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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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인을 위한 동안거 ~열번째
생활인을 위한 동안거 (수행법 대강좌 결제)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로 ~ 열 번째
| 위빠사나 수행법 | 김열권 법사
새해가 시작된 지도 어언 2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즈음 생활인을 위한 동안거의 수행법 대강좌도 어느새 열 번째이다. 이번 강의는 김열권 법사를 초청하여 위빠사나 수행법에 관한 강좌를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시작하기에 앞서 잠깐의 입정시간을 가졌다. 허리를 펴고 눈을 감으라는 지시에 따라 극락전에 모여 앉은 수강생들이 일제히 눈을 감았다.
“무엇을 느끼십니까? 자연스럽게 숨을 내쉴 때와 들이쉴 때를 느껴 보십시오. 호흡과 호흡 사이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느끼세요. 움직임 속에서 단란한 느낌, 팽창, 단단한 느낌, 묵직한 느낌, 당김, 따뜻한 느낌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을 포착하여 변화를 느끼고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다 생각이 들면 생각, 생각, 생각을 하고, 그러다 생각이 사라지면 다시 생각을 일으켜서 생각을 하고, 사라지면 다시 생각이 일어남, 일어남을 하십시오. 다리가 저리다든가 하는 아픈 부분을 받아들이고, 강한 부분도 받아들이고, 망상이 들면 망상, 망상 하고 사라지면 다시 느끼고를 반복합니다. 움직임 속에서 그것들의 변화를 봅니다. 움직이면서 다른 느낌이 같이 일어납니다. 호흡사이에도 틈이 있어, 틈에서도 느낍니다. 좋고, 싫고, 중간의 느낌도 있습니다. 관찰하여 변화를 봅니다. 크거나 짧게 움직이느냐를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상이며 끊임없이 반응합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것도 식입니다. 생각, 그 자체가 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나고 관찰하고 바라보는 것이 반야입니다.”
“불교의 목적은 생사해탈입니다. 부처님은 벌써 윤회에 관해서 출가 이전에 교육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모습을 보시고, 그것에 대해 도전하러 가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사람은 죽어 가는가? 왜 태어나고 죽는가? 이것이 12연기법입니다. 존재라는, 유라는 형체는 어디서 왔는가? 이는 집착에 의해서 몸이 생겨납니다. 부처님은 사마타 8선정인 비상비비상처정을 얻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보리수 아래에서 위빠사나로 12연기를 꿰뚫어보시고 생사없는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셨습니다. 12연기를 순관, 역관하실 때에 반야지혜와 위빠사나관을 이용했습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을 반야로 조견하여 고통을 소멸한 공을 얻는다고 했으며, 금강경에서는 모든 상을 상아님으로 보면 즉견여래라 하여 이를 견성이라고 했습니다.
세포의 생멸원인이 업에서 오는지, 음식에서 오는지, 집착에 의해서 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집착과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몸과 마음이 식에서 만나고, 식은 전생에 쌓았던 행에서 오고, 그 행은 다시 무명에서 오고, 무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부처님은 무명을 없애니 업이 없어지고, 행이 없어지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반야의 조견오온개공은 12연기의 끝입니다. 반야로 12연기를 조견하는 것입니다. 이 조견이 위빠사나입니다. 12연기에 무명부터 생로병사, 미세함까지 모두가 다 들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나로 보고, 나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반야의 흐름과 식의 흐름을 구분하기 시작하는 것이 불교에 입문하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감각에 흐름이 있고,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반야가 따로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론적으로, 타성적으로, 철학적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절대적 진리를 찾으러 갔을 때에 체험하지 않으면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윤회를 체험한 사람들의 표정은 담담합니다. 마음상태에 따라 지옥과 극락이 생겨납니다. 체험하지 않은 믿음에 대해서는 믿음의 한계가 옵니다. 부처님의 정견과 색신을 모르면 윤회를 알아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교리나 색신의 유식이 대승불교의 위빠사나입니다. 식의 작용을 나로 보는 것, 결국 오온의 흐름을 기억하는 것을 나로 보고,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무명입니다. 이것을 뱐야로 비춰보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바로 여러 가지를 본다와 그 이전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정견에서 반야의 흐름과 12연기의 흐름을 구분했습니다. ‘생멸하는 마음을 버려라, 생멸하는 마음이 바로 윤회이다’라고 했습니다. 12연기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을 반야로 비춰보는 이 두 가지를 다 사용한 분이 부처님입니다. 삿띠(마음 챙김, 주시)와 견성 할 때의 견이 반야작용인 위빠사나를 사용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쳐서 화엄경을 설하니 중생들이 알아듣지 못하여 아함경, 방등경, 반야경, 열반경, 화엄경 순으로 설했다고 분류합니다. 부처님의 모든 경전은 무량한 법과 진리를 축소해서 보아야 합니다. 일본에서는 원효스님을 부처님 이후의 최고의 도인으로 생각합니다. 원효스님은 완벽하게 대승불교의 위빠사나를 수립한 분입니다. 그러니 완벽하게 대승불교를 알지 못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겁니다.
몸과 마음이 나라는 집착에서 떨어져 나가 수단까지 가게 되면 범천왕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능력이나 신통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견이 가장 중요합니다. 좋다, 싫다하는 것은, 보는 순간 무의식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인의 삶입니다. 불자의 삶은 반야로 비춰보는 것이 수행의 시작이고 불교의 시작입니다. 내 몸을 관찰하는 것이, 내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위빠사나의 마지막은 지혜와 자비입니다. 처음에는 몸부터 관찰하고, 수행이 깊어지면 소리로 들으면서 귀의 이근이 식이 일어나고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같이 볼 수 있게 됩니다. 반야로서 계속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넓게 보면 우주와도 일치합니다. 오온을 옆으로 하면 색성향미촉법이 되고, 오온을 길게 하면 무의식을 보게 되므로 12연기라고 합니다. 고통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합니다. 무상함과 괴로움은 같이 가는데 이는 같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상이란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일어나는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물체를 볼 때 과거 기억과 같이 일어나서 보게 됩니다. 볼 수 없는 사람은 식에 의존합니다. 오온으로 보고, 나로 보아야 합니다. 의식은 무의식을 꿰뚫지 못합니다. 식에 의존하게 되면 그 자체를 나로 보게 됩니다.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하든지 나를 전체로 하고, 나를 밑바탕에 깔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조건 지어져 있는 것은 고통입니다. 선정이나 각성의 세계에서는 그 자체가 고통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는 반야에서 시작에 반야로 끝납니다. 불자는 반야에 의존해서 살고, 일반인은 식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이것을 모르게 되면 업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반야에 의해서 계속 생각하는 것이 8정도입니다. 계속 행하면서 생멸의 그 자리에 갈 수 있습니다. 일체가 고통임에도 고통임을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반야와 식을 구분하는 것이 졍견(正見)의 시작이고, 불자의 시작입니다.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반야의 시작입니다. 불교는 깨달아서 증명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것이 반야입니다. 부처님의 출가 목적은 생사해탈이고, 생사해탈을 깨쳐서 일반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윤회의 주체는 없습니다. 사람이 죽고 태어남에도 식이 작용합니다. 순간순간 생각이 일어날 때에도 무의식이 작용합니다. 우주 자체가 불교이고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은 안팎이 없습니다. 유일신에서 인간중심으로 가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도를 중심으로 가고 있습니다. 윤회의 세계를 반야의 세계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아무리 행복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윤회이며 고통입니다.
교리는 논쟁을 하더라도 결국 끝에는 명상으로 갑니다. 마음에서 반야의 실천을 하는 것이 출가입니다. 마하반야는 본래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인류 최초의 종교는 명상입니다. 나란 집착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에 본래의 나를 볼 수 있고, 열반의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입춘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쌀쌀한 날씨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진정 피부로 느껴지는 봄이 오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 마음속에서도 진정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느껴가기를 바란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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