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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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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인을 위한 동안거 ~ 열두번째

  • 입력 2004.02.27
  • 수정 2024.11.22

머나먼 제주에서 바다를 건너 도심의 한복판, 이 곳 조계사까지 우리 재가자들을 위한 법문을 해주시기 위하여 대효스님께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신 뜻 깊은 강의시간이다.

 

"수행을 한다든지, 절을 찾는다는지, 직장을 다닌다든지, 가정을 가진다든지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입니까? 그건 간단합니다.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잘 산다는 것은 행복한 것을 말합니다.  궁극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종교를 찾는 사람들이 세속에서 필요한 것을 구하려고 하는데 종교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으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따로 구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세속에서 해결 못한 것을 법당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왜 행복에 목말라 하는가? 그것은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불행한가?  미리부터 불행을 예감하고 행복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오랜 시간 동안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들의 습성이 관습적으로 흘러왔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잘잘못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삶을 살며 이 땅에 사람이 생겨난 이후부터 왜 그러한지 밝히지 않고 살아온 것입니다.  불행한 근원은 생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왔다는 것, 그 순간부터 불행의 시작입니다.  무릇 동물들은 태어나 어미로부터 자립하는 기간이 며칠에서 몇 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 자립하기까지는 20여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 그러한 생활환경 속에서 살기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그런 삶 속에서 무언가 어떠한 형상이 그렇게 있다가 사라지는 것은, 깨고 나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 삶입니다.  순간적으로 있는 것 같으면서 없는 것, 바로 이 순간적으로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순간적인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며 그러한 삶의 생명은 순간입니다.  이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들여다보면 없는 이 목숨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죽지 않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태어남의 시작이 죽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은 벌판에 등잔불을 넓은 광야에 켜 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약한 존재를, 미약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 시기와 질투가 생겨나게 됩니다.  시기와 질투를 하는 이들을 위한 연민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탐심을 내고, 탐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 인간의 근본이 약하기 때문이며  인간에 있어서 나고 죽는 것은 근원적인 문제라고 하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리, 바로 불교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참선은 불교이며 불교의 참뜻은 참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어렵게 생각하지만, 참선은 간단하고 쉽습니다.  마음을 바로 쓰는 것이 참선입니다.  참선을 하게 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밝아집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음을 바로 쓰는 그 곳에 어찌 근심이, 불행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하므로 세상이 달라져 보이게 되므로 세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종교, 모든 철학이, 그 어떤 사상이 나고 죽는 것을 다룬 사상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십시오.  유독, 불교만이 이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말하고 있으며 그 해답 역시 불교에 있습니다.  죽음을 회피하지 말고 당당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 내면에 무엇이 잠재되어 있는지를 모르고 의식하지 못하지만 내면에는 모든 것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내재되어 있는 자신의 의식을 개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안한 존재로 있기 때문에 편안해지려 하는데 그 편안함을 영구적으로 영위해 주는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영원히 해결하는 것, 이것은 바로 이승뿐 아니라 저승까지 해결하는 것입니다.  찰나 찰나에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라는 것은 벌써 지금의 나가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는 것이 무아이고, 이것이 공이며 또한 이것이 중도이며 연기입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공과 연기, 중도로 표현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한 존재를 바로 알 때에 번뇌가 수그러듭니다.  근원은 무엇인가? 이는 뿌리입니다.  모든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목숨에 대해서 번뇌가 없을 때에 지혜가 생깁니다.  내 자신이 이 세상을 문제거리가 있는 세상으로 만들고 사는 것입니다.  나고 죽음을 외면한 결과이며 이러한 것을 해결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나고 죽음의 문제에 대한 것이 생활화가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을 반듯하게 올려놓기 위해서 어떠한 것이 필요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이는 곧 나란 존재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일념으로 모든 것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일념으로 하면 됩니다.  근원을 제거하면 오온의 입장에서 모든 것이 보이게 됩니다.  목숨의 실상을 바로 이해할 때, 진실함이 아님을 알았을 때에 진리를 알겠다고 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이 마음공부는 살벌한 현실과 현장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의지해야 할 곳에 의지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에 의지하면 공허해집니다."

 

또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과 그러한 삶은 불행을 초래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마음을 빼앗기며 사는 것은 결국 필요 없는 것을 부정한다는 의미이며 현실이 외면된다는 것이다.  마음을 바로 쓸 때에 참회를 천 배, 만 배를 하는 것보다 더한 공덕이 있다고 하셨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는 마음 속에 가족을 위한, 누군가를 위한, 무언가를 위한 그러한 마음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한 계산된 마음이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내 생활 속에서 순화를 시켜야 합니다.  참선은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의 일념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한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하며 이렇게 계산되지 않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지루하지 않게 비유를 들어가며 법문을 해주신 스님의 재치가 한층 더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경쟁사회에서 일에, 환경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현실적 문제인가?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불심을 놓지 말고 마음의 여유를 찾아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는 스님의 소중한 법문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단비가 되어 항상 고여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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