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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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까지 함께 하는 친구가 있습니까?
반갑습니다. 어제가 입동이었는데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십시오.
어제는 동안거(冬安居) 입재일 이었습니다. 많은 재가 불자들도 수행과 기도 등 여러가지 형태로 안거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제는 동안거 백일 기도를 조계사에서 시작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에 따라서 그 형식이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어떤 내용이던지 한겨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며 실천하고 자신의 의지를 현실에 실천하는 의미에서 백일동안 원을 세우고 기도에 들어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방에 들어가서 백일동안 참선수행을 하는 분도 계십니다. 요즘은 재가 불자들의 선방이 많이 생겨서 각 산중 선원에서 안거에 들기도 하고, 혹은 시중 선방에서 안거 제도를 도입해 그곳에서 안거에 들기도 합니다. 그런 시중 선원에 들어가 백일 동안 참선수행 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한 사찰에 나와서 백일 기도 동참하는 분, 집에서 나름대로 계획 잡고 열심히 기도하는 분, 염불수행을 하는 분도 계시고, 경을 공부하는 간경수행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자기가 처한 시간적, 공간적 조건에 따라 절에서 혹은 시내 선방이나 가정에서 기타 여러 장소에서 조건에 맞게 기도, 수행하고 계십니다.
오늘 법회 참석하시는 조계사 불자께서도 어제부터 백일 정진에 들어갔습니다. 각자 자기의 조건에 따라 발원을 하고 기도하거나 자기에 맞는 수행법으로 안거 정진을 열심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법회보에는 경전 문구를 하나 소개해 놓았습니다. "죽음까지 함께 하는 친구". 이런 제목입니다. 사실 이것은 불경이 아니라 탈무드라는 유대교 경전에 나온 내용입니다. 그것을 여기에 실은 이유는 불교 경전에도 인물만 다를 뿐이지 똑같은 이야기다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세 명의 친구가 등장하지만 불경에는 부인이 세 명 등장합니다. 인물만 다르지 형식과 전하고자 하는 뜻은 경전과 같기에 차별 없이 탈무드 내용을 게재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에 왕이 사자를 보내어 어떤 남자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그 남자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중 첫 번째 친구는 아주 친한 친구이고, 두 번째는 첫째 보다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친구이고, 세 번째는 친구이기는 하지만 그리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친구였습니다. 남자는 왕에게 불려가면 무엇인가 문책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겁이 나서 세 친구에게 동행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냉담하게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왕궁의 대문 앞까지만 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단치 않게 생각한 세 번째 친구는 '자네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 왕 앞에까지 같이 가주겠다'고 했습니다.
불경에도 이런 이야기 나오는데, 한 남자가 세 여자를 데리고 삽니다. 그 중에 제일 좋아하는 부인은 셋째 부인입니다. 첫째 부인을 좋아한다면 둘째 셋째는 얻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셋째 부인에게 "혼자 죽음을 맞이하기는 너무 두렵고 외로워 고통스럽다. 그러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당신과 죽음의 세계에 함께 가고 싶다." 고 죽음의 세계까지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셋째 부인은 '당신은 늙어 죽어야 하지만 왜 젊은 나를 데리고 가려느냐.' 며 '빨리 죽어라. 그리고 재산을 모두 나에게 넘겨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부탁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실망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에게 같은 부탁을 하니, '당신과 나는 오백생의 인연이 있어야 하는 소중한 부부지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죽음의 세계까지 따라갈 수는 없고 다만 화장터까지는 가주겠다' 고 말합니다. 셋째는 아예 따라갈 생각도 안하고 재산이나 넘기라고 하는데 둘째는 그래도 매장하는 장소까지는 따라가겠다고 하지요. 그것만도 고맙지요.
그러나 이 남편이 죽음의 세계까지 같이 가 달라는 것은 두렵고 외로운 고통을 함께 해달라는 것인데 화장터까지만 가준다고 하니 역시 실망을 하고 마지막으로 첫째 조강지처에게 가서 이야기합니다.
평소에 소홀히 한 조강지처에게 오히려 욕을 먹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강지처는 아무 원망 않고 '부부는 일심동체이다. 이 관계는 죽음도 그것을 떼어놓을 수 없다. 나는 당신을 따라가겠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이 남편은 조강지처와 함께 죽음의 세계로 여행을 갑니다. 그렇게 조강지처가 외로움, 고통, 두려움을 함께 하며 없애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경전의 내용들을 보면, 세 번째 부인은 재산의 비유입니다. 둘째는 친척이고, 첫째 조강지처는 선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을 때 재산가지고 갑니까? 못 가져갑니다. 아무리 많이 벌어도 죽을 때는 다 놓고 갑니다. 그래서 세 번째 부인은 냉정히 거절하는 것입니다. 재산이 외로움, 고통, 두려움을 벗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친척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죽음의 세계는 같이 가지 않습니다. 다만 상여를 매고 화장터까지는 같이 가지요. 그런데 요즘은 거기까지도 안 가려합니다.
제가 칠십 년대 초부터 구십 년대 초까지 상가집에서 독경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당시 병원 영안실은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때에 영가들에게 왕생극락을 빌면서 독경 봉독을 한 공덕으로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달리 지은 복은 기억 안 나고 복을 지었다면 돌아가신 분들 위해 독경한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때 돌아다니면서 경험했던 것들 중 제일 안타까웠던 일은 재산이 많이 부모가 돌아가시면 장례도 치르기 전에 싸우는 모습입니다. 재산을 잘 써야지 잘못하면 정말 자신도 악업을 짓고 주위 사람들도 악업을 짓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종교적 문제로 장례 형식을 놓고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불교를 믿는 불자들은 양보를 많이 하는데 특히 개신교 믿는 사람들은 절대 양보가 없고 합의가 안되면 퇴장해서 장례에 참석을 안 해버립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종교를 왜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본인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되기 위해 종교를 믿는 것인지, 자기 주장만 내세워 끝가지 우기기 위해서 종교를 믿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학문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인데 미국에서 왔으니 빨리 가야한다든지 중요한 회의가 있다는 이유로 부모의 장례식에 참석 않고 그곳에 가는 것입니다. 자기 편의에 조금도 침해받지 않으려 합니다. 부모는 세상에 나를 낳고 길러주고 죽는 순간까지도 자식을 위해 걱정하는데 자식은 자신의 편의에 조금도 침해를 받지 않기 위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의 사고나 의식이 이렇다는 겁니다. 가족도 화장터까지 따라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세상이에요. 이 둘째 친구가 궁 대문까지만 가겠다는 것의 비유이지요.
불경에 나온 첫째 조강지처가 죽음의 세계가지 따라가 주겠다는 것은 선행입니다. 그렇게 죽음까지 함께 하는 친구는 무엇이냐 하면 재산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고 바로 선행인 것입니다. 선행이 바로 우리의 죽음의 세계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선행이 죽음의 세계까지 따라가서 하는 역할은 두려움, 고통,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악업을 하면 지옥에 가고 선행을 하면 극락세계에 간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선업을 지으면 죽음의 세계에 가서 그 공덕이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이죠.
깨닫지 못하고 해탈 못한 사람은 죽어서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육도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육도는 부자유스러운 세계입니다. 해탈과 깨달음은 육도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지혜로 세상을 자기 의지대로 살아가는 능력을 갖춘 것을 말합니다.
깨달아서 해탈하지 못한 사람은 가는 곳이 염라국입니다. 그곳에는 여섯 개의 육도의 문이 있습니다. 그 중에 어느 세계에 태어날 것인가를 결정짓는 근본 요인은 선업과 악업입니다. 선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육도 중에서 상품의 세계인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고, 악업을 지은 사람은 하품의 세계인 아수라, 지옥, 축생, 아귀에서 태어납니다.
선업은 육도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염라국에 가서도 인간과 천상에 나게 하는 힘으로의 작용을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가까이 해야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친구로는 세 번째 친구이고 부인으로는 첫째 조강지처입니다. 그리고 그 뜻하는 바는 선업입니다. 우리는 선업을 짓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경전에 많은 가르침을 제시해 놓았기에 너무나 잘 아는데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잘 못합니다. 그렇기에 제시되는 것이 바로 하안거, 동안거입니다. 일년에 두 번씩 기간을 정해놓고 정진, 기도하라는 제도입니다.
이때에 우리 재가불자들이 지켜야할 계가 있습니다. 팔관재계(八關齋戒)라 해서 여덟 가지 계의 덕목이 있습니다.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음주(不飮酒), 불사음(不邪添), 불망어(不?語)의 다섯 가지에 세 가지를 추가시키는데, '넓고 높고 평상을 앉지 말라'. '향화가무를 즐기지 마라'. 그리고 '때 아닌 때 먹지 말라'.
이것은 부처님께서 하루 한끼씩 드셨기에 일반 출가 수행자들은 하루에 한끼 먹되 한끼 이외에 때가 아닌 때는 먹지 말라.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재물욕, 색욕, 식욕, 수면욕, 명예욕의 오욕 중에 식욕이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식욕을 조절하면 다른 욕심을 조절할 수 있는 기본 능력이 생기고 정신이 맑아지고 병이 안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을 통제 못하고 때도 거르고 아무 때나 먹고 폭식하면 생활의 규칙이 무너지고 당뇨병, 고혈압에 걸립니다. 여자들은 아침 거르면 골다공증 걸립니다.
요즘 제가 병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왜 병이 드는지, 특히 불자들에 있어 병이 들지 않는 마음의 자세나, 수행, 기도의 자세, 이런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먹는 것, 제 시간에 적당량을 먹으면 건강을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때 아닌 때 먹지 말라. 욕심을 통제하라. 식욕을 통제함으로써 욕심을 통제하라. 그래서 정신을 맑게 수행하고 기도하라. 그래서 지혜롭게 살아라.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향화가무를 즐기지 말라 했습니다. 악세사리로 몸을 치장하고 가무를 즐기며 호화스럽고 퇴폐적인 소비적인 생활을 하지 말라. 이것을 하면 인생 망칩니다.
호화가 극치가 되면 퇴폐로 되고, 퇴폐가 넘치다보면 망조가 됩니다. 요즘 스와핑이라는 것도 나타났지요. 여기서 끝나야 하는데 그것이 더 가게 되면 정말 사람을 망치는 것입니다.
넓고 높은 평상에 앉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같은 높이에서 가까이 앉아 평등하게 해야 하는데, 혼자 높은 데 앉아서 권위적 생각을 하면 아만과 상대방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고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함께 교감하며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팔관재계입니다. 오계에 세 가지를 추가시킨 것입니다.
동안거의 백일기도 기간에 재가불자들은 이 팔관재계를 기본적으로 지키면서 발원과 기도, 수행도 하고, 다른 일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합니다. 이렇게 백일 기도 기간을 정해 놓고 살라는 것은 선행을 쌓는 것이고 내 마음속에 가득 쌓였던 죄와 업장을 소멸시키는 것이고, 그래서 죽음의 세계까지 같이 갈 수 있는 친구를 많이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 읽어보셨죠. 어떤 소년과 나무와의 이야기입니다.
나무는 소년이 어릴 때부터 필요한 것을 줍니다. 처음에는 그네가 되어주고 그늘이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고, 나중에는 과일도 따먹게 하고 소년이 성장해서는 집을 지을 수 있는 목재를 주기도 합니다.
소년은 도회로 나가 성공을 했고, 세월이 지나 할아버지가 되어 외로움을 느끼고는 예전의 그 언덕에 가면 어린 시절부터 자기와 함께 해준 나무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곳으로 가봅니다. 하지만 나무는 이미 다 잘려졌고 그루터기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 나무는 "이제 나는 너에게 줄 것이 없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나는 너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인생을 오래 살아서 피곤하다" 고 하며 그루터기에 앉습니다. 나무는 비록 몸통은 다 잘리고 그루터기만 있지만 할아버지에게 앉아서 쉴 수 있게 해줍니다.
아마 이 나무가 살아있다면 선행을 쌓아 보살이 됐거나 해탈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책을 읽으면서 이기적이고 욕심에 젖어있는 우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양보하지 않고 여유와 틈새도 없는 그런 자세로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각박합니까. 이렇게 살면 결국 모든 사람이 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죽기 이전에 지옥에 가서 받아야 할 고통을 미리 받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몸통에 가시가 붙어 있고기라고 있는데 이 물고기는 알을 보호하기 위해 돌 틈에 알을 낳습니다. 그런데 외부의 적이 쳐들어와서 새끼를 잡아먹으려하면 새끼를 돌 틈 속에 집어놓고 자신의 몸으로 입구를 막습니다.
가시고기는 고슴도치처럼 몸에 가시가 있어 돌 틈 사이에 들어가면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것을 스스로도 잘 알면서도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돌틈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거기에서 죽습니다.
모든 사람의 부모, 모든 생명의 부모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선업을 위해 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까 그 나무처럼 자식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다 줍니다. 생명까지도 주는 이것이 보살입니다. 여기에는 공덕이나 선행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지옥이나 고통으로부터 초월하는 그런 자비와 사랑의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의 절대적 외로움, 두려움, 괴로움에 처했을 때 옆에서 지키고 도와줄 무엇을 만들어야 합니다. 친구를 만들던지 지기 힘을 구축하던지, 이럴 때 도움을 줄 수 잇는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뭔가는 바로 선행입니다. 선행을 쌓아야합니다.
그래야만 죽음의 세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친구가 생겨 외롭고 고통스럽고 두렵지 않습니다. 이번 겨울 동안거 기간을 통해서 그런 친구를 꼭 만들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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