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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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핀 꽃
"저길 봐... 우리가 올라올 때는 몰랐는데,
여기서 보니까 어때?
구불구불한 길이 한 눈에 보이지?"
섬진강 매화밭을 허적거리고,
지리산 정령치에 올랐을 때,
그가 말했다.
해발 1,172미터 높이의 정령치에 차를 대자,
저 멀리 우련한 산들이 겹겹이 물러나며 시야에 들어 왔다.
산이 발을 딛고 있는 땅에는,
사람의 집들이 계곡의 조약돌처럼 흩어져 있었다.
산에서 굴러 내려온 돌맹이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보면 먼지처럼 작게 보이는
저 집들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어.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평온해 보이기만 하지.
그런데 알고 보면 수 많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지.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작은 집 어느 곳에서는
사람이 태어나고 있을 테고,
또 다른 집에서는 눈을 감는 사람도 있겠지...
외딴 집에서는 상처받은 가슴으로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생각으로
흥분과 기대에 부풀어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위에서 내려다보면 흔적도 없는데...
우주에서 보면 우리 모두 티끌 같은 존재들일 뿐인데..."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잣말처럼 더듬거리는
그의 옆얼굴은 자신의 지나온 시간 속의
어느 지점을 거닐고 있는 듯이 보였다.
긴 시간동안 산모퉁이를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올라온 자신의 삶의 여정을 회상하는 듯이 보였다.
어머...같은 꽃밭에 있는 꽃인데,
어떻게 이 나무의 꽃은 벌써 저버렸을까...
아직 벙그러지지 않는 꽃도 있는데...
꽃은 꼭 한 번은 피게 되어 있어.
빨리 피면 빨리 시들고,
늦게 피면 늦게 시들지...
그러니까 조금 늦게 핀다해서 조급해하면 안 돼.
알았지?
언젠가는 꼭 꽃필 수 있다는 약속을 잊지 말고
자신을 믿어야 해...
그래서 정말 때가 되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어야 해...
섬진강변 자드락길에 핀 매화밭에서,
시든 꽃을 보고 애가 달아 있는 나를 보고 그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옆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때론 격렬한 숨결과 맹렬한 감정에 사로잡혔을 얼굴.
한 때는 갈피 잡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슬픈 갈증에 물들었을 그의 얼굴.
지금은 그 마음을 다 벗어버린 듯
그의 얼굴은 무심해 보였다.
자신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던
젊은 날의 독기를 바람결에 씻어낸 듯
적연(寂然)해 보였다.
아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격정의 칼날에 베여
기진맥진해 있는 나는,
그의 옆얼굴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마른 기침 한번에도 온 몸이
심하게 흔들리는 나는,
어둠이 내릴 때까지 말없이
그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산에 오르면,
발 아래 펼쳐진 마을의 집들이
티끌처럼 작아 보인다.
그걸 알면서도 다시 집에 들어가는순간
일상 속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는 나는
그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든지 힘들면 돌아가 쉴 수 있는
그의 넉넉한 품이 있는데도 난 아직 외롭다.
당신...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요? 미안해요......
미안하긴...
당신이 나를 아무리 힘들게 한다해도
이젠 물릴 수가 없어...
그는 항상 그 자리에 정령치처럼 우뚝 서 있는데
나는 그 산을 감싸고 흐르는 구름처럼 끝없이 움직인다.
그는 태산처럼 그 곳에 그대로 있을 뿐인데,
나는 바람부는대로 흩어지는 구름처럼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때론 나의 구름에 젖고 추웠을 그의 얼굴에
소연(蕭然)함이 배여 들었다.
나를 만나 수많은 시간을
애태웠을 그에게 이젠 나의 꽃을 보여주어야겠다.
비록 늦게 피더라도 나의 향기를 품어낼 수 있는
그런 꽃을 올 봄에는 꼭 보여주어야겠다.
2004년 4월 4일
글...무진당
편집...일지향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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