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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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로 가는 길
"당신은 당신이 되고 싶은 나무보다 훨씬 높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보다 더 빛납니다. 당신을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입니다."
그 날 그에게 문자 메세지가 왔다.
그날 따라 유난히 내 자신이 초라해 보여 한없이 움추려 들어 있었다.
아무 것도 끝내지 못하고 떠난 여행. 어느 것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할 정도로 잔뜩 벌여 놓기만 하고 마무리하지 일. 일, 일...
허나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새벽부터 설치며 떠난 여행.
그렇게 떠난 길이었다. 아마 차에 몸을 실은 사람 모두가 그렇게 떠나 왔으리라.
버스가 남산 터널을 빠져 나갈 즈음, 부시시 떠오르는 아침 햇살 사이로 추위에 떨고 있는 싸늘한 도시의 건물들이 고개를 들었다. 도시는 마치 냉방에서 한댓잠을 잔 나그네처럼 찌뿌둥해 보였다. 밤새 얼어 붙은 도시는, 얼굴에 미처 화장을 지우지 못한 채 잠든 여인처럼 푸석푸석했다. 화장이 일그러져 거의 표정을 알 수 없는 여인이 요란스레 울려대는 경적 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도시의 아침은 고단해보였다. 그렇게 고단한 도시 위로, 고단한 잠을 털어낸 새들이 지친 날개를 퍼덕이며 힘겹게 날고 있었다. 모두 잊고 싶은 도시의 모습이고 또한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떠나고 싶었다.
이 길을 지날 때면, 수십번도 더 당신을 떠올렸지요. 저녁 무렵 어둠이 내리면, 저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이 어둠처럼 절망적이면 어쩌나 애태웠고, 낙엽진 가로수를 볼 때면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이 저렇게 퇴락하면 어쩌나 안타까웠지요.
쳐다보기도 아깝고, 만져보기도 아까운 당신...가끔씩 당신이 잠든 모습을 지켜 보곤 했지요. 깊은 잠에 빠져 코를 골고 있는 당신의 얼굴에는, 어느 새 살아온 세월만큼의 주름살이 잔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지요. 그 그늘의 팔할은...내가 드리웠다는 자책감이...못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도시를 거의 빠져 나갈 즈음, 아침을 굶은 사람들을 위해, 떡을 나누어 주었다. 아직 뜨거운 온기가 남아 있는 백설기는 그 떡을 준비한 사람의 마음만큼이나 뜨뜻했다. 나는 그 떡을 맛있게 먹었다. 떡을 먹으면서 도시에서 얻은 냉기를 몰아냈다. 마음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람들과 떠나는 여행...그래서 더욱 안온하고 평화로운 시간.
군산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첫 번째 도착한 곳이 부안의 채석강이었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배 타고 술 마시다가 물에 비친 달빛 모습에 반하여 물에 뛰어 들었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7천만년전에 퇴적한 해식단애가 마치 수만권의 책을 쌓은듯한 와층을 이루고 있는 곳.
내게는 그 바위가 책이 아니라 불에 탄 시커먼 장작더미같았다. 하늘이 불질러놓은 바위를 그 곁의 바닷물이 꺼놓은 듯 시커먼 바위 장작. 하늘은 불을 질러도 저렇게 거대한 흔적을 남기지. 타다 꺼져도 허망하지 않게 저런 숯덩어리를 남기지.
그도 나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게야. 탈 때는 몰랐지. 이렇게 가슴속에 검은 숱덩어리가 남겨지리라고는...이 숯덩어리를 품에 안고 7천만년동안 바스러지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아니...바스러져도 좋아. 그의 불에 타오를 수만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되고 싶은 나무보다 훨씬 높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보다 더 빛납니다. 당신을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입니다...
항상 슬픔만 던져 주었는데...항상 상처만 주었는데...나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니...
당신은 도데체 전생에 얼마만큼 큰 빚을 졌기에 저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건가요...제가 뭐라고..저같이 하잖은 영혼이 뭐라고...내게 그런 깊은 사랑을 쏟아주시나요...
당신의 불에 훨훨 다 타버릴 수만 있다면. 마지막 토막까지 다 타버려 온전히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뿌려질 수만 있다면...그러나 가슴에 너무 물기가 많은 탓인지 저는 당신이 지펴놓은 불씨에도 제대로 타오를 수가 없습니다. 저도 채석강처럼 그렇게 누워 있을까요. 타다 만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렇게 쓰러져 있을까요.
그렇게 젖은 숱덩어리를 가슴에 담고 내소사로 향하는데 스님이 마이크를 잡으셨다. 108배의 의미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참회, 두 번째는 끊어버리는 것, 세 번째는 비우고, 네 번째는 공양하기입니다. 절한번 할때마다 참회하고 끊어버리고 비워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그 모든 것이 바로 공양이 될 것입니다....
내소사로 들어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흙길을 적시고 전나무 숲을 적시고 부처님의 머리를 적시고 있었다. 일행들은 굵은 빗방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대웅전으로 향했다. 참회하고 끊어버리기 위해, 비우고 공양하기 위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나는 그저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끊을 수 없고 비울 수 없어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숱덩이같은 그 마음 위로 어느 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참회하지 못해 공양을 할 수 없는 마음위로 세찬 빗줄기만이 쏟아지고 있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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