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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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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행사

선원장 초청대법회...법장스님

  • 입력 2004.03.24
  • 수정 2025.01.15

움트는 새싹들  노래 소리와  향기로운 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음력 2월 초하루!

선원장 초청 대법회 여섯 번째로 총무원장 법장스님의 경허(鏡虛),만공(滿空) 선사의 가르침을 주제로 거행되었다.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 스르르 녹는 봄날처럼 여러분 마음속에서도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길 바랍니다” 라고 시작한  스님의 인사에 법문을 듣고자 온 많은 불자들의  마음에  싱그러운 봄 향기와 함께  조용히 법문은 시작 되었다.

 

 

불법이 쇠해지는 어려운 시절에 경허(鏡虛)선사와 만공(滿空)선사가 나타났으니 석가세존과 다르지 아니하고 가섭존자와  다르지 않으리라.

 

 

전주에서  태어난 경허(鏡虛)스님은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溪寺)로 출가하여 계허(桂虛)스님 밑에서 5년을 보냈다. 불교경전과 유교경전을  두루 섭렵하며 1871년에는 동학사 강사로 추대되었다. 어느날  옛 스승인 계허(桂虛)스님을 찾아  천안의 마을을 지나다가 폭풍우를 피하려고 어느 민가의 추녀 밑으로  가려했으나, 주인은 한사코 거부의 손짓을 했다. “이보시오.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이 마을은 전염병이 치열하여 걸리기만 하면 서 있던 사람도 죽으니 어찌 손님을 들일 정신이 있겠소?” 경허(鏡虛)스님은 그 회색의 마을에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몰골이 송연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져 죽음이 임박하여 목숨이 한 호흡사이에 끊어질 것” 같았다. 그 전율 앞에서 20년의 경학이 여지없이 무너져버린다.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심(發心)을 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하였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지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하였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 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겨 그 뜻을 물어왔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道)하였다.

 

 

그뒤 천장암(?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 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後修行)의 좌선을 계속하였다.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숭유 억불 정책이 심하던  그시절 탁발을 하러 나갔는데  집주인은 “내가 시주하면 시주의 댓가는 얼마입니까? 하는 물음에 댓가를 바라고 시주한 공덕은 없습니다. 중이 시주는 못받을지언정 어찌 거짓말을 하겠느냐? 하며 뒤돌아 나왔다. 해가 지는 저녁, 천장사로 돌아왔는데 아침에 공덕이 없다는 말에 시주를  거절한 그 집주인 이진사가   쌀 한 가마니를 들고 찾아왔다. 시주를 했으면 그냥 돌아가라는 스님 말에 ”내가 이 쌀을 가지고 온 것은 아침에 던지고 간  말 솜씨가 평범한 스님의 말이  아닌지라 스님의 덕망이 얼마나 되는가 알아보러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저울과 잣대는 가져왔습니까? 하는 스님의 물음에 “아니 학문 덕망은 머리로 아는 것이지요” 라며 대꾸하자 스님은 앗!  소리를 지르며 선생께서는 학문의 깊이와 사람의 덕망을 안다고 하는데  내가 지금 지르는 소리는 몇 근이나 되는지요?  이 말에 이진사의 생각은 확 바뀌었고 밤새도록 두 사람은 백년지기 친구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허(鏡虛)스님은 일체중생을 향하여 그렇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저것 모두 저울로 달아보고자 하는 그런 분별심이 없어지는 순간 진실한 공덕이 따라온다는 진리를 가르쳤던  것이다.  경허(鏡虛)와 사제지간인 만공(滿空)의 가르침 또한 유명하다 . 만공(滿空)은서산 천장사 에서 13세 때 출가하여  구도의 열정을 안고 경허(鏡虛)를 만났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로 돌아가는걸 알게!  그곳에 자네가 찾는 부처가 있는거야."라는 경허(鏡虛)의 가르침으로  만공(滿空)의 심중에 개안의 불빛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하나로 돌아가는 길목에 부처가 있다는걸 3년후에야 깨달았으며 개안 1년후 많은 수행자가 찾아와 그의 오도(?道)를 실험하려  했다.

 

 

스님 불법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네 눈앞에 있다. 

그런데 왜 소승 눈엔 보이지 않습니까? 

너에게는 또 하나의 네가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보이시는지요?

너만 있어도 안 보이는데 나까지 있으니 더욱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스님도 없고 나도 없으면 볼 수 있겠습니까?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보려고 하는놈은 누구냐?

 

 

만공의 이런 가르침에 그의 주위엔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1946년 만공(滿空)은 그림자처럼 들고 다니던 거문고를 옆에 두고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 보며 껄걸 웃었다. 나 이제 가야 되겠네 하며 찬 서리 내리고 낙엽지던 날 열반에 드셨다.

표리일체 가풍으로 생활하며 아무 걸림 없는 무애자재한 삶으로 살다가신 경허(鏡虛)스님은 “법문을 들을 때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이 하라. 법문이 어려우니 쉬우니 생각을 하지마라. 그런 생각은 분별심을 일으키며  분별심은 부처님의 참뜻을  그르칠 수 있다.

부처님은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배고픈 이에겐 밥을 주고 목마른 이에겐 물을 주면서 길 위에 태어나서 길 위에서 살다가 길 위에서 가신 분이다. 고양이가 쥐 잡듯이 일념으로 생각을 되뇌여야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을 모두 뒤집어 어떤 것도 걸림 없이 즐겁게 살다 가야 한다는 경허(鏡虛),만공(滿空)선사의 가르침을 우린 생각해야 한다. 는 법문으로 초하루 선원장 초청 대법회를 마쳤다. 하루 빨리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깨달아  우리의 소원대로  법향이 봄바람에 실려 널리  퍼져나가길...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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