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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인을 위한 동안거 ~ 열세번째 이야기

  • 입력 2004.02.24
  • 수정 2024.11.22

제주의 원명선원에 계신 대효스님께서 지난주에 이어서 생활인을 위한 참선법을 강의하셨다.

 

“오늘이 생활 선의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째 시간은 미산스님께서 이론을 하셨고 이제 생활 선을 실제로 하는 말씀을 드리겠는데 먼저 하기 전에 생활선이라 하니까 본격적인 선을 하기 전에 하는 선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생활선이라 하면 박사과정을 마친 이후에 적용하는 과정입니다. 기초를 닦고 마스터해서 박사학위까지 끝난 상태와 같으며 연구 과정까지 끝나고 나서 적용을 하는 단계입니다.  생활에서 선을 할 정도가 되면 최고의 부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활선을 한 후에 또 다른 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지금 배우는 게 바로 불교 팔만대장경을 전부 핵심만을 하는 것으로 나온 거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생활 선을 낮은 단계로 보지 마시길 바랍니다.  생활에서 선을 할 정도, 생활에서 수행을 할 정도면 최후의 단계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시간에도 참선법을 말씀드리는데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지난 번 강의가 너무 쉽다고 하는데 제가 쉽게 말해서 쉬운 것이지, 수준이 낮아서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백번이고 천 번이고 잘 들어서 그 뜻에 들어가게 되면 불교의 이것저것을 헤맬 필요가 없는 지름길로 가는 길로서 이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스르지 않고 오르는 것이 순리이며 거슬러서 하는 일들은 기운을 소모시키는 일이다.  순리적으로, 흐름을 타는 것이 순리라고 하시면서 깨닫는 것은 순리적으로 사는 것으로서 그 출발이 출가라고 한다.  불교를 만나고 불법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편하고 순리적으로 사는 이치를 얻는 것인데  범부들은 순리를 거스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순리라는 흐름, 일관된 흐름이 있으며 그 일관된 흐름을 불법, 즉 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법을 알려고 하는 것은 법을 알아서 그 법대로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나라는 존재와 이 세상과는 나누어지지 않은 것인데 나고 사는 것은 분별해서이다.  분별하지 않으면 나누어지지 않은 것인데 나누는 것, 그것은 거스르고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누는 것은 의식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을 때까지 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몸만을 위해서 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분별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 법에 의해서 사는 것이 순리, 원리이며 이 법에 의해서 살려면 법에 의지해야 합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은 단계가 낮은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믿고 법에 의지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먼저 가셨지만, 부처님은 법에 의해서 되신 것입니다.  부처님과 법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면 부처님이 계셔서 설법하니까 법이 생긴 것으로 아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부처님 역시도 법에 의해서 깨달았고 법에 의해서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계시기 전부터 법의 원리가 있었는데 이것이 연기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모아지고 흩어지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찰나 찰나에 모이면서 흩어집니다.  연기는 모이고 흩어지는 관계입니다. 모이는 그 순간에도 흩어짐이 같이 행해집니다.

 

팔만대장경을 다 알아도 불교의 핵심인 연기를 모르면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됩니다.  연기를 바탕으로 해서 불교가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모으고 흩어지는 과정 속에서 중심이 되는 실체가 되는 것은 무아입니다.  연기를 바로 알면 그 나머지는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성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명성에 잘 속고 삽니다.  명성에 걸맞지 않게 명성이 나고 나서도 고개 숙여 물을 수 있는 것은 지식인이 아닌 성자입니다. 이름이 났어도, 많이 알아도 묻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깊이 알 수 있는, 깊이 알아야 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면 겸손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해 지는 것이 아는 것보다 어떠한 직책의 장으로서의 위치보다 더 비중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연기를 알면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무조건 지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지켜서 지켜질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안 될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은 무모하며 이것이 무지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적이 아니라 무지가 적이고 원수인 것입니다.  무지의 반대는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어질 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깨달은 분은 마음을 자유자재로 쓰는 분을 깨달았다 합니다. 걸림 없이 마음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은 깨달아서가 아니라 마음을 그렇게 써서 깨달은 것입니다.  깨닫는 마음을 쓰는 사람이 빨리 깨닫게 됩니다.  단정하는 마음은 바람직한 마음이 아닙니다. 단정이란 무엇인가를 있다, 없다, 맞다, 그르다 등을 분별하여 단정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그런 마음을 쓰지 않았으며 그런 마음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음에 어긋나는 마음을 쓰고 살아갑니다.  법을 들을 때에 제일 깨닫기가 쉽습니다.  과거 깨달은 분들을 보면 법을 듣거나 법을 보이거나 할 때 많이 깨달았습니다.  머리로 기억을 잘 하는 것은 천재가 잘 하지만, 깨닫는 것은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법을 들을 때에 기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알려고 할 때입니다.  법문을 듣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참선의 극치입니다.  깨달은 스님들은 법문을 듣거나 보면서 깨달은 분이 많습니다.  깨달음에 있어서 모르는 것은 단정 짓지 말고 알아보려고 해야 합니다.

 

행위에는 마음의 행위와 몸으로 하는 행위도 있습니다.  단정 짓는 것은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은 무한한데 단정 지어버리는 것은 억압입니다.  우리가 법을 들을 때에 법을 듣는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합니다.  법에 의지하게 되면 가슴이 열리게 될 뿐 아니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므로 자신의 생활에 법이 중심이 됩니다.  또한 자기 위주로 사는 이기적인 마음이 저절로 세척이 됩니다.  욕망 등 이러한 것을 세척하고 정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못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입니다.  테크닉으로 접근한 사람은 인생을 테크닉으로만 살아갑니다.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은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장애가 없으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면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모른 채 외면하고 넘어가는 삶을 사는 동안 어떤 체질이 되었나 하면 나약해지고 의지력이 없어져서 쉽게 포기합니다.  또한 이기적으로 변합니다.  개인이기, 집단이기가 성행하게 됩니다.  그러한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듭니다.  생각할 수 없는 이 풍토 자체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실현할 수 없게 합니다.  사는 동안 자아의식이 자리 잡고 생각을 많이 했던 것이 사유로 연결됩니다.

 

어려움을 벗어나려고 명상,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여 해결하려 합니다. 이제 불교를 만났으니 그러한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참선입니다.  절이나 염불, 주력은 말하자면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업을 만드는 것입니다.  참선이란 무엇이냐 하면 말 듣다가 깨닫는 것입니다.  집착과 고정관념이 배어 있어서 근원적인 것을 치료해야 합니다.  불교 문을 두드린 사람은 이 법이 자기 자신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정리를 해야 합니다.  정리하겠다는 그 목표 하나만으로도 꿈, 기대, 고통 등 많은 것들이 정리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간화선은 화두를 들고 하는 뛰어난 참선입니다.  간화선 이전부터 말 듣고 깨달아 왔습니다.  불법의 적적대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도 간화선 이전에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알려고 항상 귀 기울여야 합니다. 화두는 저절로 의심이 나야 하는 것이지, 하려고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무심삼매입니다.  무심삼매란 무심의 마음으로서 어떻게 쓰는 마음이 무심인가? 이는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심이 분별인데 이는 어디서 오는 것이냐?  나와 너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이는 그러하지 않은데 제대로 못 깨달은 이는 마음을 바로 쓰지 않습니다.  깨달은 마음을 쓰는 사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못 깨달았기 때문에 깨달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내가 깨달아 있기 때문에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 있는 겁니다. 깨달아 있기 때문에 깨달은 마음을 쓸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 마음을 쓰지 않으려고 거부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제가 새벽에 깨닫고 보니 어제도 깨달아 있었고, 작년, 십년 전, 전생, 무량겁 전에도 이미 깨달아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본래 깨달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아 있었던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늘 새벽에 내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며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새벽에 깨닫지 못했다면 그 이전부터 깨달아 있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깨달은 마음을 쓰는 것이 깨닫지 못한 마음을 쓰는 것보다 훨씬 수월합니다.  부처님을 대상으로 생각하여 절을 하고 염불을 하는데 이러한 것도 부처님과 나를 나누는데 이것 역시도 분별입니다.  부처님, 관세음보살을 나눌 것이 아니라 자성관을 가져야 합니다. 

 

자성이 극락, 미타이며 자성이 부처라고 생각하는데, 극락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성을 보아야 합니다.  극락세계가 있다는 것을 방편으로만 삼아야 합니다.

무심의 마음이란 아까도 말했듯이 나누지 않는 마음입니다.  양변을 여의는 것입니다. 이 무심이 산골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되어야 합니다.  무심에 이르는 길은 나누지 않는 것이며 나누지 않기 때문에 초월하게 됩니다.  불교가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깨달을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육조스님께서는 나무꾼이 되어 나무 팔러 갔다가 깨달으신 분입니다.  이 분이 왜 쉽게 깨달았나 하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제일 방해가 되는 것이 단정병입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를 단정 짓지 않으므로 더 빨리 깨달으신 겁니다.  글씨는 모르나 말은 들리므로 깨달을 수 있었고, 그만큼 지식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순수함과 있는 그대로 믿는 마음이 있어야 만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깨달음이 와도 담을 그릇이 되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는 이도 있습니다. 

 

수행을 함에 있어서 어려운 것부터 하여 좌절하지 말고 쉬운 것부터 실행을 해서 길을 잘 가야 합니다. 가시밭길,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로 가야 자신도 모르게 달라집니다.  나누지 않는 마음으로 평온과 안정을 유지해 갈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경지를 알고 나서 자신을 정리할 수 있게 됩니다.

 

참선은 핵심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길로서 업을 짓지 않습니다.  절, 주력, 염불 등방편으로 가는 것은 업을 짓게 합니다.  불교의 핵심인 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연기, 중도, 공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됩니다."

 

이렇듯 3회에 걸친 참선 수행법에 관한 이론과 실제로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생활선의 강의가 모두 끝났다.  각자의 삶과 생활에 맞게 참선을 실참해 보면서 현재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리고 있는 간화선 중흥을 위한 전국 선원장 초청대법회에 참석하여 법문을 들어보는 것도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리라 여겨진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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