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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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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행사

그리움의 노래

  • 입력 2004.01.18
  • 수정 2025.01.15

 오늘 우리를 이렇게 만나게 해주신 지홍 스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한 마음을 일으키시고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저는 서울에 올 때마다 광화문 거리를 거닐어 봅니다. 그래서 한 기자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스님은 왜 서울에 오면 큰스님인 것처럼 광화문을 걸어다니십니까?"

 그래서 "기사로 써주면 말해주고 안 써주면 안 하겠다. 왜 공짜로 일러주냐."

 그러니까 기자가 "스님은 말 많은 스님이라서 재미가 없다"며 갔습니다.

 그때 옆에 따라다니던 청년들이

 "스님 저희들에게는 큰 법문이 될 것 같으니 대답해 주십시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알고 있느냐? 그냥 부모가 사랑해서 만들었다고, 그러면 법문 얻어들을 자격 없다. 세상에 태어나고 싶은 나머지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게 만든 너희들이 그 장본인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가만히 살고 싶은데, 너희가 태어나고 싶어서 사랑의 심지에 불을 붙인 것이 태몽 꿈이다. 그렇게 알아야 지금 내가 이야기를 한다."하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내가 광화문 거리를 걷는 것은 서울시청 자리가 1300년경에는 하늘을 떠받치는 절이라는 지천사(支?寺) 자리였습니다.

 고려는 후삼국이 통일하여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삼국통일을 불교에서는 우습게 봅니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화랑을 불심으로 이루어졌다고 가치 있게 보는 경우도 있고, 정치에 이용하기 위해 호국불교의 미명 아래 끌어들였다는 주장도 있기에 스님들은 나당 연합군에 의해 통일한 삼국통일은 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도선국사나 능여조사 같은 큰스님들의 마음을 지켜주고 그 마음에 불을 질러서 잘 사는 국가와 민족을 만들어달라는 뜻으로 이루어져 만든 나라가 고려입니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왕사와 불사가 전부 스님입니다. 즉 스님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스님들에게는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노비와 비슷한 사람들이 삼십명씩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스님들은 밥 한 끼도 얻어 먹는 걸사인데 고려시대 때에는 국토가 거의 스님들의 땅이었습니다.

 사실 지금 명산대찰에 있는 이백오십개의 사찰은 신라 때보다도 고려 때 더 번창했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476년 동안 불교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난리로 어려울 때에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었고, 개성을 강화도로 옮겨 항전했으나 불심에 의해서 극복하니 왕실에서 돌아올 명분이 없어서 또 팔만대장경을 만든 것이 오늘날 가야산에 있습니다. 대장경이 옮겨질 때가 이성계가 나라를 세울 때입니다. 토지개혁, 종교 혁명, 이런 것으로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생기면서 가장 큰 문제는 불교를 탄압한 것입니다.

 주자, 성리학이 원인이었습니다. 불교는 유교이던지 기독교이던지 전부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가지고 왜 그러냐 할지 모르지만, 최소한도 조계사 주지 스님, 총무원장 같은 분은 국가에서 스승의 예를 갖춰야하고 불교가 한 때 국교의 위치까지도 올랐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고려가 조선으로 넘어와서 동학혁명을 거쳐 사일구, 오일육을 거쳐 오늘날까지 사상적으로 흘러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민교육헌장을 가지고 민족정신을 바로 잡는다 하는데 거기에서는 연기법을 썼습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기독교적 창조법을 쓰지 않고 연기법을 썼습니다. 그러나 연기 안에는 창조도 있고 진화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모든 종교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창조나 진화가 옳다고 하면 불교는 설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수용할 때, 창조로도 진화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불교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다른 종교를 적대적으로 안보고 상관 관계로 봅니다. 그래서 21세가 종교 포럼에서 21세기는 유기체적 종교관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고로 21세기 종교의 주체는 불교입니다. 그래서 창조론, 진화론을 가지고 설교, 강론을 하더라도 결국 끝에 가서는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것, 마음이 향하는 바로서 행과 불행이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모든 설교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에서 어떤 설교가 이루어지나 보니, 끝에 가서는 결국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이냐. 노래에도 있듯이 '하늘에 땅에 바다에 부처 있느냐. 아니다 마음에 있다'    마음에 있는 부처를 확인 안하고 생각 안하고, 여러분은 생각대로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을 생각하기에 중생입니다.

 

 이 부처님과 법과 스님들은 여러분 가슴에 머물러있는 이유가 있어요. 여러분을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사는 것만으로 부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 절, 스님들, 법은 여러분 마음이 본래 마음, 본래 면목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 마음에 머물러 있어서 불사한다 하면 돈이나 걷고하니, 여러분은 바른 신앙생활을 가지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도 나를 두고 하는 것은 지식이며, 같은 알음알이라도 자신을 버리고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지식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지만 고향 가기는 글렀습니다. 돈을 가지고 은행에 투자한다면 지식이지만 돈을 가지고 조계사 불사에 쓰면 같은 돈이라도 지혜입니다. 은행 투자는 망할 수도 있고 직원이 가지고 도망 할 수도 있지만, 조계사 불사는 누가 가져갈 수도 없고 불에 타지도 않고 썩지도 않아서 여러분 마음에 부처님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늘, 땅, 바다 등등 모든 것이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부처라고 하면 여러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슴에만 부처가 있다고 하면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에 부처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 법문입니다.

 

 지금부터 청화스님의 '그리움의 노래'를 봉독하겠습니다.

 

마명용수  높은조사  염불왕생  권장하고 

염불로써  무생법인  능엄경에  이르셨네 

극락세계  관조하고  아미타불  염불하여

큰평안에  안주하니  중생들의  고향일세

 

 청화스님의 노래이지만 마명용수 스님이 나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을 전해준 사람은 마하가섭이고 마하가섭이 법을 전해준 사람은 아난존자. 이렇게 계속 전해져서 상나하수 존자, 우바북다 존자, 제다가 존자, 미차가 존자, 다수밀 존자, 불타난제 존자, 복다밀다 존자, 협 존자, 버나야사 존자, 마명 존자의 12번째까지 옵니다.

 계속 이어서 가비마라 존자, 용수존자까지 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약420년 뒤에 석가모니의 법을 잘 아는 용수존자도 이렇게 염불 왕생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스님들은 어떤 공부를 했느냐. 이것을 일러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래의 큰 법을 제 십대 협존자에게서 받은 버나야사 존자가 바라나에서 마명의 예배를 받았는데 그 마명이 묻습니다. "제가 부처를 알고자 하니 어느 것이 곧 부처닙니까?"

 그러자 버나야사 존자가, "네가 부처를 알고자 하니 부처는 알지 못하는 것이 부처이다."

 

 여러분들은 살면서 모른다는 말 몇 번 했는지 생각해 보세요. 모른다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길을 물어도 모르면서 저기로 가시요 합니다. 누가 물으면 모른다고 하기 곤란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부처님은 모르는데 있습니다. 부처가 있는 곳을 안다든지 안다고 하는 사람은 부처를 모른다고 봐야합니다. 그래서 누가 묻거든 잘 모르겠습니다 하면 내 가슴에 부처가 살아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뭘 안다고 따지면 우리 부처님 도망갔네 생각하기 바랍니다.

 모른다고 하고 어떻게 세상을 살겠냐 하겠지만 모른다는 것 속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아는 것만 가지고 살면 자기 욕심을 채우는 삶이 되고, 모르는 부처님을 찾아살려면 자기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처님의 진리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또 마명이 물었습니다. "부처님을 이미 알지 못한다면 어찌 그것이 부처임을 알 수 있습니까?"

 버나야사 존자가, "부처를 이미 알지 못한다면 어찌 그것이 아닌 줄을 또 아느냐?"

 네가 묻는 것은 자꾸 네 주장일 뿐이다. 너의 주장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수행이 '묵언'입니다. 말 안하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복다밀다 존자도 그렇게 해서 법을 봤습니다. 오십년 동안 말 못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부타난자 존자를 만나서 말 한마디에 걷고 말하고 부처님 법을 믿는 불제자가 되었습니다. 

 말하지 마세요. 특히 여러분 충격 받았을 때, 충격이란 환란을 말합니다.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에, 나라에, 가정에,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았을 때 대담하십시오. 그때 말하면 이미 부처가 도망가고 없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부처가 어깨 두들기며 '착하다'고 합니다.      그 생각, 그 시비는 예로부터 법이 떨어졌다 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편한지 느껴보란 말입니다.

 

 이번에도 종정스님 신년 하례 갔는데 성수 원로 스님이 왔습니다. 오랜만에 대중이 모였고 신년 초이니 법문 한마디 들려주십시오 하니, "법문이란 것이 다 들어가고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 듣고 저도 앞으로 법문 안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모든 요구와, 공격과 어려움이 오거든 깔고 앉으십시오. 깔고 앉아서도 자꾸 일어나거든 부처님께 와서 털어놓아야 합니다.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니 죄를 가져오너라'

 '병을 고쳐주십시오'. '니 병을 가져와라'

 여기와서 골똘히 생각하면 병이 낳게 되는데 아무도 안 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조계사 법당 뒤에서 법문 들으면서도 절을 하는 보살이 수십명 되었어요. 그 보살들이 지금은 전부 극락 갔는지 아무도 없더라구요.

 

 여러분들 우스운 이야기라고 듣지 마세요. 그래서 이 두 분의 대화라든지, 묵언 하는 것. 묵언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긍정적인 것이며 끝낸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욕을 하는데 그것을 끝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으로 나하고 이야기 해야하지 그전에 생각은 나한테 다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수 스님의 한마디, "법문이 다 들어가고 없다"는 것에, 공양을 그치고 법문을 들으려 했다가 더욱 더 숟가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라는 말입니다. 맛있게 공양을 드셨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부처님 돌아가시고 사백년 후의 마명, 용수 이런 높은 조사 스님들도 안심입명이 우리의 고향이라 일렀으니 불행하고, 고통받고, 안 되고, 짜증나고, 죽고 싶고, 괴로운 모든 것을 조계사 법당에 와서 자복 위에 앉아 한 자루 타는 촛불이나 향처럼 완전 혹은 불완전 연소로서 여러분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십시오. 살고 싶은 생각과 살았다는 데 고마운 생각이 날 때까지 이 도량을 떠나지 마십시오. 그러고도 성불하지 못한다면 몽둥이 들고 이 직지사 자광 스님 두둘기려고 찾아오십시오. 그러면 기꺼이 몽둥이 맞아 죽겠습니다.

 

 다음 읽겠습니다.

 

참회하고  염불하면  몸과마음  정화되니 

등골에는  물 흐르고  가슴에는  꽃이 피네 

몸과 마음  화목하니  일체병고  사라지니 

번뇌망상은  떠나가고 광명향기 넘쳐나네

 

 원래 결제는 참회하는 것입니다. 결제 기간에 참회하기에 조상님들을 모셔놓고 천도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참회를 우습게 보면서 하는 말이, 부처님은 정해진 업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는데 참회가 무슨 소용이나고 합니다. 그것은 참회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참회는 과거의 괴로움을 참회하고, 현재의 어려움을 참회하고, 미래의 두려움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참회는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한 참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공식적인 생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몸과 마음을 다 없애는, 그런 떠난 참회입니다. 그 참회가 여러분들에 쌓일 때는 여러분들은 극락 세게에 가서 계십니다. 지금 여기 계셔서 참회하는 것이 극락세계에 가는 차표 한 장으로 알면 됩니다. 차표 한 장 한 장이 쌓이면 극락세계에 가는데 다른 아무 필요는 없습니다.

 

 또 봅시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어느곳에  계신가요 

생각생각  끊임없이 간절하게  이어지다 

마음길이  끊어지고  나마저도  사라질때

무명세계  흔적없고  자성광명  나타나네

 

 나 마저도 사라지면 무명이 없습니다. 제가 병상에 가서 제일 잘하는 법문은 이렇습니다.

 "보살은 없어. 보살은 그때 조계사에서 예수제 지낼 때 돈 소쿠리 들고 다닐 때가 보살이지. 그때가 보살이지 지금 병상에  누운 것은 보살이 아니야. 도를 잘못 닦아서 병상에 있는 것 아니냐."

 "그럼 어떻게 합니까"   

 "나는 없다고 생각해봐."

 그러면서 최면을 거는 겁니다. 나는 없다. 나는 없다. 그때에 간호사가 와서 "그럼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주사를 놉니까?"

 "없는 나한테 나야지. 있는 나한테 놓면 안된다."

 그래서 그 간호사가 머리 깍고 출가를 했어요. 세상에 병상에서 침을 놓는데 '나 없는 나에게 침을 놓아라' 그 말 한마디에  '이렇게 좋은 것이 있는데 여기서 왜 속고 사느냐' 하며 출가를 해서 비구니 스님이 되어서 불교계에서도 죽음을 기다리는 집에서 주지하고 있습니다.

 한 생각 돌리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이고 스님 제가 죄를 많이 지어서 병석에서 죽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짜 죽습니다. '스님 말씀 들으니, 나는 없다 하니 병이 어디 있노, 나쁜 인연들은 다 물러가라. 좋은 인연들만 가지고도 살아도 살날이 얼마 없다'. 그래서 그 보살은 정말 병이 낳아서 암을 극복했다는 수기까지 썼습니다.

 

마음속의  의식흐름  주시하여  살펴보니 

과거생각  미래생각  현재일념  하나없네 

들숨날숨  주시할때  번뇌망상  일지못해

호흡따라  아미타불  온누리가  하나되네

 

들숨, 날숨. 그 숨끝을 따라가라. 또한 호흡할 때도 아미타불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사는 것이 호흡지간에 있다 했는데 호흡지간을 아미타불로 장엄한다면 거기에 무슨 번뇌 망상이 있고 극락과 지옥이 있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아미타불  염불속에  근심걱정  사라지고 

아미타불  염불속에  일체병고  소멸되고 

아미타불  광명속에  어둔마음  밝아져서

아미타불  광명속에  기쁨의삶  축복의삶 

 

탐욕불꽃  소멸하니  부족함이  하나없고 

성냄불꽃  소멸하니  자비심이  넘쳐나고 

애욕불꽃  소멸하니  안락세계  나타나고

번뇌불꽃  소멸하니  아미타불  나타나네

 

아미타불  생각하면  나의마음  호수되고 

아미타불  염불하면 그리움이  물결치네 

그리운맘  아미타불  간절함이  이어지고

간절한맘  아미타불  염불삼매  나타나네

 

아미타불  한마디에  무량공덕  담겨있어 

아미타불  염불하면  번뇌업장  녹아지고 

아미타불  관을하면  부처종자  싹이터서

아미타불  친견하면  본래부처  성취하네 

 

푸른산도  아미타불  맑은물도  아미타불 

저허공도  아미타불  온누리가  아미타불 

아미타불  광명속에  부처중생  한몸되고

아미타불  광명속에  생사윤회  본래없네

 

 아까는 산에도 하늘에도 없다했지만 부처님이 내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살 때는 산이고 들이고 하늘이고 모든 것이 부처가 아닌 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보살은 쓰레기통을 열 번을 때려 부쉈다는 것입니다. 열 번째 때려부수고 열 한 번째 사러갔는데 살때부터 쓰레기통을 잡고 '아이고 부처님, 우리집에 가서 삽시다' 그랬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게 주인이 "방금 뭐라했습니까?" 하고 물으니

 "내가 화가 나서 쓰레기통을 열 개를 부쉈는데, 스님이 법문 하는데 쓰레기통을 부처로 모시라고 합디다."

 그러니 주인이 말하길 "나에게 좋은 법문 일러주었으니 그냥 가져 가십시오" 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가져가서 아들하고 싸우고 며느리 하고 싸워도 쓰레기통을 안 부서뜨리는 겁니다. 그래서 영감이 곁눈질로 보는 것입니다.

 그 보살이 "왜 그래 보십니까?" 하고 물으니

 "저 쓰레기통이 부숴질 때가 됐는데. 오늘은 왜 가만 있나."

 "예전에는 당신이 안경 너머로 볼 때는 미워주겠는데 오늘은 예뻐서 죽겠다."

 그 보살이 말하기를 "우리 도반중에 어느 분이 영감이 죽어서 슬퍼서 베게를 끌어안고 울다 잠을 잤는데 감기가 들어다하더라. 그런데 나는 옆에서 어쨋든 안경 너머로 봐 주니까 부처님 하고 사는 기분이 좋다" 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그래서 영감이 기분이 좋아서 가족을 전부 불렀습니다.

 "우리 집에 부처님이 출현했어. 네 엄마가 괴로울 때는 저 쓰레기통을 부쉈는데 열한번째는 쓰레기통으로 안보고 부처로 보고 모셔놓으니까 부숴질 때가 됐는데도 너 엄마가 안부수니 부처가 다 된 것을 나 혼자 알아서 되겠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일출보며  아미타불  노을보며  아미타불

물소리에  아미타불  바람소리에  아미타불 

가릉빈가  노래하고  우담발화  꽃이피니

아미타불  원력으로  산하대지  이뤄졌네

 

 해가 뜰때도 질때도 아미타불. 여기서 더 나아가면 사람 태어날 때 죽을 때도 아미타불. 하여튼 죽고 사는 모든 것을 해결할 때는 아미타불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은 현미경과도 같고 망원경과 같기도 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의사 선생님은 현미경만 보고 손을 하루에도 수십번 씻지만, 우리 엄마는 나를 키울 때 코 푼 손으로 김치를 잘라서 밥 위에 걸쳐 나를 먹여도 병 안 걸리고 잘 컷다."

 이 법문은 어떻습니까. 그 목사 대단합니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모르는 것이 있는데, 멀리 보자 하면서 현미경 보는 삶을 망원경 사는 삶으로 바꾸자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현미경도 잘 보고 망원경도 잘 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거는 아니다. 저거는 좋다'.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승도 좋고 저승도 좋고, 이승 저승 다 좋은 것이 부처님 나라. 이렇게 해야합니다. 다른 종교는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하는데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불교는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미워도 한 세상 좋아도 한 세상 마음을 달래며 웃으며 삽시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걸음걸음  아미타불  들숨날숨  아미타불

내성품이  아미타불  내마음이  극락정토 

가는이여  가는이여  열반으로  가는이여

고해물결  타고넘어  열반언덕  가는이여

 

일천번을  염불하면  일천부처  나타나고 

일만번을  염불하면  일만부처  나타나네 

가는이여  가는이녀  열반으로  가는이여

고해물결  타고넘어  열반언덕  가는이여 

 

가는이여 가는이여 열반으로 가는이여

생사인연 넘고넘어 열반으로 어서가세

시간 속에 바람 속에 여러 생을 살다가네

남을 위함 자기 행복 좋은 만남 멋진 이별

극락세계 부푼연대 상상품에 안주하여

무생법인 이루어서 덩실덩실 춤을 추세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행복하십시오.

 

 

 

정리: 장훈(quf02) 조계사 보도부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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