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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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정직하게 살라
?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毘耶離庵羅樹園하사 與?比丘衆八千人으로 俱하시니 菩薩은 三萬二千이며 衆所知識이라 ?智本行을 皆?成就하니 諸佛威神之所建立이라 爲護法城하야 受持正法하며 能師子吼하야 名聞十方하며 衆人不請이로대 友而安之하며 紹隆三寶하야 能使不絶하며 降伏魔?하고 制諸?道하며 ?已??하야 永離蓋纏하며 心常安住無碍解脫하야 念·定·總持와 辯才不斷하며 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와 及方便力이 無不具足하나리라.
유마경 가운데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비아리의 암나수원에 계셔서 설법을 하실 때 비구 8천과 함께 하시고 여기에 모였던 보살은 3만 2천이다.
비아리성이라 하면 여러분이 가장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부처님시대에 하나의 도시국가 입니다.
서양식으로 하면 폴리스 국가라는 것인데 폴리스라는 것은 신생 도시국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때 8천비구가 함께 있었고 보살은 3만 2천이다.
여기에서 보살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관념의 보살이 아니고 부처님 지위에 있는 보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보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중소지식(衆所知識)이다. 즉, 이 세상 국경을 넘어 멀리까지 알려진 사람들이다 그 말입니다.
이분들은 대지본행(?智本行)을 다 성취하고
일체지(一切智) 근본일행(根本一行)을 다 성취하고,
모든 부처님의 도움으로 위호법성(爲護法城)하여 부처님의 법성을 지키기 위해서
수지정법(受持正法)하며 ?來(부처님)의 정법을 받아 가지며,
능사자후(能師子吼)를 해서 명문십방(名聞十方)이라.
도무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얼마나 위대했으면 그렇게 많이 알려졌겠어요.
여기에 계시는 여러분은 얼마나 알려져 있나요?
우리들이 알려져 있는 것은 가족, 이웃집 사람들 알고있는 그런 정도죠.
여기 계셨던 8천비구나 보살들은 국경을 넘어서 널리 알려진 그런 위대한 분들입니다.
중인불청(衆人不請) 우이안지(友而安之)하며
많은 사람들이 요청하지 않아도 가서 그 마음을 위안케 하였으며 이것을 우리는 관음보살의 역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소융삼보(紹隆三寶)하여 즉, 불법승 삼보를 이어서
능사불절(能使不絶)하며 능히 끊기 않게 하였으며
항복마원(降伏魔?)하여 모든 마군을 항복 받아서
제제외도(制諸?道)하며 모든 외도를 제거했다.
소융삼보(紹隆三寶)에 능사부절(能使不絶)이라는 말은 이것이 사회활동의 한 실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분들인데 그분들은 이미 청정해서 지금 여러분이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불법(佛法)을 듣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은 포기상태에 있어요.
‘그것은 부처님이나 3만 2천 보살이나 8천비구나 스님네 들이 하는 얘기지 나와는 인연이 없다.’이것은 불교를 포기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생각 이예요.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분들과 같은 인격을 갖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다 이겁니다.
불교를 믿으면 점점 사람이 지혜로워 지는 것이다.
깨달으신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우리는 깨닫기 위해서 그런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란 것은 그러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함으로서 무엇을 성취하고 얻어가고 이런 것이 아니예요.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아무리 불교를 이야기해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지금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그 인격을 도해하는 일 입니다.
그래서 엊그제 지장재일에 이런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는 법신보살(法身菩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이 있는 곳은 중생세계예요.
우리의 심성 가운데 있는 법신보살의 당체가 이중으로 생활하고 있는 겁니다.
심성을 청정케 하고 그 심성이 청정하면 이 몸뚱이도 청정하고, 그 심성이 어질고 착하지 못하면 이 몸뚱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래서 3만 2천보살과 8천비구는 실이청정(?已??)하며, 다 이미 청정해서
영이개전(永離蓋纏)하며, 근본번뇌를 다 씻어 버렸으며
심상안주무애해탈(心常安住無碍解脫)하며,
마음이 항상 걸림이 없는 해탈의 경지에 안주했으며
念·定·總持와 辯才不斷하며
념 이라는 것은 정념(正念)을 말하는 것입니다.
팔정도를 보면 정견(正見)-정사유(正??)라 하는데 정견은 이치의 세계를 바로 보아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런 것에 관심이 있나요? 여기서 정견은 바를정字 볼견字를 씁니다. 견해를 보라.
정사유(正??)는 판단을 바로하라! 이말입니다.
지혜의 능력이 없으면 판단을 바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지혜의 능력을 길러서 판단을 바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항상 말은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 그 4가지를 성취해야 합니다.
정어(正語)가 무엇입니까? 말을 바로 하라는 뜻인데 어떤 것이 바른 말인가 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것이 바른 말인지 판단이 안 된다 이겁니다.
정견(正見)적 사유가 없는데 말을 바르게 하는 판단이 되겠어요?
지금 여러분에게 만일 선생이 어떤 것이 바른말이요? 하고 묻는다면 뭐라 답변하시겠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답변하는 것을 보면‘아주 바르게 하는 말이다.’라고 합니다.
바른 말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은 만인에게 이익이 있고 나에게 이익이 있는 즉, 자타가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손해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만 이익이 있다면 그것도 안 되고 반대로 나에게만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있다면 그것도 안 되는 겁니다.
말을 하면 나도 이익이 있고 여러분에게도 이익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대단히 빗나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손해보고 희생정신을 발휘해서 다른 사람만 이익하게 하는 말을 한다. 그것이 바른말이다.’이렇게 알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에게도 이익이 있고 남에게도 이익이 있는 말을 바른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것을 바른 말이다 라고 한다고 해요.
하지만 그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사람이 없어요.
내가 죽을지라도 만인을 위해서 이익하게 한다 하는데 어찌하여 본인은 죽지 않고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고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남도 이익하고 나도 이익한 말이 바른 말인 줄 알아야지 남을 위해서 이익하게 하고 나는 전혀 이익 없는 말을 한다면 그런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말을 정당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불을 해도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 成佛道)라는 말을 하잖아요?
남도 성불하고 나도 성불한다고 하듯 매사가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행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만인에게 이익이 있고 나에게도 이익이 있는 행위를 해야지 어느 한쪽이 빗나가서는 안된다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는 희생하고 남만 이익하게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일이 없습니다.
나도 살고 남도 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지요. 그렇게 정당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희생시킨 다든지 남을 희생시킨다고 하는 편파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근데 과연 우리는 말을 하되 만인이 이익한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만 벌리면 만인을 해롭게 하거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말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하는 것도 남도 이익하고 나도 이익하게 해야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이라는 것이 맹목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념을 가져라 생각을 바로 해야 합니다. 생각을 바로 하자면 깊이 선정에 잠겨봐야 합니다. 사유하는 능력이 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고요하게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고요한 곳이 한군데도 없어요.
도무지 시끄럽게 들끓어서 뭐가 뭔지 모르는 그러한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어요.
고요 속에 길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도 사업을 하다가 기울어 졌을 때 고요히 사무쳐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념정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즉, 정념(正念)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선정을 가져라! 항상 고요하게 살아라! 그래야 우리가 총지(總持)를 다할 수 있다.
총지(總持)라는 것은 다라니를 말하는데 다라니란 다 가지고 있다 안 가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변재부단(辯才不斷)하다. 부처님은 변재(辯才)가 무궁무진하신 분 이예요.
여기에 8천비구나 3만2천 보살들이 다 그런 분들입니다.
무슨 변재(辯才) 입니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변재(辯才)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智慧)나 변재(辯才)가 아니면 무궁무진한 생각이 안나와요.
그런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부처님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꿰뚫어 온 그러한 시도 원리가 있지요. 우리가 그것을 육바라밀(六波羅蜜) 이라 합니다.
근데 형식상 그렇게 말하잖아요.
소승성문을 위해서 사재 팔정도를 설하시고, 중승연각을 위해서 12년 법을 설하시고, 대승 보살을 위해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설 하셨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았으면 실천을 해야 하는데 실천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이죠.
이것이 어길 수 없는 모든 중생이 행 해야할 6가지 바라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6가지 방편이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그러한 것이 무엇이냐?
오늘은 여러분이 웃을 일도 없고 박수 칠 일도 없습니다.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시시하게 웃고 박수치면서 재밌다 하는데 그것은 법문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에 만담하러 온 게 아니잖아요? 그런 법문 하려면 안 하는 것이 좋아요.
오늘은 진지하게 들으세요.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는 여러분이 다 외우고 있지요.
보시라는 것은 총체적으로 말하면 덕을 베풀어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덕을 베풀어야 합니까?
보시가 종교인이니까 불교를 믿으니까 불쌍하니까 자비해야 하니까 베풀어야 합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덕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태어날 때 여러분이 무얼 가지고 왔나요?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어요. 빈손으로 왔죠?
빈손으로 왔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보니 어때요?
명예와 권세와 금전과 자손 등 소유하고 있는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지요?
그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여러분의 소유물이 어떻게 생겼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전부 남의 것입니다. 전부 남의 것인데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어 모아서 ‘이것은 내 것이다. 나의 재산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재산을 모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으며 은혜를 입고 신세를 졌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못할 짓을 하였는가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을 뉘우치기 위해서 덕을 베풀어라 이 말입니다. 알아 들으시겠죠?
종교인이니까 자비를 베풀어라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무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소유한 것이 하나도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은 다시 베풀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이런 것을 회향이라고 해요. 나에게 오는 것을 타인에게 베풀다.
그런데 중생은 어떠하냐? ‘그건 내 것이다.’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딱한 사람들입니까?
심지어 고인이 쓰다 남은 재산도 자손이‘이건 내꺼다.’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딱한 일입니까? 자기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자손에게 돌아갈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쓰다가 이 세상에 버리고 가는 거예요.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쯤 아는지 아세요? 죽을 때 보라 이겁니다.
누가 동전 한닢 넣어 가져갈 수가 있더냐. 국왕대신도 죽을 때 안타까워서 신하들이 금은보화를 무덤에 잔뜩 묻어 주지만 그걸 가져가서 쓸 수가 있나요? 동전 한닢 못 가져가요.
왜 그러느냐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못 가져가는 거예요.
자기 것이면 가져갈 수 있죠 심지어 육신마저도 썩어지면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이기 때문에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육신도 자기 것이면 가져갈 수가 있지요. 육신마저도 자기 것이 아니예요.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일상생활 가운데서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면 그 아픈 마음을 달래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덕을 베풀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시 정신입니다.
보시정신이라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육조스님께서는 보시라는 말을‘내가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탐-진-치 삼독을 허공에 버리는 것’을 보시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버리라는 것입니다.
버릴 줄 아는게 덕을 베푸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심성가운데 탐-진-치라고 하는 그 어리석은 한 생각을 허공에 버려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홀가분해 질 것이다 행복해 질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걸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한 결단코 행복해 질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덕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예언하시기를 부처님 시대에서부터 거의 500년 동안은 도덕성이 있고 사람들이 순진하기 때문에 부처님만 바라보아도 도를 깨달았고 자기가 무엇을 해야할 사람인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400~500년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점차 때가 묻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도덕성만 있으면 안되고 고요히 한번 생각해 보아라 선정을 닦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0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어떠하냐 이제는 정말 때가 묻어서 뭐가 뭔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거의 500년 동안을 또한 지혜를 닦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계(戒)·정(定)·혜(慧) 삼학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시대에서부터 4~5백년 동안 계(戒)·정(定)·혜(慧) 삼학을 닦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어떠한가 모든중생이 계(戒)·정(定)·혜(慧) 삼학을 닦는 것도 귀찮으니 다 버리고 부처님에게 그저 절만하면 다 행복해질 수 없을까하는 것이 오늘날 여러분의 신앙이예요.
도무지 계·정·혜 삼학을 닦을 생각은 안하고 그저 절만하면 복을 줄게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제가 얼마 전 이야기했습니다만 노자, 장자, 공자, 예수, 부처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 아세요? 동전 한닢 없는 거지라는 공동점이 있어요.
노자, 장자, 공자, 예수, 부처님 같은 분이 뭘 가지고 있겠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자꾸 달라고 아우성이란 말이지요.
그분들이 여러분에게 아파트를 줄 수 있나요. 돈을 줄 수 있나요. 뭘 줄 수 있겠어요?
그러한 성현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청정한 분들이기에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어떻게 하면 불행해진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분 들 이예요.
그러므로 그러한 지도원리를 가져서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 반드시 행복해 진다는 것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 앞에 그러한 방법을 배우러 온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어떻게 하오리까?’ 그걸 물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아파트를 주세요가 아닙니다. 불교만 믿으면 중생이 가지고 있는 욕심을 채울 수 있다.
불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예요. 기독교인들 그런 종교이겠어요?
예수 그리스도한테 가서 뭘 달라고 그러겠어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어요.
우리는 그분들에게 법을 배우는 것 이예요.
모든 성현들은 동전한닢 없는 청정무구한 그러한 지혜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생이 행복해 질 수 있는 조건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부처님과 같이 슬기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다 이 말입니다.
진실로 부처님의 뜻에 의해서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성이 있어야 되는데 전국민이 어떠하냐 도덕성이 없어요.
도덕성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베풀 마음은 없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세요. 세종대왕이 먹고 마시지 못하던 것 우리는 지금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집이 없나요? 재산이 없나요? 무엇이 부족한가요?
그런데 중생이 날이 갈수록 못살겠다 그럽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탐욕에 비해서 가진 것이 적어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다 만족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 보이는 것은 무엇이냐. 욕심이 생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적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 말이 틀렸나요? 역대 제왕도 가지지 못한 것, 먹고 마시지 못하던 것 여러분은 다 먹고 마십니다. 다 잘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못살겠다고 하는 이유는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을 버려야지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인내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선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참을 것이 본래 없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수준에서는 어떠하냐. 이 세상을 말할 때 우리는 감인대라 합니다.
감인대란 무엇인고 하니 참고 견디어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고(苦)의 세계인줄 알고 사는 사람은 극복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날이 갈수록 더 각박해지고 갈증이 날 것이다 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력하고 정진해야지요.
정진이란 것이 뭡니까? 심신을 공히 노력하고 인격을 닦아야 합니다. 마음은 마음대로 넓고 크게 향상시켜야 되고, 우리의 육신은 육신대로 도덕성이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놀고먹을 수만 있다면 다 놀고 먹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짝하는걸 너무 좋아해요.
요새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직업 중에 제일 선호하는 것이 뭔지 아시오?
웨이터를 지망합니다. 웨이터가 뭐 하는 직업인줄 아시오?
음식점에서 뒷짐지고 서 있다가 손님이 심부름을 시키면 하는 직업을 선호합니다.
지금의 많은 중고등교 학생들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나요?
돈 많이 번다고 소질도 없는 탤렌트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이게 다 방향감각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소질도 없는데 하여간 돈은 많이 벌고 싶다는 것 아니요.
어쩌다가 소질 있어서 육상선수가 금메달 땄다고 하면 너도나도 금메달 따겠다는 겁니다.
또 축구에서 붐이 일어나니 동네마다 가정주부들이 공 차러 나가는 거 아니요?
웃기는 사람들이지요.
이 세상이 그렇게 우습다는 말입니다. 뭘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거 아닌가요.
지금 사람들이 반짝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저 노동자들 과학자들 위대한 학자들 전부 연구실에 앉아서 햇볕 한번 못보고 시들어 가는 인생들이 얼마든지 있는데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이 나라를 들었다 놨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여러분 박수 보내 봤나요?
여러분이 다 즐겨하고, 호주머니마다 가지고 있는 휴대폰 같은 걸 보세요.
그걸 연구할 때 세월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냥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저 위대한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본 일이 없고 눈앞에 보이는 반짝하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가졌다는 것 아닙니까.
노력 없이 되는게 뭐가 있나요.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봐야 됩니다.
영업용 택시, 버스, 트럭 운전 기사들을 보세요.
그 사람들이 나가서 일을 할 때 생명을 걸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생명을 걸고 가족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여러분의 남편에게 박수를 보내 본 일이 있나요? 생명을 걸고 하루종일 그렇게 일하고 집에 들어온 사람에게‘돈 내놔라’ 하지요?
정신이 흐려지고 나간 거예요.
지금 한 이불을 쓰고 있는 남편이지만 그 남편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여러분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남과 비교를 하니 가정이 화목할 수가 없지요.
우리는 매사에 심사숙고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명상하기를 즐겨야 됩니다.
고요속에 길이 있어요 그래야 지혜가 나옵니다.
그래서 부처님시대에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온 것이 무엇이냐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이러한 지도 원리가 사람이 살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여러분 실천하려는 노력은 안하고 우연히 행복해 질 수 없을까?
우연이라는 것에 기대를 걸지 마세요. 우연히 행복해 지는 방법은 없습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것이지 원인 없는 결과가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힘써서 잘 갈려고 하는 생각을 해야지 우연히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을까 내가 불교만 믿고 있노라면 어느날 갑자기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러한 일은 없어요.
여러분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하기 위해서 화엄경에서 보면 방편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3만2천 보살과 8천의 비구는 무불구족(無不具足) 이라.
그 어느 것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다 갖추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이층세계에서 천겁에 벗어나지 아니하고 그 세계를 요달 했음으로
능히수순(已能隨順)해서, 수순이란 진리(법)의 세계에 수순했다 그런 뜻입니다.
전불퇴윤(轉不退輪)에는 부처님의 그러한 위대한 법륜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며,
그러한 법상을 잘 알아서 중생들을 잘 안다. 즉, 8천비구와 3만2천 비구는 중생이 생각하는 것을 다 알았다는 뜻입니다.
언젠가 이야기 했습니다만 정치가나 대통령,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이 서울운동장 같은데 앉아서 누가 공을 잘 치냐 누가 기량이 있냐 재미있어서 박수치고 그러겠어요?
그렇다면 지도자가 아니지....
최소한도 시민의 생각을 읽을 줄 아는 것이 정치 지도자라는 것이요.
시민의 생각이 어디로 가는 것을 볼 줄 알아야 정치적인 처사라는 거예요.
보잘 것 없는 나와 같은 사람도 서울운동장에 앉으면 축구 구경하고 있는게 아니요.
시민의 정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볼 줄 알아야 종교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는 서울시내를 한바퀴 돌면 시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야 그게 종교적인 처사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서울시민들이 다 같은 사람들 아닙니다.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이 달라요.
여기 안국동이나 가회동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이 다릅니다.
강남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성향이 달라요. 다 같은 시민인줄 아십니까? 모두 다름니다.
그런 것에 대한 사고가 깊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시민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종교가도 위대한 사상가가 되려면 시민정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功德智慧로 以修其心이라.
공덕지혜로서 그 마음을 닦아서
相?嚴身하야.
부처님의 대의로운 기상을 닮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그러한 기상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를 오래 믿으면 장부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라는 분이 천인사불 세존이라고 했잖아요?
일체중생을 끌어안을 수 있는 거대한 장부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8천 비구나 3만2천 보살들은 모든 사치한 것을 버렸으며.
名稱이 高遠하야
이름이 높고 높아서
踰於須彌하며
수미산을 뛰어 넘을 만큼 그분들의 인격이 위대했다.
渙信堅固 ?若金剛
금강석과 같이 견고하다고 단단하다는 뜻입니다.
法寶普照하야 而雨甘露라
그분들의 빛나는 법은 널리 비추어 줘서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듯 하고
衆言音에 微?第一이라
하시는 말씀마다 일체 중생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오늘 정토에 관한 말씀을 다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극락정토라는 것이 뭐냐 유마거사와 근본들은 거의 17가지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적장자가 부처님께 물으시되
부처님께서 이르신 말씀은
直心이 是菩薩?土니
곧은 마음이 보살의 극락 정토이니
菩薩이 成佛時에
보살이 성불시에
不衆生이 來生其國하며
중생이 외곡된 생각을 하지 않을 때 그러한 극락 정토에 날수 있다.
渙心이 是菩薩?土니
깊은 생각을 하라
菩薩이 成佛時에 具足功德衆生이 來生其國니라
보살이 성불시에 공덕이 구족한 중생이 정토에 태어 나리라.
‘정직하게 살아라. 종교 믿고 사람되거라’ 하면 ‘정직이 밥 먹여 주고 종교가 밥 먹여 줍니까?’ 라고 하지요.
얼마나 우리가 바보같이 살고 있는 겁니다.우리는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를 본다는 말을 상당수의 시민들이 해본 소리이고, 지금 여기 법당에 앉아 있는 분들도 해본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지옥이라는 거예요.
그건 농담으로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생각이 깊지 못해서 그러는 겁니다. 생각을 깊게 해야 합니다.
공덕을 구족 한다는 것은 지혜로워 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덕이라는 말은 나와 남의 관계가 아니고 스스로 자기의 심성이 지혜로워 지는 것. 더욱더 지혜로워지는 것이 공덕을 더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뭐냐 보리심(菩提心)을 갖는 겁니다. 보리심(菩提心)이라는 것은 지혜의 마음인데 대승중생계에 이와같은 창조적인 사유를 가진 사람이 그러한 국토에 태어날 수 있다.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말은 유마거사 시대, 소위 부처님 시대에는 없던 소리예요.
없던 소리이지만 현대적으로 말하면 대승중생이라는 말은 복수적 의미의 너와 내가 다함께 그 뜻이 예요 .
소승중생이라는 말은 단수예요. 나만 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우리는 나만 가지고는 안되죠.
여기에 17가지를 말하는데 지금 말씀드린 것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사무량심(四無量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이란 자비희사(慈?喜捨)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고통을 자기가 끌어안을 줄 아는 그런 생각이 필요해요.
그리고 늘 기쁘게 살아야 되요. 기쁘게 산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동시에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어때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전부 이렇게 질투를 하거든요.
저는 요새 한 지역의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하는 것을 보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이 정치가가 자꾸 나쁘다고 그러는데 우리 시민이 그렇게 투각(透刻) 됐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 시민 속에 그 국민 속에 나온 사람들이 그 사람이지 국회의원이라고 남의 나라에서 수입하거나 사온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그 나라 국민성에서 나오는데 국민이 위대해야 위대한 정치가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국민 속에 그 정치가가 나오는데 별수 있겠어요?
정치가를 원망하기 전에 전 국민이 위대한 국민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비희사(慈?喜捨)라고 하는 것은 따라서 기뻐 할 줄도 아는 그래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는 가질 줄만 아는 것이 아니라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한 생각 가운데 집착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사섭법(四攝法) 이예요.
사섭법(四攝法)이란 것은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 이것을 실천하면 보살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방편.
성취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방법이 三十七 조도품(助道品) 회향심(廻向心) 모든 八難을 제거하는 일, 그리고 자기 스스로가 늘 도덕성을 가지고 행하는 일, 십선법(十善法) 등 모든 것이 극락 정토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낱낱이 지적하라면 17가지 극락정토를 말하고 있는데 이렇게 실천하지 않고는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 국민은 누가 누구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만 바라보고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반성해야 됩니다. 정치가가 나쁘다고 할 수 없어요. 정치가가 다 우리 손에서 나왔다는 말 이예요. 그 사람이 시민의 대표 아닙니까?
알고 보면 그 사람이 대표로 가서 우리시민이 이런 사람들이다 라는 걸 알려 주는 거예요.
시민은 다 훌륭한데 너만 그렇게 나쁘냐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겁니다.
그런데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죠?
윗물은 맑아요. 그런데 아랫물이 더러워요 이것이 역설적인 표현인데요.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은 대단히 청초하고 깨끗합니다.
그 물이 흐르고 흘러 한강에 와서 오염이 됐어요. 시민정신이 청정치 못하다는 얘기예요.
정치가는 나쁘고 나는 깨끗하다 그런게 아니다 소리예요.
윗물 아랫물 할 것 없이 지금은 전국민이 다 더러워졌다 그 소리입니다.
반성을 해야 합니다.
전 국민이 오염 되어있다 그 말입니다.
隨其直心하여 則能發行하고
그 곧고 바른 마음을 가져서 행동으로 옮겨라.
隨其發行하야 則得渙心하니라
그러한 마음으로 행 할때 생각이 깊어 질 것이니라.
즉 그러한 마음을 가져서 자기의 마음을 조복해야 될 것이다.
그러니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남이 잘하고 못하고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다 나뻐도 나는 그러지 말아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머지는 다음기회에 하겠습니다.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시고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잘 성취되기를 기원합니다.
정리: 서혜정 (인터넷 조계사 운영부)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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