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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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문이 인쇄된 조계사터
‘吾等(오등)은 玖(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獸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 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 자존)의 政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로 시작하는 기미독립선언문을 인쇄한 보성사(普成社)가 조계사터에 있어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조계사 옆길에 있는 수송공원에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였던 보성사 사장 이종일 선생 동상과 기미독립선언문 인쇄를 기념하는 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송공원 자리는 20세기 초 숙명여고가 있던 자리입니다.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보성사가 있던 자리는 아니지요.
사진을 보시면 역시 회회나무가 존재합니다. 바로 조계사 회화나무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회화나무 뒤에 있는 건물은 보성고보 건물입니다. 보성고보는 고려대의 전신입니다. 보성고 - 보성전문으로 시작하여 지금의 고려대학교로 이어집니다. 그 건물은 지금의 대웅전 위치가 아니라 회화나무 앞쪽에서 동쪽으로... 지금의 신도회관 방향으로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서 본 시각입니다.
사진 오른쪽으로 2층 건물이 보기고, 건물 왼쪽에 간판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 희미하여 보이지 않지만 ‘普成社’라고 세로로 써져 있습니다. 바로 이 건물이 기미독립선언문을 인쇄한 보성사 건물이지요. 보성사는 당시 보성고보 교내에 위치했습니다. 보성사는 현재 조계사 위치로 볼 때 대웅전 앞마당에서 수송공원 쪽으로 있었습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을 인쇄한 보성사는 수송공원이 아닌 현재의 조계사터에 있었던 거지요.
이용익이 창설하고 천도교에서 운영하였던 보성학원
보성학원은 1906년 이용익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아어학교’가 폐교된 직후에 그 자리에 관료출신의 이용익이 설립하였습니다. 보성사는 이용익이 보성학원을 설립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설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용익이 서거하고 학교 운영이 어렵자 1910년 천도교 3대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이 인수하게 됩니다. 천도교는 보성학원 인수 당시 천도교관련 서적과 기관지인 ‘천도교월보’를 발행하는 창신사라는 인쇄소가 있었습니다. 보성학원을 인수하면서 보성사와 창신사를 병합하여 보성사라는 옛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보성사는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의 신문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인쇄계를 주도해나갔습니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서적, 학교 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출판문화의 향상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보성학원은 천도교계통에서 운영하던 사립학교였습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을 보성사에서 인쇄하게 된 경위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지하듯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한 곳이 민족종교임을 자부하는 천도교였습니다. 3·1운동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기 위해서는 3월 1일 이전에 인쇄물이 나와야했겠지요. 당연히 천도교가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를 했습니다. 보성사는 열흘 전부터 종이로서 3·1운동을 준비했습니다.
결국 일제는 보성사를 패쇄, 1919년 6월 28일 불태워버렸습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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