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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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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행사

이 세상 그대로 부처님 몸이라

  • 입력 2004.01.10
  • 수정 2025.01.15

打破虛空 出骨(타파허공 출골)

電閃光 中作窟(전섬광 중작굴)

有人問我 家風(유인문아 가풍)

此? 更無別分(차외 갱무별분)

허공을 쳐부수고 뼈다귀를 가려내어서

번개불 속에 호구(집)를 마련하니

그 누가 이내 가풍 물어온다면

이밖에 또 다른 별난 것이 없다 하리라.

 

 

 

이 게송은 나옹스님의 게송입니다.

나옹스님은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습니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인생에 대해 많이 생각하셨는데, 스무살이 될 무렵 아주 가까운 친구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면 선배들은 머리에 콩밤이나 주었지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 누구에게 물어도 대답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후대에 이분의 행적을 보면 대단한 석학이였어요. 그러나 평소에 스님들이나 신도들 상대로 법문을 할 때나 이야기 할 때 "나는 문자를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글공부는 많이 안 했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많은 게송을 남겼고 당대 중국에까지 알려져서 지공스님이라는 중국황제의 왕사스님과 인연이 되어서 그분의 법을 전수받았습니다. 그 정도로 석학이셨어요. 학문도 많이 하셨고 참선공부도 많이 하신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가에서는 널리 알려진 당대의 고승이였습니다. 스님은 기록에 경상북도 동해안 영해 사람으로 되어있습니다. 옛날엔 영해부였어요. 영해부에 속하는 지금의 영덕땅 가까운 지역에서 서기 1320년에 태어났고 1340년 20살에 출가하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역을 자세히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만 공덕산 묘적암이라고 하는 암자의 요연스님이라는 스님에게 출가하여 삭발염의를 했다고 합니다. 

 

요연스님께서 "여기까지 온 놈이 무슨 물건인고? 무엇이 여기까지 왔느냐?"하고 물었습니다.  남달리 머리가 좋고 천재에 가까우신 분들은 주변에 있는 책은 모조리 다 읽으니까 한번 책을 읽으면 다 아는가봐요. 그랬으니 나옹스님도 불교서적이나 다른 서적을 많이 봤겠지요. 나옹스님도 그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능히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는 이놈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보이질 않습니다. 볼래야 보여 지지도 않고 들을래야 들을 수도 없는 이것이 답답해서 이것을 알아보려고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요연스님이 딱 보니 보통 물건이 아니었거든요. 요연스님이 조그만 암자에 계신 스님이지만 큰 그릇임을 알아보고 "나도 그건 모른다. 나도 너와 똑같다. 그러니 다른데 가서 물어보거라." 그래서 그곳을 떠나서 인연이 닿은 곳이 양주땅 회암사 입니다. 지금 나옹스님의 기가 남아 있는 절입니다. 의정부 지나서 양주에 회암사라는 절이 있는데 절터만 있고 지금은 다 무너지고 없어요. 지금 절터 이웃한 곳에 회암사라고 이름을 보전한 봉선사 말사가 있어요, 절터 명의는 다른 재단으로 넘어가서 현재 복원불사 개발계획을 갖고 절터를 경기도에서 매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 회암사 터 기슭에 3화상 부도비가 있습니다. 3화상 부도라 함은 중국황제의 왕사와 나옹스님의 법사이기도 한 지공스님의 부도, 그리고 나옹스님의 부도, 이조개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왕사 무학스님의 부도가 회암사에 있습니다. 그래서 회암사는 3화상 부도가 있는 절로 유명한 곳입니다.

 

왜 우리들이 쉽게 나옹스님과 서산스님을 접할 수 있는가 하면 선배스님들의 행장 덕분입니다. 선배스님들의 행장을 읽어보면 가슴에 와 닿는 게송이 많이 있습니다. 나옹스님의 게송도 얼른 마음에 와 닿아요.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신 서산스님도 많은 글을 남기셨습니다. 서산스님의 게송도 얼른 우리들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래서 법상에 앉은 모든 스님들이 나옹스님 말씀이나 서산스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접하시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나옹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량입니다. 이분의 게송이 많아서 오늘 게송을 여러개 소개 해 보겠습니다.

 

 

全氷是水水成氷 古鏡不磨元有光 (전빙시수수성빙 고경불마원유광)

風自動兮塵自起 本來面目露堂堂 (풍자동혜진자기 본래면목로당당)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이 곧 얼음이 된다.

옛 거울은 달지 않아도

본래 찬란한 빛을 갖고 있더라.

바람 그것은 제 스스로 불고

먼지 또한 제 스스로 일어난다.

바람이 불고 먼지가 일어나는 것은

제 스스로 그렇게 불었다 일어났다 하는 것이다.

그 속에 우리들 본래 면목은

이 우주속에 그대로 오롯하게 드러나 있느니라.

 

모든 조사들이 직관한 상태를 글로 표현하고 노래를 했을 때, 모든 것이 제 스스로 움직이는 것, 있는 그대로 직관한 모습을 노래로 표현을 잘 하십니다. 대자연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 직관 능력을 굉장히 강조를 했습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 볼 수 있는 그 능력이 바로 우리들의 올바른 지혜다 하는 것입니다.

현상 속에 숨어있는 그 본질을 꽤뚫어보는 부처님의 지혜도 강조했지만, ‘그 지혜는 별난 것이 없다. 지금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다.’ 이것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내 눈에 비치는 그 속에 진실을 보는 지혜를 기르도록 강조를 했는가 하면 그 지혜는 다름 아닌 보여지고 있는 현실·현상·자연 그대로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런 부분이 모든 게송에 나타나는 진실입니다.

이와 같이 사물을 자연 그대로 볼 수 있는 나옹스님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중국 북경에 계시는 지공스님과  마음 계합 되어 그분의 법을 전수 받습니다. 1371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왕사가 되어서 보제존자라는 칭호를 받았고 마지막으로 열반하신 곳은 신륵사입니다.

이분의 비문은 왕명에 의해서 이색이라는 석학이 비문을 지었습니다.

이색이라는 분은 고려말의 유학자로서 아주 명인이였던 가봐요.

그분이 왕명으로 보제선사 나옹스님의 비문을 지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옹스님이 무자년 1348년 북경땅에 들어와 지공스님을 만났습니다.

지공스님과 대화 몇 마디에 이미 지공스님은 나옹스님이 큰그릇임을 알았지요.

서천 또는 서역국이라 하는 것은 인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인도를 서천이라고 표현합니다.  서쪽 지역이 인도 땅이니까 그 북인도에서 천축산을 넘으면 동쪽은 중국땅 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법맥이 이어져서 상징적인 표현이겠습니다만 지공스님이 나옹스님을 108대 조사다 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던 것입니다.

바로 그 이듬해 봄에 지공스님을 만나고,  8월에 평산스님이라는 큰스님을 또 만납니다.

기록에 '지공스님·평산스님으로 부터 법을 이어 받았다.' 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평산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평산스님께서 “일찍이 어떤 사람을 만났는고?”물었습니다

“지공스님을 뵈었습니다. 그 분은 날마다 천검(千劍)을 썼습니다.”

천의 칼을 썼다는 말입니다.  매일매일 제자들에게 칼날 같이 예지가 번뜩이는 선문답이 계셨다는 말씀이지요.

평산스님이 “천검은 그만두고 일검(一劍)을 가져오너라.”

‘천검 쓰는 것을 봤으니 일검 쓰는 것은 배우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런 뜻이지요.

나옹스님이 앞에 있는 좌복으로 평산스님을 밀었습니다. 평상스님이 성상에서 넘어졌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넘어지면서‘이놈 봐라. 이놈이 지금 저자거리에서 한대만 때리면 이놈 사람 죽인다 소리 들은 것과 마찬가지네.’ 평산스님이 “이 도둑놈이 사람 죽인다.”고 크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나옹스님은 “이 나라고 하는 사람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살리기도 합니다.” 라고 하면서 넘어진 평산스님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평산스님이 그 자리에서 인가를 합니다. 서로 마음이 계합 된 거예요. 

서로 고함지르고 도둑놈이다 사람 죽인다 하는 사이에 이미 마음이 오고가고 있었던 거죠. 

평산스님의 윗대 설암스님과 급암스님 양대와 평산스님까지 3대를 내려온 가사와 불자를 나옹스님에게 전함으로서 선의 증표로 삼았습니다.

말하자면“내가 그대를 믿는 이 마음을 다른 것으로 표현할 수는 없고 선배 조사들로부터 받은 이 불자를 너에게 주노라.” 한 것이지요.

우리 보살님들 같으면 시어머니로부터 열쇠를 전수 받는 거예요.

나옹스님은 지공스님께도 법을 전수 받고,  평산스님께도 법을 전수 받습니다.

지금도 종정스님과 종정스님간에 이임을 할 때 '마음의 때를 턴다'는 의미의 하얀 털이개 같이 생긴 불자를 주고받습니다.  그것을 선의 징표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 후 신묘년 1351년 봄 나옹스님은 보타낙가산 관세음보살 친견하기 위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아직 못 가 봤습니다만 여기 보살님들은 보타낙가산에 다녀오신 분들이 계실 거예요.

북경은 아주 북쪽이예요.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왔다갔다합니다만 그 시절엔 보타낙가산까지 걸어서 가려면 몇 달은 걸렸을 겁니다.

나옹스님은 강남 섬지방에서 북쪽 보타낙가산까지 관세음보살 친견하러 행각을 떠났습니다.

중국땅 북쪽은 대체적으로 기후와 토질이 메마른 곳입니다. 양자강 이북은 비가 적어요.

비가 적은 지역은 가파릅니다. 그런데 양자강 이남은 비가 많이 오고 땅이 기름집니다.  수억만년 동안 이 지구에 강우량이 적은 지역은 가파르고 강우량이 많은 지역은 잘먹고 잘 살수 있는 기름진 땅입니다. 

수억만년 동안 기후조건이 토질을 그렇게 변화시킨 겁니다.

북경을 포함한 양자강 이북은 지금도 메마른 땅입니다.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없을 정도로 산하가 메말라 있어요.

게다가 공산국가 시절에 백성들이 못 먹고 못살아서 산야에 초목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은 산림녹화한다고 난리가 났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봤습니다만 몇 년 전에도 공산주의 국가 시절을 막 벗어났을 때 가보면 양자강 이남은 공산치하에서도 아주 잘 살아서 사찰에도 가보면 관람객이 넘쳐나요. 양자강 이남과 이북이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옛부터 이남과 이북이 서로 좋은 땅 차지하려고 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보타낙가산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복룡산에서 천암(千巖)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천암스님이 나옹스님께 묻습니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고?”

“고려국에서 왔습니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에는 어디서 왔는고?”

부모미생전 이라는 것은 부처님 법을 물을 때 반드시 나오는 물음입니다.

부모미생전 소식은 바로 부처님 소식이라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부모미생전 소식이 나의 본래 모습입니다.

나의 본래 모습은 부처님인데 부처님을 만나기 이전에 쭉 만나는 과정 그 중에 하나가 부모미생전의 소식이 들어 있습니다. 부모님을 만나기 전에는 네가 뭘 했느냐 어디서 왔느냐 참 대답하기 심히 어려운 거 아닙니까? 

항상 이와 같이 본래모습, 부모미생전의 모습, 부처님의 모습을 질문 받았을 때는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러나 그 맥은 영전이 되어져야 합니다. 엉뚱한 대답한다고 아무렇게 대답하면 안됩니다.  주장자로 어깨가 깨지라고 맞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엉뚱한 대답이지 선사끼리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비법으로는 딱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통해야만 계합이 되어서 인가를 받는 것입니다. 나옹스님이 무어라 대답하셨는가 하면 “오늘은 사월 초이튿날입니다.”

부모님 만나기 전에는 그대는 어디서 왔느냐 물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호명보살로 도솔천 내원궁에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부처님 같으면 그렇게라도 대답하지만 “부모님 만나기 전에 어디 있었느냐.”

물었는데 그 대답이 “오늘이 사월 초이틀입니다. ”이게 엉뚱한 대답 아닙니까?

선사와 선사의 마음이 계합되는 아주 올바른 대답이다 이거죠.

잘 모르시겠지요. 제가 조금 설명을 드리죠.

다른 데도 이 질문이 통하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러나 기초적으로 이것을 의리설 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합리성의 바탕이 깔려져서 주고 받는 다는 뜻에서....

뭘로 깨달았는가 하면 이 속에도 의리가 있다. 합리적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의리설이라 하면 돈오돈수와 정반대되는 용어인 줄 착각하기 쉬워요.

'의리설 별거 아니다. 말로 하는 장난이다.' 그게 아닙니다.  의리설이라고 하는 말씀 속에는 합리성이 숨어 있습니다.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말로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분석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엉뚱하니까 말로 의리고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직관은 아니지만 여기서들은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리고 참고해야 되요. 앞으로 자기가 공부를 할 때 기본적으로 이렇게 이론이 연결되는구나 하고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 만나기 전에 어디서 왔는고 하면 우린 알 수 없잖아요.

아는 분들이 있다 하더라도 아는 소리를 하면 안됩니다.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우리는 모르는게 더 많습니다. 알아도 아는척 하면 안되는 겁니다.

근데 실제로 모르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자기가 알아서 부처님처럼 ‘도솔천 내원궁에 호명보살로 있다가 이땅에 왔노라.’그런 정도로 자기가 안다하더라도 ‘도솔천은 아니더라도 28천 어디에서 심부름 하다가 왔습니다.’하면 될 일이고 아니면 ‘모릅니다.’해도 될 일이지만 아는 것처럼 ‘도리천 어디에서 하인으로 심부름 하다왔습니다.’ 그렇게 해도 안될 일입니다. 모른다고 해도 안되고 안다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사월 초이틀입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사월초 이틀인 것은 분명하니까 모르는 것을 모른다해도 안되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해도 안됩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이 사월초이틀인 것은 분명한거니까요.

질문한 천암(千巖)스님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더 이상  질문은 안 했지만 ‘아 이놈이 근본을 아는 놈이구나.’ 하고 인가를 한 겁니다.

 

그날이 바로 입실할 사람을 선택하는 날이였어요.

입실이라는 것은 법을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암스님이 나옹스님의 입실을 허락했습니다.

나옹스님은 들어가서 여러 스님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넓은 땅에 자존심 강한 중화민족으로 그곳은 모든 말과 글이 중국말 말인데,  변방 고려국에서 온 나옹스님은 비록 이두문자라고 하는 우리말이 있긴 있었지만 한문을 써야 의사소통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스님은 한문으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고 서로 마음이 계합되는데 문제될 것이 없을 정도로 석학이셨습니다.

거기서 법의와 불자를 받고 범서(인도말 서적)도 많이 가지고 오셨습니다

나옹스님이 1355년 35세 되던 해에 북경의 광제사라고 하는 절에서 법회를 여는데 나옹스님이 등단해서 법회를 보도록 황제가 명을 했어요.

광제사에서 법문을 했고, 그때 황제가 왕자를 시켜서 금란가사를 스님께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황제도 비단옷을 입었겠지만 스님들도 왕이 가사를 하사 할 때는 금란가사를 하사했는데, 법상에서 스님이 금란가사를 들고 하시는 말씀이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이 부처님 법인데, 이 찬란한 이것은 어디서 나왔는고.” 대중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중이 말이 없었습니다.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저 구중궁궐 금구(金口)에서 나왔다.”

금구란 표현은 부처님의 말씀이나 또는 대왕의 말씀을 금구라 합니다.

그러니까 이 가사가 대왕의 입에서 나왔다 이 말 입니다.

“나옹선사에게 금란가사를 하사하노라.”하고 말한 왕의 말에서 나왔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나옹스님은 일생을 중국과 우리나라를 다니면서 큰스님들로부터 법을 전수 받고  고려국으로 귀국할 즈음에 지공스님을 마지막으로 만납니다.

지공스님이 그때 수기를 내립니다. 부처님이 수기를 내리듯이 나옹스님께 수기를 내립니다. 말하자면 중국 지공스님의 법맥이 중국에서 머무르지 않고 한국땅으로 넘어 온 겁니다. “고려국으로 가서 법을 전하거라.”하는 수기이지요.

이분이 오대산을 참 좋아 하시거든요.  젊은 시절에도 오대산에 들어가서 수행을 했습니다.  중국에서 이어온 법맥을 고려국에 전하도록 수기를 받고도 바로 오대산에 들어가셔서 더 수행하는 것이지요. 달마스님이 깨치고도 9년을 면벽하면서 기다린 것처럼 나옹스님도 고려국으로 건너와서 중국에서 이어온 법맥을 그대로 바로 전하지 않고 오대산으로 들어가서 수행을 하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왕이 오대산에서 머물지 말고 서울 가까이 와서 법을 전하도록 거듭 권유를 해서 회암사로 내려와서 사시는데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서울 근교까지 전부 초토화되었습니다 홍건적이 서울까지 쳐들어 와서 왕도 피난 가야할 형편이고 제자들이 나옹스님에게도 피난 가자고 이야기했으나 나옹스님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계셨어요. 하루는 주무시는데 꿈을 꿨습니다. 어떤 신이 와서 나옹스님에게 “대중이 떠나면 적들이 와서 이 절을 없애 버리니 대중이 떠나면 안됩니다. 스님은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하고 꿈에 나타나서 가르쳐 준 것이죠.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 도량을 도는데 절에서 모시고 있는 신장님의 한 얼굴을 보았더니 꿈에 본 그 얼굴이였던 것입니다. 신장님이 나타나서 일러 준거지요.  스님은 피난을 떠나지 않고 회암사를 지켜서 적들이 회암사를 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금강산에도 계셨고 강원도 청평사에도 계셨고 그러다가 중국에서 법사스님인 지공스님이 돌아가셨어요.  1370년 봄에 지공스님의 사리(연골)가 회암사에 도착해서 지공스님의 부도를 만들었습니다.

말년에 중국의 왕사 지공스님이 회암사에 와서 말년에 주석했던 곳이니까 중국에서 돌아가셔도 다비식을 해서 일부분의 사리를 고려땅 회암사에 모셔와서 지공스님의 부도를 만들었습니다.

법사스님이 계셨다는 곳이라 해서 기록에는“말년에 회암사를 중·보수하고 많은 애를 쓰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려말기에 나라가 어지럽고 복잡한 시절이 되었습니다.  우왕 창왕이 등극하는 시대에 공민왕 물러나고 우왕 창왕이 등단하고 고려 공민왕이 물러나고 이성계가 나오는 것이지요.

고려말의 어지러운 세상을 살던 분이예요.

회암사에 계시지 못하고 왕명에 따라서 남쪽 밀양 표충사 그 지방으로 내려가는 길에 몸이 쇠잔해지고 아주 불편해서 뱃길로 나라에서 보낸 장군들이 호송을 한 겁니다. 

그런 뱃길을 내려오다가 신륵사에 쉬어다가 몸을 가누어서 가자 하고 며칠 쉬는 사이에 당신이 열반하실 날짜까지 맞춰서 여주 신륵사에서 향년 57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배속에 계신 것까지 해서 나이 57세 이 땅에 사신 것은 56년 사셨어요. 참 짧은 생을 사셨습니다. 옛날에는 많이 사신 겁니다. 그때 시절에는 대부분이 40세에 요절합니다.

50세가 넘으면 회갑을 바라보니까 상당히 희망적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이 60세를 넘기지 못했어요. 거의 58세 59세 미만에 돌아 가셨습니다. 부처님은 80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마쳤건만 나옹스님은 57세 밖에 못사셨습니다.

그렇게 사셨지만 많은 전적을 남기셔서 후학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나옹스님 이십니다.

나옹스님의 소개할 게송이 두 개가 더 남아 있습니다. 이걸 더 소개하기 전에 요즘 스님들 열반을 많이 하셨는데 열반하시면서 언론에 좌탈입망이 자주 소개되어서 좌탈입망에 대한 여러분의 견해가 올바로 심어져 있어야 되겠다 싶어서 오늘 없는 시간 쪼개서 좌탈입망에 대한 이야기 한가지만 더하고 게송 하겠습니다.

 

좌탈입망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이냐 하면 스님들이 이야기 할 때 ‘선배스님들 중에 앉아서 해탈하신 분도 계시고 서서 해탈하신 분도 계신다.’라고 할 때 좌탈입망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러니까 특정인에게 좌탈입망이라는 용어를 쓰면 안됩니다. 

백양사 종정 서옹스님이 좌탈입망 하셨다고 신문에 크게 나왔습니다. 이게 잘못된 겁니다.

좌탈! 앉아서 해탈하셨다는 말이고, 입망은 서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어떤 특정 스님이 앉아 죽고 서서 죽고 이것은 안 맞는 말입니다.

서옹스님의 경우는 ‘좌탈 하셨다.’ 해도 되고, ‘좌탈 입멸하셨다.’ 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좌탈! ‘앉아서 해탈 하셨고 입적하셨다’이러면 맞지만 좌탈입망은 ‘앉아서 해탈하고 서서 돌아가셨다.’ 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한 표현입니다.

옛날 스님 중에 앉아서 돌아가신 스님은 많습니다.

돌다리를 건너가다가 서서 열반에 드신 스님도 계시고 또 특별하게 거꾸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돌아가신 스님도 계십니다.

그런 스님들을 얘기할 때  ‘우리 선배 조사중에는 좌탈입망한 스님들이 많다.’ 이렇게 이야기 할 때는 맞지만 특정인에게 ‘좌탈입망 하셨다.’ 이러면 틀린 말이 됩니다.

앉아서 돌아가셨고, 서서 돌아가셨고 그러면 두 번 돌아가셨다는 말이 되지요.

그러니까 특정인에게는 쓰면 안되는 말이고 다수 불특정 인물 즉, 많은 선배조사들을 이야기를 할 때 돌아가신 방법이 ‘앉아서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서서 또는 물구나무서기하고 돌아가셨다.’ 그럴 때 좌탈입망이란 용어를 쓰면 됩니다.

그렇게 아시고 마지막 게송을 합시다.

나옹스님 게송이 모두 좋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마음에 더 닿는 게송을 하겠습니다.

 

 

選佛場中坐 ??着眼看(선불장중좌 성성착안간)

見聞非他物 元是舊主人(견문비타물 원시구주인)

선불장 (選佛場) 에 앉아서

정신 차리고 자세히 보라

보고 듣는 것 다른 물건이 아니다.

원래 그것은 옛 주인이다.

 

 

선불장에 앉아서 참선공부하는 방을 선불장이라고 합니다. 정신차리고 자세히 보라.

올바로 직관하라.

내가 보고 듣는 것 다른 물건이 아니다. 밖에서 찾으려고 애쓰지 마라 이 소리입니다.

원래 그것은 옛부터 옛 주인이더라. 내 본래 보습이더라.

내가 지금 보고 듣는 것, 그 주인공이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데 가서 찾으려고 애 쓰지마라. 옛부터 주인이더라 이런 뜻입니다.

 

 

山河?地眼前花 萬像森羅赤復然(산하대지안전화 만상삼나적복연)

自?方知元?? 塵塵刹刹法?身(자성방지원청정 진진찰찰법왕신)

산과 물과 대지는 눈앞의 꽃이요

삼라만상도 또한 그러하도다

자성 (自?) 이 원래 청정한 줄 비로소 알았나니

티끌마다 세계마다 다 법왕의 몸이라네.

삼라만상 또한 그러하도다

 

이 우주만물 속에 있는 삼라만상이 다 꽃이다.  꽃이라는 말은 ‘부처님이다.’ 이 뜻입니다. 생명의 본질은 바로 부처님이다 이말 입니다.

원래 모습이 청정한 줄 비로소 알았나니. 자성이 원래 청정한 것인 줄 비로소 알았다는 것이지요.  티끌마다 세계마다 모두다 법왕의 몸이라네. 여기서 법왕이라 하면 부처님을 말합니다.  진진찰찰, 삼라만상, 일월성신 모두가 다 부처님의 몸이다 이 말입니다.

진진은 티끌이고 찰찰은 이 세상입니다.

이세상 모든 것이 다 법왕의 몸이더라, 부처님의 몸이더라. 대자연이 그대로 우리들의 본래모습이고 부처님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 선배조사들이 누누이 이야기했습니다.

너가 바로 부처님이고 이웃이 바로 부처님이고 이 세상 그대로 부처님 몸이라는 것을 우리가 직관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불입니다.

 

 

다같이 성불합시다.

ㅡ서혜정((조계사 보도국 법문팀)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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