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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巖寺(화암사)에 오른다

  • 입력 2004.04.16
  • 수정 2024.11.19

   얼레지꽃을 보기 위해 완주 불명산(佛明山) 화암사를 다녀왔습니다. 심심 산골에서만 자라는 우리의 토종 꽃 얼레지는 흔히 볼 수 있는 야생화가 아닌 탓에 그 동안 식물도감을 통해서만 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스님에게 불명산에 얼레지가 자생하고, 지금쯤 만개했을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국사에서 내려와 화암사까지 가는데는 1시간 30여분이 걸렸습니다. 비단결처럼 아름다운 금산을 거쳐 대둔산 도립공원을 지나갔습니다. 이 길은 전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 길이었지만 달리면서 몇 번씩이나 차를 세우고 길을 물으며 찾아갔었습니다. 빨리 얼레지 꽃을 보고 싶은 마음에, 행여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운주를 지나 경천으로 들어서면서 마음이 더 급해졌습니다. 분명 길옆에 '화암사'라고 적힌 조그만 팻말이 분명 붙어있다고 들었는데 급한 마음에 지나친 듯 싶어 길가는 여러 사람을 귀찮게 했던 것이지요.  

   ‘화암사’

   언뜻 보기에도 소박한 느낌이 드는 팻말이 서 있었습니다. 마치 오랜 지기라도 본 듯 반가웠습니다. 그 곳에서 좌회전하여 마을로 이어진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가다보니 조그만 산촌 마을이 있었습니다. 들녘에는 인삼, 포도, 채소 등의 다양한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고, 각가지 묘목들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대추나무가 많이 눈에 띠는 마을이었습니다. 산 속으로 난 포장도로를 조금 더 올라가니 화암사로 오르는 작은 오솔길이 나왔습니다. 그 곳에 차를 세우고 꽃과 나비가 길을 이끄는 오솔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놓았습니다. 

   물소리 크게 들리는 산길로 접어들자 땅바닥에 두 잎을 뉘이고 가느다란 꽃대에 앙증맞은 연보라빛 꽃을 매달고 있는 한 무리의 꽃단지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얼레지꽃이었습니다. 여느 꽃들처럼 꽃잎을 활짝 벌려 피우는 것이 아니라 쪽진 여인의 머리처럼 꽃잎을 뒤로 말아 올려 서로 맞닿은 모습이었습니다. 꽃 속의 긴 보랏빛 암술대며 이를 둘러싼 수술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제 속내를 봄볕에 완전하게 다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얼레지는 기후에 가장 민감한 봄꽃인가 봅니다. 제 스스로 아침과 저녁, 한낮을 구별하니까요. 구름이 가득한 쌀쌀한 날에는 꽃이 오므라들어 긴 종모양을 하고 새초롬히 있다가도 한낮의 따스한 햇볕을 받으면 오므라붙어 있던 꽃이 열리면서 뒤로 젖혀져 쪽진 머리를 하는 것입니다.

   화암사 주변은 우리 나라 최대의 얼레지 군락이니 만큼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얼레지꽃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얼레지 역시 여느 봄꽃과 마찬가지로 봄볕 속에 머무는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얼레지가 지상에서 흔적을 감출 때면 이미 봄날은 가고 맙니다. 두 장의 잎새는 푸른 바탕의 갈색 얼룩무늬가 점차 커지면서 여름이 오기 전에 녹아 내릴 것입니다. 하긴 어디 꽃들만 그러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삶도 저들과 같은 것을요.

   산수유꽃이 진 나뭇가지에는 새의 혀처럼 새 잎이 돋아 있습니다. 산의 기운도 푸르른 생기를 품은 듯 활기가 느껴집니다. 물소리에 마음을 씻으며 꽃들을 따라 화암사에 올랐습니다. 

 

      동향동 마을 지나 佛明山 花巖寺에 오른다

 

      산수유꽃 피고 진 나뭇가지에는 

      새의 혀처럼 새 잎 돋고 있다

      산골짝을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물웅덩이 우무질의 개구리 알이 보인다

 

      물 밖의 산기슭에는

      얼레지 꽃들이 피어 있다

      연보라빛 꿈에 취한

      쪽진 처녀가 봄볕 속에

      길을 내고 있다

      그 길은 雨花樓로 이어진다


      절을 감싸고 있는 골짜기에서 

      물이 솟는다 물구덩이

      도롱뇽의 둥근 알집 속에서는

      새 생명이 꿈틀거린다 

      세상 속으로

      또 한 세상이 열리고 있는 것일까


      오래 전 꿈속에서 보았던, 

      극락전은 훨훨 날고 있는

      나비처럼 하늘에 걸쳐 있다

      꽃덤불, 華嚴처럼 빛난다   

      

      암벽이 끝나는 곳에서 나는 佛明으로 든다

                               ― 양문규, 「花巖寺에 오른다」전문

 

 

   산은 문명과 멀어질수록 맑고 깨끗해 보입니다.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있음이겠지요. 벼랑 끝 암벽에 뿌리를 박고 있는 나뭇가지에는 붉은 꽃이 피어 있습니다. 천연의 아름다움을 지닌 계곡을 타고 오르다 보면 길을 서두르는 물소리도 산을 이루는 바위도 나무도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조화로운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합니다. 

   화암사 가까이 가파른 벼랑을 타고 크고 작은 세 개의 폭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말입니까. 산과 산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로 맑은 물줄기를 쏟아 내는 폭포가 허리에 쇠줄을 차고 있었습니다. 철제로 만들어진 계단으로 다리가 놓여진 것이지요. 물론 통행에는 편할지 모르지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긴 산허리도 몽땅 잘라내는 판에 이쯤이야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겠지요. 폭포를 보기가 민망스러워 그 붉은 철계단의 다리를 뒤로하고, 겨우 한 사람이 오를 정도의 가파른 벼랑 사이로 아슬아슬 화암사에 올랐었습니다.

   물소리, 꽃잎에 내려앉는 봄볕과 함께 화암사에 오르니 "꽃비가 내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누각이 있었습니다. 나는 우화루 마루 바닥에 앉아 꽃비가 내리는 봄날 산경을 한참동안 구경하였습니다. 영국사 만세루에 올라 은행나무를 바라보는 것처럼 불명산의 풍경을 마음 속에 담아 보았습니다.

   한참을 꽃비를 맞고 서 있다가 골짜기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하얀 암벽의 속살이 내비치는 샘이 있었습니다. 산의 생명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절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 아래 작은 물웅덩이에도 생명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좀 징그럽기는 하지만 둥근띠의 도롱늉의 알들이 참으로 많이 널려 있었습니다.

   화암사, 그 곳에는 세상 속으로 또 한 세상을 열고 있는 극락전이 나비처럼 훨훨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 꿈속에서 꿈꾸었던, 꽃덤불 화엄(華嚴)처럼 빛나는 세계가 불명처럼 눈앞에 펼쳐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암벽이 끝나는 곳에서 티끌을 벗고 그 환한 세상을 들여다보고 왔습니다. 봄날은 짧지만 불명의 세계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함께 할 것입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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