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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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정진하는 삶을 살자
오늘은 열반경의 요지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했던 유교경을 중심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열반을 범어로는 니르바나(Nirvana)라고 합니다. 본뜻은 취멸(吹滅)이라고 해서 '불어서 끈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불을 끄는가!
마음의 불.
탐욕심의 불을 끄고, 노여움의 불을 끄고, 어리석음의 불을 끄는 그래서 우리가 마음의 불꽃이 타고 있는 것은 그런 어리석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타오르는 불꽃이 완전히 꺼진 상태가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경의 첫 번째는 법신불멸(法身不滅) 사상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몸인 불신이 색신이 아니라 진리 자체인 법신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하지요.
우주 자연 속에 항상 머물고 계시다는 불신상주. 부처님께서는 불멸성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수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상주함으로써 우리가 한량없는 부처님이라는 뜻의 무량수불이라 합니다.
열반경에 보면 세가지 법으로 이루어진 법신-반야-해탈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법신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때와 장소의 제약을 초월하여 항상 존재하는 즉, 우주의 진리와 이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지혜가 바로 반야입니다.
몸(色身)이 아니라 법신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가 반야이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얻은 자유의 경지가 해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가지 법으로 이루어진 법신과 반야와 해탈이 상호간에 의지해서 각자의 의를 완성한 것이 열반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부처님의 본질인 대열반을 법신과 반야와 해탈의 그 셋의 내용으로 본다면 부처님은 지(地)-수(水)-화(火)-풍(風) 4대로 흩어지는 무상한 육신이 아니기 때문에 법신은 항상 상주(常住)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2548년 전에 불멸하셨지만 우리가 불교를 믿고 따르는 것은 항상 사주하는 법신불입니다.
그래서 해탈은 고통을 벗어났기 때문에 즐거울 락(樂)자를 써서 즐거움이라하고, 반야는 지혜를 뜻함으로 무지와 무명에 속박되는 우주법계가 하나가 되는 절대 자유의 대양이고, '나'라고 하는 것은 번뇌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청정하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사덕(涕槃四德)은 항상 상(常), 즐거울 락(樂), 나 아(我), 깨끗할 정(?), 상락아정(常樂我?) 이라고 합니다.
열반의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항상하고 즐겁고, 진정한 '나' 입니다.
진정한 '나' 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열반에 들지 못하는 중생이기 때문에 항상 변화하고 나이가 들고, 병이 오고, 늙습니다.
'열반에 들었다'함은 상락아정(常樂我?)의 열반사덕(涕槃四德)을 두루 갖춘 것을 말합니다.
'나는 곧 부처이다'는 부처라는 뜻이고, '항상한다' 함은 법신이고, 즐거움이라는 것은 열반이고, 깨끗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법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 영원한 진리를 맛보려면 상락아정(常樂我?)을 바르게 보고 느낄 줄 알아야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열반은 눈이나 귀나 코, 혀, 몸으로 식별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서 깨달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신불멸 사상이 바로 열반이다 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有佛?)사상 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체를 함부로 죽이거나 헤치면 안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우리가 하고 있는 방생법회의 의미가 생명 살리기 운동입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有佛?) 사상은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는 내용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위에 계신 부처님이 깨달은 중생이라면, 지금 앞에 있는 우리 불자들은 깨닫지 못한 부처라는 것이죠.
무엇을 못 깨달았다는 것인가요? 마음을 맑고 청정하게 갖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망상이 항상 일어나고 많은 업을 짓고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법신불이기 때문에 법신불멸(法身不滅) 사상을 생각하고 두 번째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有佛?)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즉, '당신은 부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대인 관계도 원만하게 하며, 살아있는 생명체나 축생들까지도 함부로 업신여기거나 헤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생이기에 많은 오류를 범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살생의 업을 소멸할 수 있는 방생이라는 의식에 참여하고 서원을 세우고 자기의 소멸함으로서 잘못을 만회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천제불성(闡提佛?)사상입니다.
천제불성사상은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불성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에 의해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어리석고 모자라는 천치라 하더라도 성불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고 아주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부처가 되겠다는 착한 마음을 일으키고 정말 마음으로부터 참회하면 갱생하여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축생도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과 똑같습니다.
육도중생(六道衆生)이라 하지요.
우리가 이사 다녀야 할 곳이 6섯 곳인데 그곳이 바로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극락세계입니다.
수라(修羅)는 아까 이야기 한 대로 자기 정신이 아닌 상태,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음에도 사람의 구실을 못하는 상태를 수라(修羅)라고 하는데 그런 것까지, 축생이라 할지라도 육도 중생은 부처를 이룰 수 있는데 자기의 업에 의해서 축생이 되고 수라-아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가장 깨닫기가 쉬운 것이 사람이라고 하니까 여러분들 사람 몸 받았을 때 부처를 이뤄야 합니다.
불신불멸(佛身不滅)사상과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有佛?)사상을 마음에 새기면서 내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나는 부처다. 내가 노력하면 이루어 질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갖는 것이 오늘 2548년 갑신년 열반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일대시교( 一代時敎)가 다 유교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아서 45년 동안 설법한 것을 일대시교( 一代時敎)라 합니다.
유교경에 모든 중생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하는 방향을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많은 경전이 있는 데 팔만대장경을 중심으로 해서 인천인과교(人?因果敎)를 먼저 설했고 소승교를 설하고 대승시교(?乘?敎)를 설하시고, 그리고 말년에 대승경전인 법화경을 설하고, 또 임종이 가까워질 무렵 열반경을 설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 사라쌍수나무 사이에 누워서 열반에 들려고 하니 모든 제자들이 슬퍼했겠지요.
그때 아나율존자가 아난존자에게 "우리가 이렇게 슬퍼 할 때가 아니다. 슬픔을 거두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지를 여쭈어야 된다."하면서 시작된 것이 유교경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가야 될 것인가와 부처님의 당부말씀을 해달라고 부처님 시봉 제자인 아난존자를 통해서 부처님께 청을 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 수행정진해야 됩니까?"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이계위사(以戒爲師). 계법을 스승으로 삼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시지만 부처님의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 중생이기 때문에 많은 오류를 범할 때 부처님께서 그때마다 이야기하신 것을 제자들이 모은 것이 계법입니다.
'계법을 스승으로 삼아라' 했던 내용 중에서 삼취정계(三聚?戒)라고 있습니다.
소승계에서의 지지계(止持戒)는 '이것은 하지말라.' 이고 대승계에서의 작지계(作持戒)는 '무엇무엇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살생하지 말라는 지지계이고, 방생이나 죽어 가는 목숨을 살려라 하는 것은 작지계입니다.
그래서 대승사상에서는 복 짓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않됩니다. 우리가 항상 좋은일에 앞장서는 것이 작지계입니다. 좋은 공덕을 지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삼취정계(三聚?戒) 중 세 번째는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 중생을 이익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철 종정스님의 교시가 이익중생(利益衆生)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삶을 살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와서 복은 못 짖는다 하더라도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주거나 하는 일은 철저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은 못 짓는다 하더라도 불교를 알고 부터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라는 것의 확신을 가지고 공덕 짓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가진 것이 없어서 공덕을 못 짓는다 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는 해야 됩니다.
제가 지난 정초 섣달 관음재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삶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해를 살아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삼취정계(三聚?戒)는
지지계(止持戒) '하지말라.'
섭율의계(攝律義戒) '계율을 지켜라.',
섭선법계(攝善法戒) '착한 일을 해라.' 그것이 작지계(作持戒)이고,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삶이 삼취정계(三聚?戒)입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마음이 신구의(身口義) 삼업(三業)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월 달이 되면 전국에서 보살계를 설하지요.
십중대계(十重?戒)와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 재가 오계(五戒), 십선계(十善戒) 등등이 전부 우리 신구의 삼업만 청정하게 하고, 이것을 통틀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섭율의계(攝律義戒) '계율을 지켜라.', 섭선법계(攝善法戒) '착한 일을 해라.',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 중생에게 이익이라는 것은 사람만이 중생이 아니고 육도중생 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첫 번째 말씀이 '계법을 스승으로 삼아라.' 했습니다.
두 번째는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수행 목표의 과정을 밟아야 합니까?'
사념처관(四念處觀) 아시지요? 즉, 생각을 항상 거기에 관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신념처관(身念處觀) 입니다. 몸은 항상 부정한 것으로 관(觀) 해야 한다.
이 몸뚱이는 내가 아닙니다.
내가 다라고 한다면 정말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지요.
그러니까 항상 몸은 부정한 것으로 관하고,
두 번째는 수념처관(受念處觀)입니다.
우리가 받아지는 감각 생활은 괴로운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 예쁜 꽃, 좋은 향기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지요.
이 서울이라는 곳이 환경이 오염되어서 일조량이 하루에 4시간~5시간 밖에 안된다하고, 환경이 오염되어서 공기가 나빠지니까 서울 사람들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다고 하지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는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 일도 많거든요. 그래서 감각생활은 괴로운 것이다.
세 번째가 심념처관(心念處觀)은 무상한 것입니다.
마음이 아침에 먹었던 마음이 저녁에 바뀌기도 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네 번째가 법념처관(法念處觀)은 일체 환경은 무(無하)다
법념처관은 일체 환경은 무(無) 하다. 내가 없다.
진정 내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 것을 수행목표 과정으로 삼아라 그것을 바꿔서 이야기하면 사념주(四念住)를 관(觀)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말씀하셨던 경전 첫머리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여시아문(?是我聞)"
여러분 금강경 많이 독송하고 계시죠?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獸園) 기원정사에서 천이백오십인 제자를 앞에 놓고 경을 설했다. 이렇게 시작하고 아미타경도 여시아문(?是我聞)으로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들었다.' 부처님 제자들이 맘대로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장소에서 어느 때, 어떤 대중과 함께 부처님에게 들었노라 하는 것은 확실하게 경전의 신빙성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이천육백년이나 지난 이 시대에도 그때 당시를 보지 않았더라도 부처님께서 어느 때, 어느 대중과 함께 이 경을 설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원정사에 가보면 부처님께서 앉아서 경을 설했던 금강보좌가 있고 넓은 광장에 천이백오십인의 대중과 같이 금강반야경을 22년 동안 그곳에서 설하시지요.
아미타경도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 새들까지도 와서 같이 들었다. 라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확실하게 신빙성을 가져오는 경전 첫머리를 그렇게 시작하라.' 이렇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역시 지금도 너무 악덕한 사람들이 많아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상황을 우리는 보고, '저 사람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왜 그럴까?'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구제불능인 못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차익과 같은 육근 비구가 있었습니다.
악덕비구를 부처님도 어떻게 하지를 못했는데 그게 걱정이 되니까 아난존자가 "차익과 같은 악덕비구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합니까?"
부처님도 제도를 못해서 그렇게 악덕한 상황으로 끊임없이 가고 있었습니다.
묵빈대처(默檳對處)!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탓하지 말라.'
그래서 소승경전에서는 삼불능(三不能)이라고 합니다. 능히 세가지를 하지 못한다.
인연 없는 중생 제도 못하고, 자기가 지은 업은 면할 수 없고, 인연없는 중생은 성불 못시킨다 하는 내용이 있거든요.
부처님도 어느날 깨달아서 설법하고 있는데 날카로운 송곳이 엉덩이를 자꾸 3번이나 찔러서 '이것이 나를 왜 이렇게 아프게 하나.' 하고 관해보니까.
전생에 옷을 벗어서 빨래를 하려고 보니까 이가 있어요. 그래서 바늘로 콕콕 찔러서 죽여서 그 과보로 아픔이 왔다 하는 내용이 있거든요.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지은 업은 비켜 갈 수가 없다 하는 것이 소승경전의 내용이고, 대승은 더 크게 열심히 수행을 하면 자력으로도 업장소멸 될 수 있지요.
앞에서 얘기 한 것과 같이
평소에 수행목표를 사념처관 하라.
경전 첫머리를 여시아문으로 하라.
악덕비구에게는 묵빈대처(默檳對處) 하라.
첫 번째부터 세 번째 까지는 평소에도 많이 말씀을 하셨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계법을 스승으로 삼아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윤리 도덕을 지키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불자로서 살아가는 길입니다.
항상 부끄럽지 않게 정정당당하게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서옹스님께서 하셨던 참사람 운동, 제가 이야기하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적어도 부처를 이루기 전에 먼저 참사람,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지 진실하지 않고 어떻게 부처를 이루겠습니까.
그리고 유교경에 부처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음식, 의복, 탕약, 거처에 대해서 너무 많이 구하지 말라.' 누적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한테는 계율에 삼의 옷은 세벌, 일발 발우는 하나, 발우 하나면 밥을 먹을 수 있고 옷 세벌은 어떤 것이냐면 여름 옷, 겨울옷, 봄/가을 옷, 원칙이 삼의일발 입니다.
그런데 나도 장삼이 3개나 되니 고민이 되요. 저도 옷이 많아서 '부처님 법에 어긋나게 살아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세속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너무 많은 것을 쌓아 놓지 마시고 또, 유행이 지나서 이것은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된다면 한 곳에 모아놓으세요.
저쪽 몽골에 가면 한국에서 가지고 간 온 헌옷을 고맙게 잘 입는다고 합니다.
제가 6월달에 몽골에 갈지 모르니까 다음에 제가 걷어 보라고 할테니까 잘 모아두세요.
필요한 사람들 주면 되지요. 그런 것들이 아까 이야기 한데로 많이 구하지 말라. 몸뚱이가 있는 한 옷도 걸쳐야 되고 겨울이면 따뜻하게 입기도 해야 하지만 너무 많이 축적하지 말라 물질에다가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뉴스에서 들으니 우리나라 성인 4~50대의 비만이 50%이고 정상이 50%이고, 북한은 남자들 평균키가 1m60cm이 안 된다고 합니다. 못 먹고 굶고 사니까요. 저도 북한에 세번 정도 다녀왔습니다만 남북이 이렇게 차이가 있어서 걱정이 됩니다.
두 번째는 수면을 너무 탐하지 말라. 잠을 너무 많이 자지 말라.
입시 공부하는 학생들이 3시간 자면 합격이고 4시간 자면 불합격이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공부장애가 수마거든요. 좌선 할 때 눈은 코끝을 보고 눈은 반쯤 감고 있어야 하고 그냥 안 움직이고 있으면 졸기 쉽지요. 오늘은 날씨가 추워서 그렇지 않지만 6월정도 되면 조는 사람도 있을 꺼예요.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고 있는데 아나율존자가 졸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대중 앞에서 창피를 줬어요.
"너는 도대체 여기에 수행하러 왔느냐 잠자러 왔느냐." 이렇게 창피를 주니까 거기서 아나율존자가 작심을 하고 그때부터 눈을 감질 않는 거예요.
눈은 감아줘야 눈에게 양식이 되는 거거든요.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눈이 충혈되고 아파서 결국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나율존자가 부처님께 충격을 받아서 '내가 성불을 할 때까지는 절대로 눈을 감지 않겠다.' 결심을 합니다.
그때부터 부처님께서 하지말라 하는 것은 철저히 계율을 지켜서 계율제일 아나율존자가 된겁니다.
인도는 가사하나면 몸을 다 가릴 수 있으니까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천 조각을 모아서 기워 입는데요.
하루는 아나율존자가 가사를 꿰매려고 바늘귀에 실을 매야 하는데 이걸 못하는 거예요.
사람이 누군지 보이지 않으니까 "나한테 이 바늘귀를 끼워서 복을 지을 사람 없느냐."고 소리를 쳤어요.
그때 부처님이 지나가다가 "내가 끼워주겠다."고 하니까 아나율존자가 "부처님같이 수승한 분이 무슨 복을 더 지으려고 하시는지요. 부처님이시여 다른 사람이 복을 지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나는 더 복을 많이 지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일화가 있습니다.
잠은 적당히 자야지 허리가 아플 정도로 너무 많이 자면 수행하는데 지장이 있습니다.
저희는 잠자는 시간이 공식적으로는 6시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24시간 중에 평균 8시간 자고, 8시간 일하고, 8시간 쉬는 시간으로 되어 있는데요. 스님들은 원칙적으로 9시에 자고 3시에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절은 조금 바꿔서 10시에 자고 4시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저도 전주 송광사에서 10시에 자고 4시에 일어나는 걸로 합니다. 6시간 자면 충분합니다. 자고 있는 시간은 죽어있는 시간입니다. 수마에 끄달리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성질내지 말라.
진심을 내는 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않되는 것은 자기 업이라 생각하고 자기에게 돌려야 하는데 무조건 내 뜻대로 되기만을 바라다보니까 이뤄지지 않을 때 성질 내고, 성질 내는 것은 상대를 업신여기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부처인 줄 모르고 남편한테 자식한테 아내한테 함부로 성질을 내는 것은 불자로써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지요. 스스로 공덕을 잃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할절신체(割截身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가리왕이 부처님의 팔을 그냥 끊어 버렸으면 괜찮았을 텐데 칼로 갈기갈기 찢어 내도 부처님은 무아지경으로 들어가서 참아야 겠다는 생각도 없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부처와 멀기만 하지요. 상처내지 않고 실수로 발이라도 밟으면 바로 화를 내잖아요.
마음을 거두어 성내지 않고, 악한 말을 하지 않고 참는 것이 우리가 덕을 쌓는 것이고 조금은 화가 나더라도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면 화를 내지 않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네 번째 '교만하지 말라.' 했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아상(我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편애심을 내면, 배울 생각이 전혀 없는 겁니다.
법문 듣는데 어렵다 하면서 편애심을 내지 말라.
반발심을 내지 말라 들은 이야기 또 해도 여러분 실천을 못하잖아요.
항상 하심(下心)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이 있으면 죽지 않는 법이 있을 것이다.'라는 걸 느끼고 부처님께서 죽지 않는 법을 터득했잖아요. 거기에 이르는 길은 고통이 사라진 해탈-열반의 세계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고멸도적성제(苦滅道跡聖諦)라.
고통을 멸하고 도를 이루는 길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는 되는 진리의 길은 팔정도를 닦아야 합니다.
팔정도에는 정견(正見)은 바른 견해입니다.
정견 하나만 바르게 가지면 나머지 계(戒) 7개는 잘 지키게 됩니다.
정사유(正??) 항상 바른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참선을 할 적에도 바른 생각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정어(正語) 항상 바른 말, 고운 말을 해야 합니다.
정업(正業) 바른 행동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정명(正命) 바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을 해도 헛수고인 노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정념(正念) 바른 기억, 정정(正定) 바른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말씀에 어진 의원과 같고, 어진 길잡이와 같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성제를 말씀하시고 다시 의심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물어보라 했습니다.
45년동안 설법하시고, 유교경을 설하시고, 제자들이 걱정이 되니 악덕 차익과 같은 비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까지 다 물어 보고 부처님께서 당부도 하셨기에 때문에 제자들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말씀이 생자필멸 회자정리(生者必滅 會者定離)라.
태어나는 생명이 있는 자는 반드시 멸하고, 만나는 자는 반드시 헤어집니다.
자리이타를 다 구족해서 모든 중생들이 8만4천 번뇌가 있어서 8만4천 법문을 설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모든 제자가 나의 가르침대로 수행한다면 나의 법신이 상주하여 영원히 멸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말씀을 남기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출가 - 열반재일을 정진주간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야 된다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 하는 일마다 성취하시고 날마다 좋은 일 있으시길 바라면서 오늘 법문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성불 하십시요.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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