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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스님 인터뷰 |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앞두고

  • 입력 2004.03.02
  • 수정 2024.11.23

도법(전 실상사 주지)스님과 수경(불교환경연대 대표)스님의 ‘생명평화 탁발순례’가 3월 1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시작을 고하는 기도로 대장정의 막을 올렸다.

스스로 평화의 존재가 되어 우리 모두의 삶터를 평화롭게 가꾸며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시작된 두 스님의 탁발순례는 하루 평균 12㎞, 3년간 1만2000㎞를 걸으며 전국 일원에서 진행된다.

 

 

지난 2월 28일 토요일 오후, 도법스님은 조계사에서 열린 인드라 공동체 정기 총회에 참석하고 계셨다. 오후 7시에 끝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회의는 7시가 훨씬 넘어서 끝이 났다. 시간이 없어 다음 행선지로 향하시는 스님을 따라 택시를 타고 가면서 인터뷰는 진행되었다. ‘우문현답’ 이라는 네 단어가 자꾸 떠올랐다.

 

 

'탁발순례'는 무한한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것 

 

3월 2일부터 탁발순례 떠나시는데 3년이나 걸리신다면서요?

 

도법스님 : 글쎄요. 3년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잘 모르구요. 생명평화, 삶의 문화를 가꾸기 위한 대중운동이니까 기간은 단언적으로 얘기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문화를 가꾼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세부계획들이 있으신가요?

 

도법스님 : 전쟁, 평화 얘기하면 정치권력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와 국가의 충돌, 이런 것만 생각하잖아요. 사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예를 들어서, 통일신라시대에는 우리가 평화롭게 살았을까, 나라가 분단되지 않았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았을까 짚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그런가 하면 또 우리가 겪었던 임진왜란이라든가 일제 36년 외에 전쟁이 없었을 때, 독립 국가로 있었을 때 우리 국민의 삶이 평화로웠을까, 이런 걸 짚어보면 실제 일상적으로 평화로운 삶을 이룬 적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평화의 얘기도 추상적으로, 권력 세력간의 싸움이 없는 상태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평화로울 수 있도록, 또는 너와 나의 관계가 평화로울 수 있도록, 일상적 사고, 언어, 행동, 이런 삶 자체가 평화를 내용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모색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차원에서 생명이 안전하고 건강할 수 있도록, 또 우리 삶이 평화로울 수 있도록 하는 평화의 삶의 문화를 가꾸는 운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상적 삶의 문화로 형성되어질 때 이런 힘에 의해서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도 해소되어질 수 있고 인류가 염원하는 한반도 평화, 지구촌의 평화도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구체적인 바닥에서 그런 흐름들을 형성해 보자 하는 것이 지리산 평화결사 운동이고, 이 단체에서 구체적으로 하는 행동이 생명 순례, 탁발 순례입니다.

 

내용적으로는 주로 사람을 만나는 거죠. 우리가 직접 두 발로 걸어간다고 하는 것은 사사로운 욕심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전 존재를 바쳐서 지극정성으로 참되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두 발로 걸어서, 현장에 가서는 그 지역의 대중들과 만나서 물질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기 중심의 이기성, 또는 상대에 대한 배타성, 이런 부분들을 정화시켜내고 비워냄을 통해서 자기 정화와 자기 향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만남, 대화와 같은 작업을 할 생각입니다.

 

도법스님 내달부터 생명평화 탁발순례

 

실상사 주지직도 내놓아   

 

 

   지리산 실상사를 생명살림의 도량으로 자리잡게 한 도법 스님이 3월부터 생명평화의 탁발순례에 나서기 위해 주지직을 내놓았다. 후임자는 실상사 부주지 소임을 맡아온 종고 스님이며, 7일 실상사에서 이취임식을 연다.

도법 스님은 3월1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탁발순례 발대식을 한 뒤 동족상잔의 비극이 가장 처절했던 구례·하동·산청·함양·남원 등 지리산 일대를 돌고, 이어 해방공간을 피로 물들였던 4·3항쟁의 제주도로 건너가 탁발순례를 한다. 제주도 순례가 끝나면 다시 뭍으로 건너와 전국을 유랑하며 10만인 평화결사 서약을 받을 계획이다. 탁발순례에는 도법 스님의 도반이자, 새만금살리기 삼보일배를 했던 불교환경연대 대표 수경 스님이 함께 한다.

도법 스님은 “생명평화를 구걸하기 위해 관공서·교회·식당·굿당을 돌아다니며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만나겠다”고 말했다. 한편 도법 스님은 지난해 받은 인제인성대상 수상금 2000만원 가운데 세금과 다른 단체 지원금을 제외한 나머지 1700만원을 지리산평화결사에 기부했다.

 

    [한 겨 레] 2004-02-05    

곽병찬 기자 chankb@hani.co.kr

 

 

스님께서는 민중적이고 대중적인 힘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많이 노력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세상이라는 것이 힘있는 자들에 의해서 바뀌는 일이 훨씬 빠르고 그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경향이 많은데, 힘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은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도법스님 : 생명의 안전성와 건강성, 그리고 삶의 평화로움이라고 하는 내용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빈부귀천 누구에게나 반드시 가꾸어 내어야 할 이상과 가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편의 누구를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생명이 안전하고 건강하길 바라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지요.

 

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우리의 삶이 평화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자기 삶의 중심 가치로 삼고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만나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만나서, 바로 생명과 평화에 대해서 새로 눈뜨게 하고 자기 확신을 갖게 하고 정성을 쏟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장대중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현장 대중이라고 하는 것은 꼭 가난한 자나 소외받은 사람을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현장에는 가난한 자, 부자, 남녀노소 누구라도 있을 것입니다. 지역순회 형식으로 되다 보니까 마치 가난한 자나 서민들을 위한 것으로 비쳐지는 데 꼭 그런 것은 아니죠.

 

 

힘있는 자에 대한 말씀을 드린 이유가, 요즘 새만금을 비롯한 환경 문제들이 물론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결국에는 정부 정책 입안자들의 뜻대로 성사되어 버린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도법스님 : 사실은 탁발 순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본인들 자체 속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이끌어 내도록 하는 것이 탁발행위거든요. 자기 자신에게 들어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눈뜨게 하고 활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탁발입니다.

 

대중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첫째는 자기 삶의 주인이 누구일까, 또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일까 라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물었을 때, 바로 그것이 자기 자신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탁발입니다. 내 삶을 행복하게 가꿀 것인가, 불행하게 만들 것인가, 우리 사회를 좋은 사회로 만들 것인가, 험악하게 만들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인데 바로 이 부분을 탁발해 내고자 하는 것이죠.

 

이런 선상에서 보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고 우리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에 주인노릇 제대로 하자는 것이죠. 우리가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면 대통령이나 장관이 제멋대로 하겠어요? 대통령이나 장관은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의 심부름꾼인 셈이에요. 그래서 장관과 대통령과 국회위원들을 제대로 관리하고 제대로 심부름시켜내는 주인으로서 당당한 주인 역할을 할 수 하도록 하는 것을 이끌어 내는 운동인 셈이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의 주인도 나 자신이요, 나의 주인도 나 자신이다. 고로, 주인으로서 책임질 것은 책임지고 역할할 것은 하겠다, 이렇게만 깨어나고 이렇게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아간다면, 대통령도, 장관, 기업인들도 결국은 심부름꾼으로서만 역할을 지키리라고 봅니다. 그들이 심부름꾼을 넘어서서 권력자로서 함부로 한다는 것은 바로 주인들이 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거든요. 이제는 주인으로서 눈뜨고 책임있게 역할을 하자 하는 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운동이 탁발입니다.

 

 

살다 보면 스님과 같은 노력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대다수 입니다. 즉 남들이 이뤄놓은 혜택만을 누리고 살고,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소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노력해서 만들어 놓은 혜택에 편승하는 사람들은 좋은 것이 좋은 거 아니냐 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어렵게 사느냐 하는 식으로 몰아가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분들을 듣도록 할 수 있을까요?

 

도법스님 : 그것은 종교가 제 역할을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이 됩니다. 정치, 사회, 문화는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편리, 명예와 권력을 끊임없이 추구해 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하는 입장인 반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근원적 가치, 종교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만약에 종교가, 불교가 부처님이 뜻한 대로, 기독교가 예수님이 뜻한 대로 그분들이 가졌던 사상과 정신을 구현시키지 위해서 행동한 모습들을 제대로 계승해 낸다면, 사회의 모습이나 내용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갔을 것이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계가 새로 태어나고, 대오각성을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말을 하고 싶네요. 문제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을 제대로 된 길을 가도록 지도해주고 채찍질 해주고 격려해 주어야 할 종교계가 종교계다운 모습과 역할을 하지 못하는 데 1차적인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계는 불교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종교가 부자가 된다고 한다면 이미 그건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부자집단이 종교계입니다. 어떤 종교도 종교의 집단 이기주의로 간다면 그것은 종교 집단이 아닙니다. 지금 종교는 본질에서 너무나 벗어나 있는 셈이죠. 그런 부분에서 종교계가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정직성과 성실성에 토대하지 않은 참선, 그것은 기만입니다

 

 

다시 환경 문제로 넘어가서 질문을 할까 합니다. 도법스님하면 환경과, 공동체 운동으로 유명한 분이지 않습니까?

 

도법스님 : 나는 환경운동가가 아닙니다. 나는 생명살림과 공동체 회복을 21세기의 대안적 삶으로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스님이 하신 말씀 중에 치열하고 근원적인 태도만이 생명도 살리면서 진리를 지킬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치열하고 근원적인 삶의 태도를 지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북한산 문제만 보더라도 정치적으로 흐른 경향이 있고 천성산 구간 공사착공 금지 가처분 최종 심리에서는 10만이 서명을 했는데도 참고인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도법스님 : 불교계가 천만, 이천만이라고 하고, 조계종 스님이 만이천 명이라고 하는데, 북한산 문제나 천성산 문제만 하더라도 불교계에서 스님들 천 명만 평화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으로 뛰어든다면 북한산 문제 해결은 쉽습니다. 문제는 평화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폭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경우가 한번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왜 부처님처럼 하려고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무 대책도 없는 이상주의라고 얘기를 하지만, 마하트마 간디가 비폭력 평화의 방법론으로 인도 독립을 전개해서 결국 극단적이고 첨예한 문제인 인도 독립을 이끌어 냈습니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서 이러한 사례가 있는데, 왜 평화적인 방법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이겁니다. 특히 불교인들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가르쳐준 연기법의 사상과 정신을 가지고 문제를 다루려고 들면, 비폭력 평화의 논리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불교의 핵심이 연기법인데, 연기법의 사상과 정신을 제대로 인식을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비폭력 평화의 방법으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온몸으로 보여 준 것이 부처님이었고. 국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런 사상과 정신 방법론을 적용했던 것이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이었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불교를 하는 사람이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의문을 제기한다면 불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메시지를 상기시켜 주시려고 순례를 떠나시는 건가요?

 

도법스님 : 나는 그런 의도는 없습니다. 그냥 나의 삶을 살아갈 뿐이지요. 부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셨고, 많은 고승들이 그렇게 살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그분들 흉내라고 내보자고 하는 것이 내가 하는 평화운동입니다.

 

 

요즘에 경제가 어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과 불안감에 떨고 있습니다. 이런 중생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도법스님 : ‘꿈 깨’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자가 되어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꿈을 깨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 이기적인 욕망에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과연 부자가 되면 행복할까요? 그건 거짓말입니다. 싸워서 이기면 평화로워진다고 믿고 있는데, 이것도 역사적으로 틀린 것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부자 타령, 승리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가 50년 전 평균 개인소득이 80불이었습니다. 지금은 대충 계산해도 100배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100배는 더 행복해져야 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즉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싸워서 이기면 행복해진다는 걸 봅시다. 미국은 싸워서 다 이겼습니다.

 

그런데 가장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바로 미국 사람들 입니다. 승리했는데 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을까요? 이런 구태의연한 태도로 삶의 문제를 다룬다면 개인도 사회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부분을 제대로 통찰해 내고 또한 풀어낼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모범을 보여줘야 할 부분이 바로 종교계입니다. 그래서 허망된 꿈을 깨고 버리지 않는 한 경제가 아무리 좋아져도 결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꿈을 깨세요.

 

 

어떻게 꿈을 깰 수 있나요? 선을 하면 되나요?

 

도법스님 : 꿈을 깨려면 양심적으로 겸허하게, 성실하게 자기 반성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역사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고, 개인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도 필요합니다. 분명 그렇게 진지한 반성과 성찰을 해보면 내 삶에 어떠한 거품이 끼었는지 알게 됩니다. 어떤 이끼가 내 삶을 혼탁하게 만드는지 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그것이 보이면 거품을 걷어내고 필요한 삶의 부분을 챙기면 삶은 홀가분해지면서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요즘 선 열풍이 불고 있는데, 지난번 참선에 대해서 하신 말씀 중에, 가치관이 바르지 않으면 참선을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보았습니다.

 

도법스님 : 열풍이라고 하는 것, 돈 열풍, 월드컵 열풍 등등… 특히 요즘 명상 열풍, 요가 열풍, 참선 열풍... 그런 것들은 다 전도몽상 현상입니다.

 

 

그래도 안 하는 것 보단 낫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성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칭찬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도법스님 : 그런 열풍들은 불교 집단이 뭔가 그럴듯한 집단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데 쓰는 것이지, 실제로 삶의 내용을 제대로 풀어내는 데는 열풍 형식은 절대 안됩니다. 그것도 거품을 걷어야 합니다. 정직성과 성실성에 토대하지 않은 참선, 그것은 기만입니다. 정직성과 성실성에 기반하지 않은 장사가 기만이듯이.

 

그런데 오늘날 정직성과 성실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참선이 있습니까? 조계사만 예를 들어볼까요? 조계사에서 참선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이 정직하고 성실합니까? 그 사람들이 정직하고 성실하다면 북한에서 굶주리고 있는 동포들의 아픔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의 아픔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옆에서 굶어 죽거나 말거나 남이 절망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나는 고고하게 법당에 앉아서 참선을 한다고 하는 것이 양심적입니까? 과연 양심과 성실을 떠나서 진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양심과 성실에 토대하지 않은 열풍은 또 다른 왜곡이고 혼란입니다.

 

 

요즘 조계사에서는 일요일마다 선사들을 모셔서 법회를 합니다. 대중들의 호응도도 좋아서 일요일마다 몇 천명씩 조계사로 몰리고 있는데요. 이만큼 사람들이 선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자기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고 해서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스님께서는 많이 비판적이시네요?

 

도법스님 : 잘 가꾸어 낸다면야 좋은 현상으로 볼 수 있겠지만 현재 양상으로 봐서 잘 가꾸어낼 수 있는 내용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현상 자체가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현상이 참으로 삶의 문제를 건강하고 바람직하게 희망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도록 가꾸어낼 수 있는 내용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 불교수행

 

그럼 대중들이 현실참여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도법스님 : 이건 현실 참여하고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원효스님은 현실참여를 했고 보리달마는 현실참여를 하지 않았는데, 누가 진짜 입니까?

부처님은 전쟁이 나면 전쟁터에 갔는데, 부처님은 현실 참여를 하신 겁니까? 부처님은 현실 참여자도 아니고 은둔자도 아닙니다. 다만, 불교를 제대로 한 사람이 부처입니다. 불교를 제대로 한다는 것은 중생들의 문제를 제대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싸움터에 가셔야 한다면 싸움터에 갔고, 은둔해야 한다면 은둔했습니다.

 

초점은 중생의 고통, 사회의 문제입니다. 이 고통과 문제를 풀어내는데 어떻게 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그건 상황마다 다릅니다. 배고픈 사람한테는 밥을 주고, 목마른 사람한테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여를 하느냐 안하느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고통을 풀어내는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산에도 가고 시장에도 가는 것이죠. 산에 가 있다고 고매한 것이고 시장에 가 있다고 세속화되었다고 보는 것은 틀린 시각입니다.

 

 

그럼 일반 대중들이 제대로 된 불교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도법스님 : 당장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미워하지 않는 것이 불교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미워할 자를 미워하지 않으면 고통이 가라앉고 문제가 해소됩니다. 이것이 선이고 불교입니다. 눈으로 보면 보는 그 자체에서, 말을 하면 말하는 그 자체에서 미워하지 않고 문제를 다루면 미움으로부터 생기는 고통과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불교는 이렇게 하는 것이지 선방에서 들어가서 하는 것도 아니고 법당에 들어가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신비한 능력으로 불교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화낼 문제가 발생했지만 화내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 것이 도깨비 방망이입니다. 욕심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물건이 있는데 욕심을 내서 취함으로서 고통이 시작된다고 한다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고통과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길입니다. 이렇게 매 순간 순간 매 상황 상황에서 내 관계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불교 수행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 아닙니까?

 

도법스님 : 왜 꼭 참선을 해야 합니까? 참선 안하면 그렇게 못합니까?

지금 당장 누군가 나를 약을 올렸다고 해서 화를 내는 것은 내 인격을 해치는 것이죠? 또한 아무리 상대가 나를 욕했지만 내가 다시 욕을 하면 그 사람은 또 기분 나쁘게 되지요. 고로 내가 미워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욕하지 않는다면 당장 그 문제는 풀립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것이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생활화되고 체질화되어 있는 것이 부처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워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허황된 욕심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노력해서 되는 사람이고 부처님은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지요. 그것은 참선을 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을 가지고 일상생활에 끊임없이 적용시켜 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참선한들 미운 놈 생긴다고 벌컥 화내 버리고,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라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보기로는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더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성질 잘 냅디다. 참선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불교를 잘 모르고 참선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바람이 분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이 제대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 내용을 잘 담아내는 것이 불교계가 해야 할 일인데 지금 불교계가 그 내용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불교계가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까?

 

도법스님 : 일단 불교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기도를 하거나 참선을 하더라고 부처님이 뜻했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의 가르침은 지금 이 자리에서 볼 수 있고, 이루어지고, 증명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과연 한국 불교가 불교를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다들 10년 20년 참선해야 되고 그래야 뭐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기복화, 신비화는 결코 불교가 아닙니다. 기복화는 세속화니까 불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데 신비화는 아리송하니까 불교가 아니라고 말을 못합니다. 하지만 부처님 말씀처럼 이 자리에서 볼 수 있고 증명되는 것이 불교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꽃이 하나 있으면 누구나 ‘아, 저 꽃이 아름답다.’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나 중생이나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 화살입니다. 부처님은 ‘저 꽃이 아름답다.’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생인 우리는 ‘내 방에 갖다 놔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화살입니다. ‘저 꽃 아름답다.’ 라고만 생각하면 60억 인구가 그 꽃을 보고 즐길 수 있는데, ‘내 방에 갖다 놔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두 사람만 있어도 싸움이 납니다. 바로 이 차이입니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기 싫은 물건이 있으면 부처나 중생이나 ‘저 물건 참 보기 싫네.’ 라고 똑같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보기 싫다고 생각만 하는 데서 끝나는데 중생들은 그 물건을 치워버리든지 부숴버립니다. 그러니까 좋은 것은 애착으로 가는 것이고 싫은 것은 증오, 분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 바로 불교 수행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좋은 결과로 갔는지 나쁜 결과로 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불교는 너무나 단순 명쾌한 것입니다.

늘 이 부분에 정신차려서 어떤 상황에서도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 선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 한 아무리 선방에서 장좌불와를 해도 그것은 왜곡인 것이고 법당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또다른 고생일 뿐입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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