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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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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행사

죽음에서 얻는 깨달음

  • 입력 2003.12.14
  • 수정 2025.01.15

 다시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엊저녁에 종정 스님을 역임하셨던 백양사 방장 큰스님께서 또 열반에 드셨습니다. 요즘 우리 종단의 어른 스님들이 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한 분 두 분 가시는 것을 보니 허전한 느낌이 듭니다. 여러분도 그렇죠.

 이것이 우리 불교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 우리 후학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가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하시면서 적절하고 정확한 비유를 많이 이용했습니다. 고행, 무상, 공의 의미와 중생들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깨닫게 할까? 지혜가 있는 사람은 설명하기 전에 이미 압니다만 일반인은 직접 설명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1983년도 해인사에 있을 때 성철 큰스님께서 백련암으로 호출하시어 올라가보니 밑도 끝도 없이 "니 해라. 니 잘 한 대매. 안 좋나?"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어야지요.

 성철스님은 저 정도면 알아먹어야지 하고 욕심을 냈었을 것입니다.  

 "널이고 안좋나? 백고자 하면 널이고 안 좋나?" 

 여기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만약 이 말에서도 못 알아먹었다면 '저 맹한 놈, 가봐라'. 그랬을 것입니다.

 '니 해라' 는 말은 니가 해인사 총무를 해라.  '널이고 안좋나'. 지금 선방으로 쓰고 있는 곳을 문화관광부에서 인수를 맡아서 고쳐 백여명의 대중이 정진하면 넓고 좋지 않느냐. 그것을 니가 잘 할 수 있다고 하니 니가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을 구질하게 설명하면 선가의 가풍과는 안 맞습니다. '니 해라'  그말이면 알아야합니다.

 

 부처님은 직접적 해설보다 더 용이한 비유의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 나오는 '안수정등(岸樹井藤)'의 비유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사람이 광야에 나갔다가 미친 코끼리 한 마리를 만나 도망가다가 우물에 뻗은 등나무 줄기를 붙잡고 간신히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 속에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낼름거리고 바닥에는 독룡(毒龍)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발굽 소리가 나서 구하러 오는 줄 알았는데 흰쥐와 검은 쥐가 등나무 줄기를 갉아먹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인데 우물 위에서는 벌들이 집을 지으며 꿀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혀를 내밀어 꿀을 받아 먹으며 달콤함에 취해 절박한 상황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현실을 이 상황처럼 절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태평가를 부르고 있으면 안됩니다.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 이 사람은 여러분입니다. 광야는 무명장야(無明長?)인데 중생들의 끝없는 윤회세계입니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친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 입니다. 하루 살면 하루 사는 게 아니라 하루씩 죽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자꾸 버티기지만 내 생명의 줄기는 자꾸 끊기고 있는 것입니다. 미친 코끼리는 경쟁의 화신이기도 합니다. 경쟁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앞만 보고 갑니다. 인생이 무엇이고, 왜 사는가는 사십 넘어서 조금 생각나기 시작할 뿐입니다.

 그렇게 도망치듯 달리다가 만난 우물은 안전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듯한 가정일 수도 있고, 부부간의 애정, 자녀와 부모간의 사랑, 여행일 수도 있지만 그곳에 가봤자 그것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안에 피하지만 네 마리의 독사가 있는데 그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입니다. 병에 걸리는 것은 사대가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기가 걸리면 탈수 증상이 오고 열이 생깁니다. 화가 지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결국 네 마리 독사가 각자 따로 놀기에 독룡이라고 하는 죽음의 위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들리는 말굽소리는 진리를 가장한 것으로, 예를 들면 과학문명이 발달되어야 인간의 행복해 질 것이라든가 절대신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공허한 말발굽 소리입니다. 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수행해서 깨치지 못하면 조사의 설법이나 부처님의 말씀도 공허한 말발굽 소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등나무 줄기를 갉아먹는 흰쥐는 해, 검은 쥐는 달로서 낮과 밤의 세월입니다. 세월이 생명의 동아줄을 늘 갉아먹는 것입니다. 

 이때에 꿀에 취한 것은 오욕락(五慾樂)의 즐거움에 빠져 인생을 다 허송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오욕은 '재물욕', '색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으로서, 명예욕은 똑똑하고 잘난 척 하는 것이고, 색욕은 육체적 욕망 외에도 예쁘고 좋은 것을 갖고 싶어하는 포괄적인 것입니다. 수면욕은 잠자는 것도 있지만 게으르고 나태해져 놀고 싶은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눈으로 보니 중생들의 사는 모습이 다 이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가슴에 사무치는 감동으로 와야 하는데 잘 안되시죠? 그만큼 업력이 두꺼워 무디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죽음을 맞는다는 부처님의 비유의 말씀이 또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자식이 죽어 몹시 슬퍼하며 부처님에게 자식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했습니다.

 "살려주겠다. 그런데 동네에 가서 한 사람도 죽은 이가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

 그래서 여자는 그런 집을 찾으려 동네를 다 헤매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자식의 죽음에 대해 인정을 하고 슬픔을 거두었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죽지 않는 것이 없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현생의 보화를 다음 생에서 쓰고 즐기면 좋겠지만 그게 안됩니다. 진시황 묘는 왕궁이고 그 안에 온갖 것이 다 있지만 그렇다고 그 영가가 외롭지 않았을까요?

 

 죽음과 관련된 또 하나의 비유가 있는데,

 어느 백만장자가 마누라가 셋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조강지처이고 셋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은 늙어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혼자서 죽음의 길을 가려니 두려워서 부인과 함께 가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가장 예뻐하는 셋째 부인에게 부탁을 하니 화를 내면서, "내가 늙은 사람에게 시집 올 때는 호강하려고 왔지 죽음에 따라가려도 왔냐?" 하며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그래도 "묘 속에까지는 못 가고 묘 앞에까지는 따라가 주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째 조강지처는 "부부는 일심동체입니다. 죽음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괄시하고 돌보지 않았는데 오히려 두려워하는 남편을 따라 가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부인은 아끼며 품에 안고 다닌 돈이고, 두 번째 부인은 가족입니다. 가족은 묘까지는 따라옵니다. 그리고 첫째 부인은 자기 본심입니다. 본래 마음은 첫날밤에 소박을 놔 버리고 오욕락에 취해 헌신짝 취급했지만 죽을 때쯤 찾아보니 내 본래 마음만 따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혼자서 가야할 것이며 곧 다가올 절박한 문제입니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부처님이 해답을 주셨습니다.  

 일체중생이 허망하고 무상하고 혼자 살아야하고, 무상살귀와 쥐가 내 삶의 동아줄을 갉아 먹는 가운데에서도 활로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일체중생이 실유불성(一切衆生 ?有佛?)' 입니다. 일제중생은 모두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가지고 있다. 《열반경(涕槃經)》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사람의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이 차별이 없고 다같이 평등하다. 사람이 곧 부처님이요, 중생이 또한 부처님이요, 중생심 그 자체가 불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럼 그것이 어디 숨었나 알아야 하는데 이것도 적절한 비유가 있습니다.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리스의 밀린다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묻습니다.

 "존자여, 당신은 어떻게 이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습니까?"

 "나는 나의 부모님께서 나가세나라는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으로 알려졌습니다."

 

 제가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현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름이 현고이지 현고가 현고입니까? 여러분은 저를 아십니까? 제 이름과 가죽 밖에 모릅니다. 여러분은 남편을 참으로 아십니까?  껍데기 하고 이름 말고 아는 것이 무엇이 있어요?

 

 왕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나가세나는 어떤 것입니까? 머리카락입니까? 털입니까? 이빨입니까? 내 안에 있는 피부입니까? 뼈입니까? 근육입니까?"    

 "왕이시어 아닙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을 합한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생각하는 의식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 말고 또 다른 나가세나가 있습니까?"

 "왕이시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나가세나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계시는 나가세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나는 존자의 말을 참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가세나 존자는 어떤 것이 자신의 실체인지 가르쳐 주려고  비유의 말을 했습니다.

 "대왕이시어 오실 때 뭐 타고 왔습니까?"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수레는 무엇입니까? 바퀴입니까? 축입니까? 밧줄입니까? 바퀴살입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그것을 다 합한 것이 수레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 말도 달리 수레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왕께서 먼저 나에게 말한 것 같이 나 역시 수레를 발견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필경 공허한 음성이라 해야 좋을까요? 도대체 왕께서 타고 오신 수레는 어떤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왕의 말씀을 알 수 없습니다"   

이어서 존자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지금 페하께서는 분명 수레를 여기까지 타고 왔다고 하면서 수레는 무엇이냐고 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러고서야 어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군중은 박수를 보내며 "폐하, 저런 말을 듣고서도 좋은 답변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말했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수레는 굴레, 바퀴, 멍에, 살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인연을 통 털어서 방편 삼아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에 불과하다" 

 

 역시 현고는 방편상 부르는 명칭에 불과하지요. 이 손이 현고입니까, 머리가, 코가, 털이 현고입니까?

 우리에게 지니고 있는 진실한 실체, 실상이라는 것은 말로 할 수 없고 말을 떠나 있다. 진리나 존재의 참 모습은 모양이나 말로 나타날 수 없다. 인간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고 인연의 합성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아니고 형상도 아닌, 여러분 자신의 이름도 아니고 부처의 이름도 아닌 것을 찾아야 하는데 말로 해서는 못 찾으니 덕산 스님의 봉(棒)이나 임제 스님의 할(喝)과 같은 방편을 쓰는 것입니다.

 

 三日修心千載寶(삼일수심천재보)  百年貪物一朝塵(백년탐물일조진)

 

 백년 모아 놓은 재물은 하루 아침에 없어질 수도 있지만, 삼일 동안 마음 닦은 것은 천년을 모은 것 만큼 큰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해야겠습니까?

 '이 뭣고?' 해야지요. 그러려면 여러분은 우선 환상과 어리석음에 살았던 자기를 이가 부서지도록 분개해야합니다. 그 다음에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해야합니다.

 이것이 있어야만 삼일수심을 해서 천재보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만하면 남에게 욕 안 먹고 양심적으로 살았다며 자기 합리화해도 그 이치를 깊이 살펴보면 자신과 이웃과 세상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결국 답은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뭣고?'  '나는 무엇인가?' 이 생각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감사합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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