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조계사 뉴스
건강해지는 무심수행
千計萬?量 천계만사량
紅爐一點雪 홍로일점설
泥牛水上行 니우수상행
?地虛空裂 대지허공렬
우리들 많은 꾀, 온갖 생각들이 붉게 타오르는 화롯불의 한 점 눈이더라.
진흙 소가 물 위로 가니 대지와 허공이 찢어져버리더라.
만사가 다 쉬어지는 경계입니다.
진흙으로 빚은 소가 물 위로 가니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든 생각을 쉬어버리면 그대로 이 세상이 편안해 지는 것입니다. 대지와 허공이 찢어져버린다고 하니 크게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하여
초진수중구(초盡水中구)로다
가소기우자(可笑騎牛者)여
기우갱멱우(騎牛更覓牛)로구나
그림자 없는 나무를 누가 가져오면 내가 그것을 도끼로 찍어서
그 나무로 물 속에 있는 물거품을 다 태워버리리라.
가히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두 개 모두 서산 스님의 게송입니다.
조선시대 500년은 불교에 있어서는 암흑세계 였습니다. 태조가 무학스님과 같은 고승과 더불어 불교 사상을 등에 업고 나라를 세우기는 했습니다면 이미 불교는 사회에서 쇠퇴한 시기였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국교로서 번창했지만, 세상의 역사나 이치는 흥하면 쇠하게 되어있습니다. 고려말기에 하늘 찌를듯 높던 불교의 권세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부처님 사상에 입각한 태조 이성계와 상관 없이 나라의 문무백관은 유교를 택해서 배불숭유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조선 시대에 스님들은 사대문 안에 들어서지도 못했는데 다만 궁중에서 법회가 필요할 때는 가마에 태워 비밀리에 입성했습니다. 스님이 사대문 안에 들어서면 요즘 간첩신고 하듯 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라가 어려울 때에 나라를 구한 스님이 서산스님입니다.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한 승장하면 사명대사를 알고 계시지만 그 분도 서산스님이 계셨기에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서산스님은 사명대사보다 26살 연상입니다. 사명대사는 서선대사의 제자입니다.
서산스님은 별칭이고 법명은 '휴정'(休靜)입니다. 왜 서산이라 했냐면, 금강산을 스님들이 지혜의 산이라해서 지산이라 불렀고, 지리산은 덕이 많다 해서 덕산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묘향산은 지혜와 덕을 고루 갖추었다 해서 지덕산이라 불렀고 휴정 스님이 좋아하는 산입니다. 그래서 평생 묘향산에서 살았습니다. 묘향산을 서악이라 하는데, 그래서 별명이 서산입니다.
위에 나온 서산스님의 선시에서 "가소롭구나 소 탄 자여, 소 타고 있으면서 왜 또 소를 찾느냐." 이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를 이미 갖고 있으면서 다른 데 가서 찾으려는 어리석은 우리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보통 선문답이라고 하면 대답할 수 없어 벌벌 떨지 말고, 묻는 것을 되물으면 상대가 꼼짝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르면서 물을 수 있고 알면서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묻는 자기도 모르는 것이고 안다고 한들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부처님의 경지는 언어도단의 경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 하면 틀리는 경지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할 수는 있어도 말로는 안 통하는 데 말로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묻는 것 자체가 틀리기에 답을 안 하면 정답은 아니더라도 부족하지만 차답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답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있으면 그 자체가 답일 수 있어요.
말이 없는 것은 몰라서 일수도 있지만, 알면서도 말이 없다는 것은 말로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 안하고 있으면 보통은 됩니다. 말하려고 애 쓰니까 땀 나고 틀리면 비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 없은 것이 편리하고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세상 사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소를 탄 자여 가소롭구나. 왜 소를 타고 있으면서 또 소를 찾는냐" 하는 게송은 생긴 연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소요 스님이 어느 날 묘향산에 계신 서산대사를 찾아가서 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니, 서산대사는 보자마자 법기(法器)인 줄 아시고 그날부터 시봉을 시키면서 능엄경 한 토씩을 매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요 스님은 이미 경전을 통달한 강사인지라 능엄경을 모를 리 없지만 서산대사의 가르침이라 매일 배우다보니 삼 년이 다 지나갔습니다. 소요 스님이 생각하여 보니, 대선사요, 대도인이라 하여 찾아왔는데 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이렇게 다 알고 있는 능엄경만을 가르쳐 주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 계속 배워 가는데 소요 스님이 잠깐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면 서산대사는 웬일인지 때묻은 작은 책을 보시다가는 곧 안주머니에 넣곤 하는데 이렇게 여러 번 계속되고 보니 소요 스님은 그 작은 책에 대하여 매우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서산대사가 잠자는 틈을 타서 그 작은 책을 보려고 하니 서산대사는 깜짝 놀라 깨어나서 그 책을 더욱 소중히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관심이 많아지고 또 무슨 책인지 점점 의심이 커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책을 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단속이 심하고 또 그냥 그대로 아무런 법도 얻지 못하였으니, 더욱 화가 나서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소요 스님은 서산대사에게 하직을 고하니 그때야 비로소 서산대사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던 때와 콧물이 묻은 그 작은 책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가려고 하거든 이 책이나 가지고 가게." 하셨습니다. 서산대사가 주신 책을 펴보니 게송이 있는데,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하여
초진수중구(초盡水中구)로다
가소기우자(可笑騎牛者)여
기우갱멱우(騎牛更覓牛)로구나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물 가운데 거품을 태워 다할지니라.
가히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이 게송을 가지고 호남으로 내려가 20년간을 참구하였으나 깨닫지를 못하고 나이 40에 이르러 다시 묘향산에 돌아가서 서산대사를 뵈오니 감개가 무량하여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20년 간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는 스승이 아니었던가. 서산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부가 어떻게 되었느냐?" "떠날 때 주신 게송의 의지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서산대사께서 "가히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하시는 바람에 소요 스님은 언하에 확철대오 하였습니다.
서산스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자신의 영전을 향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八十年前渠是我 (팔십전전거시아)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후아시거).
팔십년 전에는 나 보고 그린 그림이니 네가 나였는데, 팔십년이 지나 죽을 때가 되어서 보니까 그 영정만 남으니 내가 너로구나.
열반하고 나면 나는 없어지고 영정만 남는다는 말입니다.
제가 오늘 중점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서산스님은 팔십오세를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조선 시대에 팔십오세를 살았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곱을 산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봐서 서산스님이 얼마나 공부를 잘했나 알 수 있습니다.
염불, 간경, 참선의 공부를 하면 제일 먼저 효과를 보는 것은 '몸'입니다.
우리가 불교적 수련을 한다 하면 육신 관리가 잘되야 합니다. 육신 관리 잘 못하면, 업이 지중해서 하다 해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병원가기를 꺼립니다. 내 업이 얼마나 지중컨데 공부하는 수행자로 몸 하나 이기지 못하나 해서 부끄러워집니다.
몸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보통 우리들이 먹는 음식은 에너지의 덩어리입니다. 에너지는 동양적 사고에 입각해서 '기'라고 합니다. 기의 덩어리가 음식인데 그것은 아주 삼가해서 먹고 적게 먹어야만 도움을 받지 함부로 먹고 과잉섭취하면 내 몸이 상합니다.
중국의 국민들이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도교인데 육신 관리를 철저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도교에서는 육신 그대로 등천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육신을 잘 관리하면 그대로 등천한다고 믿습니다.
석가모니께서는 그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육신은 버려야한다고 했고 팔십세에 버렸습니다. 불가에서는 모든 것은 결국 없어지고 멸한다고 했습니다.
도교에서는 공기와 물만 먹어도 육신을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수행하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종식이라 해서 한끼 식사를 했다가 나중에는 아침에는 죽을 먹고 사시에는 공양으로 두끼를 드셨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들어와서 저녘에 너무 배고파 공부가 안되니 수좌들이 돌을 뜨겁게 달구어서 배를 지지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조사스님들이 안되겠다, 저녁을 먹자 해서 절에서 저녁 먹는 것을 약석(藥石)이라고 합니다. 선배 수좌들이 배를 지지던 돌을 생각하며 저녁을 먹자는 뜻입니다.
저도 젊어서는 많이 먹는데만 찾아 다녔는데 나이 먹으니까 공부가 저절로 됩니다.
군대에서 아침 저녁 점호만 없어도 군대생활 오래하겠다 하는 것처럼 아침 예불만 없으면 중노릇 하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먹어서 주지도 하고 제자도 기르고 하려니까 그렇게 먹어라 해도 안 먹게 되고, 자라고 해도 안자게 되고, 공부 하지말라 말려도 하게 되고, 생사 문제도 해결해야 하니 밤잠이 안옵니다. 자다가 일어나서도 '이 뭣고' 하게 됩니다. 나이 먹으면 저절로 계도 지키게 되고 중노릇 제대로 하고 공부도 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 까불고 많이 돌아다닐 때에는 아무리 말려도 안됩니다. 그저 인연따라 되면 되고 말면 말아야지 해야합니다. 공부하라고 돈을 싸들고 유학 보내봤자 딴전 부립니다. 억지로는 안됩니다. 부처님이 업따라 인연 따라 산다 했듯이 억지로 해봤자 나만 허파 빠집니다. 그저 부모되어서 헛길로 가지 말라고 이야기는 해줘야 하지만 해도 안되면 인연따라 제 법 따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따라다닌다고 될 것이 안 되는 것도 없고, 안 될 것이 될 것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평생 조심하는 마음, 삼가하는 마음, 고마워 하는 마음으로 살면 나이가 먹으면 저절로 수행이 되고 공부하게 됩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이 일찍 절단납니다.
영리한 사람은 남이 안 시켜도 다 알아서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건강 관리도 나이 먹으면 저절로 되지만 불자라면 법회나 책이나 부처님 사상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실천할 줄 알아야합니다. 음식이 기의 덩어리로 알고 적게 먹고 조심하고 삼가해서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옛말에 약보다는 밥이 낫다고 합니다. 그리고 밥 보다는 정신, 마음이 낫다고 합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면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많이 먹으면 독이 됩니다. 그러니 정신이 더 우위에 있습니다. 약보다는 밥, 밥 보다는 정신이 낫다고 할 수 잇습니다.
그러면 정신이라고 했을 때 정은 물질에 가깝다고 하면 신은 마음에 가까운 것입니다. 마음은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인데 기도하는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교적 수련의 목표라 할 수 있는 '무심(無心)'입니다. 기도하겠다고 마음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심의 마음을 내는 것이고 이 상태가 부처님을 만나는 마음입니다.
선정에 들어서 얻어지는 마음이 무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무심의 경지를 얻으면 마음을 최상의 경지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에서 출발해 밥과 정신을 거쳐 무심의 경지를 얻어야 확실히 건강 관리가 됩니다. 온갖 신경 쓰고 걱정하면 관리가 안됩니다. 무심으로 놓아버려라. 놓아버리는 정신이 있어야만 무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무심의 경지는 염불, 간경, 참선 어느 방법이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든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의식을 집중하고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모으기 위해서는 상상으로 일점을 만들어 그것을 향해 집중하고 정진하면서 노려보는 것입니다.
또한 호흡을 해야합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수식관'이라해서 의식집중하는 곳에 호흡이 들숨, 날숨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코로 들어가서 폐로 간다는 것은 생각말고 집중된 의식의 일점으로 들어가서 내뿜는 것입니다.
여기에 화두나 염불, 혹은 경전의 한 구절이 더해져야합니다. (1)의식집중, (2)호흡, (3)화두나 염불 혹은 경전의 한 구절. 이 세가지는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떨어지면 공부가 안됩니다. 여기에서 제일 먼저 떨어지는 것이 화두, 다음에 호흡, 다음에 의식이 떨어지면 무심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방법으로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서산스님 게송을 하겠습니다.
萬國都城?蟻 (만국도성여의질)
千家豪傑若醯鷄 (천가호걸약혜계)
一密明月?虛枕 (일밀명월청허침)
無限松風韻不齊 (무한송풍운불제)
만국의 서울은 개미집 이요
천가의 호걸은 하루살이로다
달빛 밝은 창가에 허심히 누웠으니
무한한 솔바람 끊임없이 불어오네.
서울 전체가 아파트인데 위에서 내려보면 개미집에 불과합니다.
옛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다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서산 스님이 달이 밝게 비치는 창가에 팔베게하고 누워 인생을 별거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오는 운치가 집이 아니더라.
즉, 사람 사는 동네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더라.
髮白非心白 발백비심백
古人曾漏? 고인증누설
今聞一聲鷄 금문일성계
丈?能事畢 장부능사필
머리털 희되 마음 희지 않음을
옛사람이 일찍이 누설했도다.
이제 한 닭소리 들으니
장부의 하는 일을 능히 마쳤도다.
몸은 늙으나 마음은 늙지 않는다.
고인이 이미 다 비밀이랄 것 없이 다 말했다.
서산스님이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그러니 장부가 해야할 일은 끝난 것이 아닌가.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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