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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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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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은행나무 곁을 떠나 집을 다녀왔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산중에서 맞이했던 봄과는 달리 들녘의 봄은 삶의 터전으로부터 시작되는, 힘찬 생동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흔도 넘어 보이는 농부들이 논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수원에서는 거름주기가 한참입니다. 푸대 가득 담긴 퇴비가 꽤나 무거울 텐데 거름을 져 나르는 발걸음이 가벼워 보입니다. 포도밭과 배밭에 뿌려진 거름에서는 썩은 냄새가 코를 자극합니다. 요즘은 대부분 발효시킨 닭똥을 인분 대신 쓰고 있지만 그 냄새 역시 인분 못지 않게 역겹습니다. 그러나 그 냄새가 싫지만은 않은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농부의 자식인가 봅니다. 평소 제 아버지께서 ‘똥이 곧 밥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자주 들으며 자랐습니다. 또 다른 밭에서는 지난 해 수확하고 미처 뽑지 못한 고춧대를 뽑고 밭을 갈아엎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바람에 나뒹구는 폐비닐들이 힘든 노동의 잔재인 듯 느껴집니다.
검게 탄 논둑과 밭둑엔 파릇하게 쑥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볕이 가득한 양지쪽엔 벌써 냉이와 꽃다지가 키재기를 하며 꽃을 피웁니다. 키랄 것도 없이 고 작은 키를 가지고 말입니다. 먼저 꽃을 피운 봄까치꽃의 연한 보라색이 하양 노랑 빛깔들과 어울리며 봄날을 더욱 눈부시게 밝힙니다. 봄을 시작하는 꽃들은 어쩌면 저리도 작고 여리기만 한 것일까요. 갓 세상에 태어난 신생아처럼 너무나 여려, 작은 바람에도 발걸음을 붙잡고 자꾸만 뒤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의 들녘에 돋아나는 풀들은 알고 보면 거진 다 먹을거리입니다. 벌금자리, 냉이와 달래, 씀바귀, 돌나물, 쑥 등등 입맛을 돋우어주는 나물들로 가득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아직 언 땅이 풀리기도 전에 냉이를 찾는 아이들과 처녀들,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들녘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종알종알 종알종알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대던 아이들을 종달새 같다며 하얀 웃음을 지우시던 어른들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종달새 같다던 그 아이들은 어디로 다 떠나보내고, 포도나무 아래서 앙상한 포도나무를 닮은 모습으로 할머니 홀로 나물을 뜯고 있는 것일까요. 푸른 보리밭 사이를 헤집으며 콧노래를 부르던 처녀들의 모습도 온데 간데 없습니다. 보리밭 대신 휑한 포도밭에서 나물을 캐는 할머니의 모습만이 간간이 보일 뿐입니다.
집으로 들었을 때 부모님은 안 계셨습니다. 삐그덕 대문 여는 소리에 뜨락에 내려앉아 있던 따스한 봄볕이 화들짝 놀라 반길 뿐입니다. 저의 집은 인삼과 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칠십 가까운 부모님은 이른 아침 밭으로 나가셨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배밭에 거름을 뿌리고 있거나 새 인삼밭을 꾸미기 위해 지주목을 세우고 있을 것입니다.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는 병원에서 물리치료라도 받으셔야 할 텐데, 농사에 필요한 자재들을 갖추기 위해 읍내 시장을 나가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내세울 것도 없는
허울뿐인 저 하나 몸뚱이
달랑 걸치고 길을 나선다
산수유 가지 위에선
새들이 안팎 없이 노닌다
때론 주인 없는 허공을 가르며 길을 낸다
노오란 꽃잎, 꽃비처럼
쪽빛 물구덩 노랗게 물들인다
그 속을 개구리
암팡지게 기지개를 펴며
물방귀를 뀐다
논밭에선 농부들이 분주하게 몸을 움직인다
칠십도 넘어 보이는
허리굽은 노인네의 힘겨운 삽질
아버지도 배밭에서 거름을 뿌리고 있겠지
삶의 검붉은 때 배꽃처럼
환하게 꽃 피울 수 있을지
썩은 두엄더미 옆으로 개가 지나간다
산방에서 집으로 가는 길
많은 꿈들이 울음으로 메마른
그 못난 사내,
앞길 열어 보여주기도 하면서
슬픔이며 기쁨,
살포시 감싸안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양문규,「집으로 가는 길」전문
아버지의 봄은 어쩌면 서러운 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밥이 되지 않는 농사는 분명 설움일 것입니다. 칠십 평생 지은 농사의 대가가 빚만 더했다면 그것은 분명 슬픔인 것입니다. 그래서 봄날 들녘에 피어나고 있는 꽃들이 농부들에 기쁨을 안겨주기보다는 수지에 맞지 않는 들일을 시작해야 하는 서러움의 꽃일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고향집 마루 끝에 앉아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이십 대 후반에 가까스로 시인이 되었을 뿐 시인으로서의 언어는 짧고, 그 바닥 역시 엷어 시다운 시 한 편 없는 허울뿐인 시인일 따름입니다. 시적인 고향을 찾아,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그 세계 속에 내재한 정신적 고향을 만나기 위해 산사로 들었고, 아직도 은행나무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뛰어넘어 만질 수 없는 것들에게서 감촉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소리까지도 보고 느껴야 하건만 나는 아직 저 심연으로부터의 울리는 소리를 듣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면서 깊은 언어를 쫒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아둔한 노래만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봄에도 슬픔이 배여 있는 것 같습니다. 꽃을 찾아서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지만 나의 시는 가난과 사랑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랑을 즐기면서 오히려 더 깊은 가난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난으로밖에 사랑할 수 없는 근원적인 설움이 그런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들녘에 피어나는 작은 풀꽃들의 가녀린 삶을 바라보면서 노래하는 것이 천생 농사꾼을 닮아 있습니다.
산비알 밭에서 어떤 노부부가 지주목 세우는 걸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저분들도 저의 부모님처럼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계시나 봅니다. 뼈빠지게 지은 농사가 빚만 더했다 시면서도 그 농사 버리지 못하는 부모님들입니다. 거름을 뿌리고 지주목을 세우는 아버님의 힘겨운 삽질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검붉은 때 배꽃처럼 환하게 꽃피울 때까지 계속 되겠지요. 설령 밥이 되지 않는 설운 농사이지만 아버지의 봄은 서러울 수가 없습니다. 온 생애를 받쳐 지은 농사가 쭉정이로 남아 있어도 아버지는 이 들녘을 희망으로 노래합니다.
썩은 두엄더미 옆으로 개가 지나갑니다. 산방에서 집으로 가는 길, 들녘은 못난 사내에게 새로운 봄을 건네줍니다. 많은 꿈들이 울음으로 메마른 그 차디찬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앞길 열어 보여주기도 합니다. 슬픔도 기쁨도 함께 감싸 안을 수 있도록 가슴을 열어줍니다. 집으로 가는 길, 나에게도 봄은 아버지의 들일처럼 분명 희망을 노래하게 하는 꽃들로 송알송알 피어날 것입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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