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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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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계사는 조선시대 전의감터

  • 입력 2004.03.28
  • 수정 2024.11.15

'장금이가 거닐었을까?'

MBC 드라마 ‘대장금’에 장금이는 제주관비로 있다가 의녀가 됩니다. 드라마상에 장금이는 정식 의녀가 되기까지 ‘전의감’이라는 곳에서 의녀수업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의감.... 조금 생소하지만 조계사터에 장장 500년의 세월을 있어온 조선시대 유명한 의료기관입니다.  전의감을 따라 조선시대 조계사터의 역사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조계사가 있는 곳을 조선시대 옛사람들은 전동(典?), 박석동이라 불렀습니다. 박석동이라 불리웠던  것은 지금의 한국일보쪽에서 조계사로 넘어오는 길에 고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고개 이름을 박석고개라 하였습니다.

 

전동이라 불린 이유는 이 곳에 전의감(典醫監)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1884년 우정총국이 들어선 자리가 전의감터였음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견지동 39번지, 전의감에 우정총국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조계사 대웅전과 마당에 전의감이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분명한 자료는 없습니다. 몇가지 사실을 미루어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4-500년 역사의 회화나무, 무엇을 말해주나?

 

 

대웅전 앞에 회화나무가 있습니다. 조계사 회화나무의 수령을 400년 이상으로 보는데 회화나무는 조선시대에 전통적으로 관가(官家)나 양반가에 심어졌던 나무입니다. 조선시대 조계사 주변은 전통적으로 왕실이 살았거나, 관가터였습니다.

 

(구)삼양식품터는 수진궁이라 불리었던 것이고, 지금 재보험 빌딩이 들어서 있는 자리는 용궁터였습니다. 근처를 유심히 살피시면 궁터였음을 알리는 표지가 있습니다. 궁터라 하여 왕이 살았던 곳은 아니고 왕실의 인척이 살았던 곳입니다. 조계사터를 가운데 두고 서쪽으로는 용궁이, 남쪽으로는 수진궁이 있었던 거지요. 재보험빌딩이 있는 용궁터에 궁이 들어서기에는 관가가 있었습니다. 조선개국시에는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집터였고, 정도전이 피살된 이후에는 중학(中學)이라는 교육기관과 사복시라는 관가가 있었습니다.

 

즉, 조계사 주변 일대가 조선 개국시 관가터였고, 특히 지금으로부터 4-500년전 조계사 회화나무가 심겨진 곳, 그곳은 분명 관가였습니다.

 

 

 

조계사가 있는 견지동에는 도화서와 전의감이라는 관가가 있었습니다. 도화서는 김홍도같은 회화가들이 왕궁의 그림 등을 제작하던 곳으로 지금의 위치로 우정총국 북쪽 방향 터입니다. 전의감은 우정총국 남쪽 방향에 있었던 거지요. 그렇다면 현재의 우정총국을 넘어서 조계사까지가 전의감터라고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정총국이 만들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딱 120년전 1884년, 갑신년(올해도 갑신년입니다.) 4월입니다. 전의감이 폐지된 것은 그 뒤로부터 10년 후인 1895년입니다. 우정총국은 전의감이 폐지되고 그 자리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대략 10여년을 전의감 자리 한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의감은 현재의 우정총국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었던 겁니다.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전의감에 일상적으로 있었던 사람들은 몇 명이나 근무하였을까요. 전의감에 있었던 사람들의 규모를 살피면, 터의 규모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서울600년사에 근거한 기록입니다.

 

 

(전의감은) 건국 초에 창설되면서 판사(判事) 2인, 감(監) 2인, 소감(少監) 2인, 승(丞) 2인, 주부겸(主簿兼) 2인, 직장(直長) 2인 , 박사(博士) 2인, 검약(檢藥) 4인, 조교(助敎) 2인 등의 많은 인원이 배치되었으며 그 후 태종 · 세종 · 세조 · 성종 등 역대 왕들에 의하여 여러 번의 변혁을 보게 되었다.이러한 관직 이외에 의원이 아닌 제조 2인의 겸직을 두었으며 그 외에 의학습독관(醫學習讀官) 30인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전의감의 직제가 역대 왕들에 의해 여러번 변혁되어 왔으나 성종 16년(1485)에 『경국대전(經國?典)』이 완성된 이후에는 그 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서울600년사 홈페이지)

 

 

 

대략 관직에 있는 사람이 20여명 내외를 유지하였고, 의학습독관까지 합하면 50명 내외입니다. 전의감은 조선시대 의료체계를 형성한 내의원, 혜민서 중에서 의료교육을 담당한 기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의학생도가 의학교육을 받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기록상으로는 50명의 의학생도가 전의감에서 의학교육을 받았습니다. 전의감에 있었던 사람들을 최대치로 잡으면 100명 정도가 됩니다. 50 - 100명 정도가 의료행위를 하고 교육을 받는 공간, 꽤 크겠지요?

 

 

 

장금이는 조계사터를 거닐었을까?

 

 

 

장금이는 전의감에서 의녀교육을 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의녀교육은 전의감이 아닌 혜민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조선 시대 중앙의료체계는 부분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民署) 등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전의감은 의학교육, 의과시험을 주관하였으며 내의원은 왕실의 약을 짓는 일을 전담하였고 혜민서는 서민에게 약제를 공급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전의감은 의학교육과 의원을 선발하는 의과를 주관하는 등 의약행정과 교육의 중심이었습니다. 전의감은 조선개국 당시 개설되었으며 1895년 갑오개혁으로 없어졌으며 이후 서양의료체계로 편입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전의감에는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50- 100명의 관원과 의학습독관, 교육생이 있었는데, 이 숫자에는 전의감에 당연히 있었을 노비와 의녀를 제외한 숫자입니다. 관원이 있었고, 의원이 있었으면 당연히 이를 보좌하는 노비와 의녀가 있었을 겁니다. 장금이가 전의감에 있었다면 교육을 받는 장금이가 아닌, 의녀로서의 장금이었을 겁니다.

 

  조선시대 의원교육은 전의감에서 이루어졌지만, 의녀교육은 혜민서에서 담당하였습니다. 혜민서는 서민들을 치료하는 것이 중심이었고, 이곳에서 의녀교육도 함께하였습니다. 즉, 장금이는 혜민서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다만 장금이가 의녀가 되고 전의감에서 의원을 보좌하는 의녀로서의 활동을 할 수는 있었겠지요.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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