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조계사 뉴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
미리도솔(未離兜率)하고 이강왕궁(已降?宮)하며
미출모태(未出母胎)하고 도생이필(度生已畢)이라.
천상천하 유아독존(?上?下 唯我獸尊)하고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하더라.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작년 이맘 때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고 밥 먹고 잠자고 깨어나고 보니까 또 부처님 오신 날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화창한 봄날에 기쁘고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 읊은 게송의 뜻은 이러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솔천 내원궁을 떠나지 아니하고 왕궁에 강림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머니 태 밖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중생을 제도해 마쳤느니라.
여러분들이 생각컨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어떻게 부처님께서 도솔천 내원궁을 떠나지 않으시고 왕궁에 강림하셨으며 어머니 태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고 중생을 제도해 마칠 수 있었는가 의아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 게송은 이러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룸비니 동산 무우수 나무 아래에서 가지를 하나 턱 잡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면서 전후좌우 일곱걸음을 걸으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세상에 화현하신 뜻입니다.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 위 아래 나 홀로 높다)이요
욕계 색계 무색계 일체삼계가 다 고통스럽지 않은 곳이 없으니 내가 너희를 가장 편안케 해 주리라 하며 이 세상에 화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읊은 미리도솔(未離兜率)하고 이강왕궁(已降?宮) 이 게송은 부처님께서는 오고 감이 없는 이치라는 뜻입니다.
설혹 화현신으로 나타난 이 육신은 오고 감이 있지만 이 육신을 끌고 다니는 하나의 주인공은 오고 감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불이라 하고 이것을 부처라 하고 이것을 우리가 추구하는 깨달음의 세계라 하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바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신심명에 보면 집지실도 필입사로(執之?度 必入邪路)하면 방지자연 체무거주(放支自然 體無去住)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는 집착 너라는 집착 부처라는 집착 중생이라는 집착을 하다보면 진실을 잃어버리고 사도(삿된것)에 들어간다 했습니다.
좋고 그르고 많고 크고 예쁘고 밉고 증오하고 사랑하고 하는 것들이 바로 집착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집착이라는 것은 나(我라)는 욕심덩이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욕심이 없으면 집착도 없고 집착이 없으면 성성적적(??寂寂是) 요요한 경지에 다다라서 더 이상 바랄 것도 버릴 것도 없고 크지도 작지도 아니하고 늘어나지도 부족할 것도 없고 채워야할 이유도 비워야할 까닭도 없는 그런 자연의 이치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방지자연 체무거주(放支自然 體無去住)한다 했습니다. 즉, 그런 욕심스런 생각을 버리고 집착하는 생각을 놓아 버리면 자연히 이치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초파일이면 부처님전에 등을 밝히고 싶은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욕심이요 집착입니다.
부처님이 이 법계에 가득하신데 하필이면 법당에 모셔놓은 부처님만 부처님이라는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초를 켜는데 초는 빛을 밝히면서 자기 몸을 사뤄 버립니다.
나를 그렇게 사뤄 버리지 않고서 남에게 좋은 것을 보여줄 수 없고 기쁜 마음을 전해줄 수 없고 즐겁게 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켜는 등은 시간에 불과합니다.
비바람에 꺼지지 않게 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망을 치고 바람막이, 비막이를 하며 정성을 다하여도 꺼집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등을 켜는 마음은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불이 나도 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등을 켤 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등을 가지고 시현 하셨습니다.
지혜의 등을 가지고 어둠과 슬픔과 고통을 거두어 주고 분별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시현하셨습니다.
그 이치를 참으로 알 때 부처님께서 도솔천 내원궁을 떠나지 아니하고 왕궁에 강림하신 이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어머니 태 밖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중생을 제도해 마친 이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화엄경에 보면
교법은 아난존자의 입을 통하여 넘쳐 났고
마음의 등불은 가섭존자의 마음을 통해서 넘쳐났으되
말이 아니고서는 말없음을 들어낼 수 없고
형상 없이는 그 형상의 이치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만 부득이 이와 같이 설법을 하고 의식을 하고 참회를 하고 기도를 하고 염불을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진실로 여러분이 밝히는 등은 어떤 등이어야 할까요?
소외된 계층에게 부처님의 자비의 손길을 주어서 그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때 그것은 영원한 등불인 것입니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것이 등불이 아닙니다.
촛불은 한계가 있지만 마음의 등불은 끝이 없습니다.
그 이치를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일년에 단 한번이라도 이웃과 아픔을 나눌 수 있고 소외되고 음지에 있는 분들에게 부처님의 자비의 사상을 함께 나누어 스스로 그늘을 벗어나 단 한순간이라도 기쁜 마음을 누릴 수 있게 여건과 환경을 조성해 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실한 지혜의 등불이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요. 영원한 등불인 것입니다.
그 등불을 어떻게 켜야만 하겠습니까?
오늘 4월 초하룻날 조계사 법당에 오신 것은 아마 여러분들의 소원과 대원을 모두 가지고 오셨을 것입니다.
또한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가지고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건은 물건이고 돈은 돈이고 과일이나 쌀이나 초는 초이고 그것을 가지고 온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소원 성취, 대원 성취를 위해서 부처님께 기도하고 참회하고 염불하고 정진하고 간경하는 그 놈이 어떤 놈인가?
그것을 참으로 살필 때만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참뜻을 봉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봉축함은 시방세계 모든 인류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뿌리가 될 것입니다.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로서 모든 선의 뿌리를 길러낸다 하셨습니다.
첫째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믿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떡 주고 돈주고, 쌀 주고, 명예 주고, 수명 늘려 준다고 믿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잘못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복 짓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수명을 장수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의 수명을 늘려 주시는 것이 부처님이십니다.
옛날에 어느 행자가 스님께 와서 중노릇이 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이 세상에 살다보니 욕심스러워져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원망스럽고 또한 욕심이 채워지면 놓치지 않으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며 살다보니 모든 것이 고통스러우니 좀 자유롭게 살기 위하여 중이 되고 싶습니다."하였습니다.
스님이 행자의 관상을 보니 삼일 후면 죽을 상이라 차마 그런 말은 못하고 집에 갔다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나타난 행자의 관상이 장수상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놀란 스님이 말하기를 "네가 이곳을 나가 집에 갔다 온 동안의 일과에 대하여 소상히 이야기 해봐라." 하였습니다.
행자가 답하기를
"아무런 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마침 집에 가는데 크게 홍수가 나서 개울에 물이 엄청나게 흘러가는데 수많은 개미떼가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일체의 생명체가 있는 것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셨는데 아! 부처님이 죽는구나 하여 썩은 나뭇가지를 개울에 대주어 개미떼를 건네 준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무릎을 탁 치시며
-그러면 그렇지 네가 수많은 생명을 살려 주었으니 어찌 네 수명이 연장이 안되었겠느냐! 하였답니다.
저 생명을 살려서 내가 어떤 이득을 바라며 살린다면 어찌 내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댓가를 바라는 장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사라 하는 것은 이득을 바라는 것이라 때로는 밑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댓가를 바라지 아니하고 베푸는 일은 나라는 상을 허물어 버리니 너라는 상이 없어져서 나와 너라는 분별상이 없어지매 시비와 분별과 투쟁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 뜻을 가르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이 땅에 시현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부처님 같이'라는 슬로건은 불교에 국한된 자축의 의미가 아닙니다.
법당에 모셔 놓은 부처님만 진실한 부처님이 아닙니다.
법당에 모셔놓은 동불은 용광로를 건너갈 수 없고 목불은 나무를 건너갈 수 없고 토불은 물을 건너갈 수가 없다 했습니다.
심즉불이라 -우리 마음이 곧 부처님입니다.
차별없는 마음 평등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분별하지 않는 마음 미워하지 않는 마음 너와 나를 똑같이 동일시하는 마음으로 우리도 다같이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탐하지말고 더불어 사는 사회 동체대비를 실현하는 그런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도 부처님 같이'라는 슬로건을 걸었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부처님 오신 날을 기뻐하고 봉축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지금 가진 욕심이나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집착이나 분별을 모두 버리십시요.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아니하고 다른이들이 하는 일을 찬탄하고 기뻐하고 추앙할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생각을 바꿀 때 진정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할 수 있고 부처님 오신 뜻을 깨닫는 불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여러분의 고통은 영원히 소멸되고 희희낙락하고 기쁜 일만이 매일매일 함께하는 좋은 날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영명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믿기만 하고 알지 못하면 무명만 더하고
알기만 하고 믿지 않으면 삿됨만 더한다 하였습니다.
믿으면 믿는 이치를 알아야 하고 알면서 믿지 못하면 삿된 것만 더합니다.
화엄경에도
-많이 알고 많이 배우고 많이 들었다 치더라도 행하지 않으면 여래(즐거운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공연히 글로서만 시시비비를 가리고 이론으로서만 노다지 하는 것이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4월 초파일에 등을 밝히되 정말로 어두운 곳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간적으로 보면 캄캄한 곳에 불을 밝히면 환해집니다.
마음이 어두울 때는 마음의 등불을 켜야 합니다.
마음의 불을 밝히면 색안경을 썼다 벗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검은 안경을 쓰면 검게 보이고 붉은 안경을 쓰면 붉게 보이고 노란 안경을 쓰면 노랗게 보이지만 흰안경을 쓰면 제 모습대로 다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비바람에 꺼지지 않고 영원한 등불을 밝힐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등불입니다.
마음을 뒤집어서 새로운 마음을 싹 트일 수 있고 내면의 세계에 들어있는 마음을 드러내어 고통의 세계를 집어던지고 즐거움의 세계 기쁨의 세계 행복의 세계에 머물 수 있기를 기원 드립니다.
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昨??中 頭頭佛(작야몽중 두두불)
今朝開眼 物物薩(금조개안 물물살)
遠看窓? 處處主(원간차외 처처주)
春來草葉 念念一(춘래초엽 염념일)
어제 저녁 꿈에는 머리 머리마다 다 부처이더니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물건 물건마다 보살 아닌 게 없더라.
창밖으로 쳐다보니 곳곳마다 주인 아닌 곳이 없고
봄이 오매 모든 풀과 가지들의 생각생각이 전부 하나이더라.
一念卽心(일념즉심) 無量劫(무량겁)
한 생각에 무량겁이 다 들어있고 생각 하나만 바꾸면 그것이 행복이고 기쁨이고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숨어있는 생각을 발현하도록 마음의 등불을 가져온 것이 4월 초파일인 것입니다.
아무리 등을 밝히고 초를 밝히고 향을 피우고 꽃과 과일을 부처님께 바친다 하더라도 마음이 바뀌지 못하면 그것은 의식이요 마음이 바뀔 때 만이 진실한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봉축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에 이르러서 기쁨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초파일을 성스럽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고 부처님을 봉축하는 마음이 영원하여 남을 사랑하고 형제같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동체대비 사상을 구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여러분들의 고통을 전부 거두어 주시려 오셨습니다.
'이 세상을 쳐다보니 다 고통스럽더라 그래서 내가 편안케 해 주리라.' 하셨습니다.
저도 부처님 같은 원력을 가지고 삽니다.
여러분 고통이 있으시지요?
그 고통을 다 제게 주십시요.
일체중생의 고통은 다 끌어안고 가리라는, 그리고 일체중생이 기쁨과 환희 속에서 매일매일 기쁘게 춤추며 살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제게 있는 걸망은 수십년 동안 모든 고통을 쓸어 담아도 넘치지를 않습니다.
그 걸망은 들어가는 주둥이도 없고 밑바닥도 없습니다.
그래서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를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고통을 제가 가져가는 대신 그 걸망 속에 들어 있는 '만족'이라는 보물을 조계사 법당에 다 놓고 가겠습니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가져 가셔서 신바람나게 잘 지내시고 여러분의 고통의 씨앗인 물건은 이 법당에 다 두고 가십시요.
만공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돈은 쓰는 데 따라서 복이 되고 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잘못 써서 고통받거나 미워하고 시비하고 갈등하고 싸우지 말고 조계사 법당에 잘 쓰시고 빈 주머니에 '만족'이라는 보물을 가득 담아 가시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오늘 법회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요.
-정리: 김수정 (조계사 보도부 법문녹취팀)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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