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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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는가
영국사가 하얀 눈 속에 파묻혔습니다. 어이하자고 눈이 오는 것인지, 서설치고 많은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스님은 “꽃샘추위에 설 늙은이 얼어죽겠다”며 아주 오래된 농담을 꺼내어 풀어놓습니다. 공양주도 “설을 거꾸로 센 모양”이라며 한 마디 거들지만 싫지만은 않은지 얼굴 가득 웃음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엄청난 눈에 절 식구들의 표정이 밝지 않아 보입니다. 누다리로 가는 길이 끊기고, 가까스로 풀린 북고개 찻길도 다시 빙판으로 변할 것입니다. 한동안 절집은 한 겨울 폭설에 갇혀 살던 것처럼 눈이 녹을 때까지 꼼짝없이 또 그렇게 지내야 할 것입니다.
영국사에 똬리를 틀고 산지 다섯 해가 되었습니다. 산중의 3월, 가끔 진눈개비가 희뜩희뜩 흩날릴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비도 눈도 아닌 진눈개비는 땅에 닿기도 전에 자신의 자취를 남기지 않고 봄날 속으로 사라지곤 했었습니다. 오늘처럼 폭설이 내린 것은 처음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눈 때문에 스님과 공양주, 처사는 어안이 벙벙한가 봅니다.
물오른 나무들이 다시 꽁꽁 얼어붙고 있습니다. 눈을 잔뜩 지고 있는 나무들, 특히 소나무가 걱정됩니다. 소나무 위에 쌓인 눈이 마치 지붕으로 눈을 앉혀 놓은 것 같습니다. 가지가 부러진 나무는 둥치만 휑하게 있고, 어린 나무는 허리까지 꺾여 쓰러져 있습니다. 온산을 처렁처렁 울리던 설해목들의 비명 소리에 지난 겨울 잠을 설치기도 했었는데, 다시 나무들의 처절한 소리를 듣게 되어 마음이 아픕니다. 눈은 한 순간 세상을 환하게도 하지만 경칩을 눈앞에 두고 지금 모든 것들을 한 겨울 속으로 되돌려 놓고 있습니다.
남고개 양지바른 언덕에는 아기 손톱만한 연한 보라색 꽃잎을 앙증맞게 매단 봄까치꽃들이 봄을 알린 지 오래입니다. 은행나무 앞 무논에서는 개구리가 잠을 깨기 시작하고, 산수유나뭇가지들도 샛노란 꽃망울을 총총 총총히 내뿜었는데 눈이라니요. 가는 겨울이 오는 봄을 시샘함이 큰가 봅니다. 아니지요 봄에 꼬리를 밟힌 겨울이 장렬하게 죽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산수유 생강나무는 가지마다
저 환한 마음
숲 속에서 그 집 마당까지
꽃비, 무늬져 내리는데
어이하자고 눈은 오는가
내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통화 중 봄인가 보다
봄비보다 더 푸르게 눈뜨고
봄눈보다 더 하얗게 젖는다
어이하자고 눈이 오는가
졸방제비꽃
쌍둥이바람꽃 쇠별꽃 벼룩이자리
쭈빛쭈빛 송알송알 꽃수레
햇빛 가득 둥글게 껴안고
첫 키스 중
어이하자고 눈은 오는가
내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부재 중 봄인가 보다
꽃보다 붉은 기억
흐르는 물에 비춰보며
나비보다 먼저 라프르르
강 건너 마을에 닿는다
―양문규,「눈이 오는가」전문
남쪽에는 지금 매화 축제가 한창일 것인데, 한 잎 두 잎 벙글어진 매화꽃에 벌 나비보다 먼저 달려든 눈송이를 꽃들은 온 몸으로 녹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국사에는 때아닌 눈 때문에 신나는 놈이 하나 있습니다. 진도산 흰둥이입니다. 따스한 봄볕에 누울장 누워 단잠만을 청하던 흰둥이가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리저리 펄쩍거리며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눈밭을 빠대고 다닙니다.
눈 오는 날은 대단한 행운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나는 산방을 뛰쳐나와 설경 속을 헤집고 다닙니다. 은행나무 곁을 서성이다 망탑봉을 오르기도 하고, 산길을 따라 멀리 강가를 다녀오기도 합니다. 오늘도 나는 왼 종일 흰둥이처럼 영국사 곳곳을 누비며 눈바래기를 하였습니다. 꺼놓았던 핸드폰도 열고 문자도 날려 보았습니다. 애처롭게 늘어진 가지들의 눈을 한번씩 털어 주기도 하면서 머리엔 구름 모자를 쓰고 돌아다녔습니다. 어이하자고 눈이 오는가.
천태산이 눈 속에 갇혀 있지만 그 속에는 봄볕이 깊숙하게 배여 있습니다. 나뭇가지에 하얀 눈꽃 피었지만 그 속엔 파릇파릇 새순이 움트고 있을 것입니다. 산수유 생강나무 가지들이 피워내는 환한 마음, 숲 속으로부터 그 어느 집 마당에 내려놓을 것입니다. 졸방제비꽃 쌍둥이바람꽃 쇠별꽃 벼룩이자리 꽃수레에 가득 햇빛 둥글게 머금고 쭈빛쭈빛 송알송알 제 낯빛을 보라는 듯이 드러낼 것입니다. 봄으로 가는 길 아스라이 눈부십니다. 누다리 저수지 한켠에 녹지 않은 얼음장이 하얀 눈을 덮어쓰고 물 위에 떠 있지만, 물밑으로는 고기들의 힘찬 유영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만세루에 올라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에 꽃망울 벙그는 그 마음을 실어봅니다.
어제까지는 황사가 심했는데, 이 눈이 그치면 잘 닦인 안경을 끼었을 때처럼 선명한 산경을 볼 수 있을 테지요. 밭둑에 쑥들도 서둘러 고개를 내밀 것입니다. 어디 저 여린 풀들만 그러하겠습니까. 겨울을 터는 분주한 발자국들이 이 산중을 깨울 것입니다. 절집 처마에 매달린 쇠붕어 소리가 뎅그렁 뎅그렁 눈발에 섞여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금 통화 중일 것이고, 좀 지나 집을 나서서 곧 만날 것입니다. 그들은 봄비보다 더 푸르게 눈뜨고, 눈보다 더 하얗게 젖을 것입니다. 꽃보다 붉은 기억, 흐르는 물에 비춰보며 나비보다 먼저 라프르르 사뿐 강 건너 마을에 가 있을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부재중입니다. 폭설에 갇힌 나는 핸드폰을 다시 꺼내들고 문자를 날려봅니다. 눈이 오는가, 어이하자고 눈이 오는가.
양문규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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