎에 박힌 작은 돌이 절할 때마다 살을 파고들어도 통증을 못 느껴 결국 수술 칼을 대야 했다. 기도에 푹 빠져서 종종 불단이 아닌 엉뚱한 곳에다 기도한 적도 있다. 목숨을 걸고 하다 보니 “무슨 기도를 그리 서럽게 하느냐”라고 묻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백일기도를 마치고 나서 원력을 세웠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다)’의 삶을 살리라. 밥 먹고 사는 일(법학과 교수)은 오후에만 하고 오전에는 수행에 몰두하기로 맘먹었다. 세상일에 흥미가 줄어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에 기도만 자리했다.“관세음보살” 소리가 몸 안에서 저절로 터져나오고, 잠시만 앉아 있어도 관음삼매에 들었다. 삼매 중에 조계사 부처님이 찾아와 “기도의 끈을 놓지 말고 계속 정진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빛으로 사라졌다. 그런 체험을 통해 조계사 부처님의 존재를 확신하는 그는 46년째 조계사 법당을 떠나지 않고 있다.관음삼매에 든 자신의 육체를 허공에서 내려다보거나, 혼이 몸을 떠나서 가고 싶은 곳을 찾아다니기도 하면서, 이른바 유체이탈이란 것을 체험했다. 객원교수로 미국 버어지니아대학 부설 연기법연구센터에서 1년간 윤회와 명상 분야를 공부했다. 하지만 그게 도의 핵심이 아님을 깨닫고 귀국해서 금강경 공부에 몰두했다.금강경에 의구심이 생겨 경봉 선사를 찾아뵙고 구산 스님을 친견했다. 법학 교수라는 직함이 깊은 산중에서도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경봉 스님과 구산 스님은 “허망한 꿈을 꾸었구나. 과정이니 집착하지 말고 정진해라.” 하며 친절히 격려해주셨다.나름의 아만심이 하늘을 찌르던 이 고문을 오금저리도록 혼내준 건 백련암 성철 스님이었다. 날짜(1979년 9월 17일)까지 또렷할 만큼 성철 스님과의 만남은 수행의 대전환이며 충격이었다.“처음 뵈었을 때 저절로 합장이 되더니, ‘호리에(조금도) 거짓말 보태지 말고 바른 말 대라!’시는 호통에 합장한 손이 안 떨어질 만큼 넋이 나가더군요. 잘못된 걸 여쭈면 인정사정없이 불자(拂子)로 후려치시는데, 금강경 질문하다 두들겨 맞고 된통 혼나곤 했지요.”그렇게 3~4일간 백련암에 묵으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특히 유체이탈에 쏠쏠 재미가 나던 참에 들은 “그놈이 화두를 들더냐!”라는 벽력같은 경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스님은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면 다시 오라며, 화두와 함께 ‘성담’이란 법명을 주셨다.▲ 조계사 앞마당의 천진불을 닮았다 해서 '웃고 다니는 돌부처'란 별명을 얻은 이영상 고문평생 금강경 읽은 어머니의 공덕이 고문의 아버지는 신심 돈독한 도교 신자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쇠퇴하던 도교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관우(關羽) 숭배가 전래되면서 민간에서 다시 성행하고 있었다. 명문가 출신에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던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도 자신처럼 도교의 법을 따르기를 강하게 원했다.하지만 이미 불법의 깊이를 맛본 터라 이 고문은 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고 어머니 또한 금강경 독경을 일과로 삼았다. 그 영향으로 셋째 여동생이 혜춘 스님께 출가하는 등, 온 가족이 불자가 되었다.3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평생 금강경을 품고 사셨다.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이 고문은 금강경의 공덕을 확신하며 만나는 이들에게 금강경 공부를 권한다.“석종사 혜국 큰스님의 사십구재 법문 때도 놀랐지만 백일재 땐 더 깜짝 놀랐지요. 해인사에서 백일재를 지냈는데, 전혀 생각지 못했던 종정 스님께서 무상법문을 해주셨어요. 아주 우연히…. 어머니가 평생 금강경을 독송한 공덕이란 생각이 들어요.”조계사 앞마당의 천진불을 닮았다 해서 ‘웃고 다니는 돌부처’란 별명을 얻은 이영상 고문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앞에서는 잠시 얼굴빛이 흐려진다.사홍서원 본체 삼고, 남을 위한 ‘큰 기도’를 해야올 4월부터 조계사 자율선원 부선원장을 맡은 이 고문은 ‘이뭣고’ 화두를 잡고 산다.밤 12시에 불교TV의 금강경 독경시간에 맞춰 금강경을 봉독하고 잠자리에 들면 새벽 3시에 일어난다. 잠자는 2~3시간 외에는 금강경 독경, 관음기도, 108배 그리고 자율선원에서 참선으로 하루를 보낸다. 금강경은 어쩌다 빼먹으면 꿈에서라도 읽는다.이렇게 하루 8시간 수행하는 그를 오전에 조계사에서 만나지 않기는 쉽지 않다.“참선과 염불, 다 중요해요. 염불 삼매와 화두 삼매가 하나인데, 참선한다고 염불이나 기도를 안 하면 절대 안 됩니다. 108배는 기본 중의 기본이고.”기도를 하되, 자비광명으로 온 세상을 비추겠다는 ‘큰 기도’를 하라는 게 이 고문의 당부다. ‘발사홍서원(發四弘誓願)’ 즉 사홍서원을 본체로 삼아서 나 아닌, 남을 위한 기도를 해야 진정한 불자라는 것이다. 남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베푸는 것을 생활화하면 내 기도는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내가 잘사는 것은 남의 은혜를 입고 남의 것을 더 많이 가진 것이지요. 그러니 남을 돕는 건 본래 그 사람 것, 내가 대신 가졌던 것을 돌려주는 겁니다. 상(相) 없이 베푸는 게 진정한 베풂이죠.”그 바탕에는 “삼천대천세계가 다 복밭이니 이곳에 씨앗 한 알 뿌리면 큰 복을 거둘 것이다.”라는 부처님 말씀이 자리잡고 있다.불법승 삼보를 믿고 또한 자신을 믿고, 나아가 불보살의 성불을 믿어 불보살을 따라 정진하면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이 고문의 믿음이다. 죽은 뒤의 세계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를 이야기하는 게 불교이고, 내가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게 불교의 핵심이라는 이영상 고문.새벽 3시, ‘무념으로 종지를 삼고, 무상으로 본체를 삼고, 무주로 근본을 삼는다(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는 경전 구절의 뜻을 다지며 이 고문의 하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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