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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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부처 등지고 바깥에서 무얼 찾나
참으로 큰 법문은 법상에 있는 법사에게 듣는 것이 아니고 일상 생활 속에서 듣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끼리 이야기 할 때나 시장 바닥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도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교의 진수이고 가장 큰 법문인데 우리는 그런 곳에서 법문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법문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종교안에 들어 와 조계사에 와서 법문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의식 구조가 고정 관념에 의해 막혀있으므로 관념의 뿌리가 비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의식이 열려 그때서야 눈과 귀가 열려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번 묻겠습니다.
옛 선사가 말하기를 “너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빼앗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한참 있다가) 여러분 가운데 이 말이 와 닿아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저런 말씀을 하셨을까 알쏭달쏭 하다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저는 가끔 이런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 네 안의 부처를 만나려거든 네가 알고 있는 부처를 잊어버려라 고 말합니다. 여러 경전을 보고 공부를 해야 불교를 알 텐데 왜 불교를 잊어버리라고 말하는지 궁금할지 모르나 이것이 선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증득하고 나서 일체 중생을 둘러 보니 모든 중생이 자기와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고 자기 안의 부처를 등지고 바깥에서 자기가 알아서 만든 부처를 경험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병통이 생깁니다. 그리고 길이 막히는 것이죠. 그래서 옛 선사들은 너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빼앗으리라고 하셨던 겁니다.
불교는 자기 관념이 지워져 버릴 때 불씨가 나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지 알아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가끔 우리가 앎이 필요한 것은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내 안의 자성불을 바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부처인지도 모르고 헛것을 쫓아다니기에 선사들은 허상을 뺏어 버리겠다는 뜻으로 주장자의 비유를 들었던 것입니다. 이 주장자가 무엇입니까?
선이라는 것은 면도칼 보다도 날카롭게 마음의 어리석음을 베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은 언어만 달랐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선과 교를 구별하는 자체가 잘못된 일입니다.
<천수경>에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 도산자최절(刀山自催折) 아약향화탕(我若向火湯) 화탕자소멸(火湯自?滅) 아약향지옥(我若向地?) 지옥자고갈(地?自枯渴)’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칼산 지옥에 내가 가면 칼산이 절로 무너지고 화탕지옥에 가면 화탕이 절로 없어지고 모든 지옥에 가면 지옥이 절로 말라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법회 때마다 <천수경>을 그냥 외우지만 선승에게는 그대로 선법문입니다. 내 안에 쌓여 있는 어리석음을 없애고 내가 주인임을 깨닫게 되면, 칼산을 만나면 칼산이 없어지고 지옥도 극락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어있음을 경험하여 칼산이 비어있음을 만나면 그 칼산은 무너질 수밖에 없지요. 지옥 또한 그렇지요. 내가 만나는 모든 경계가 다 그렇습니다. 공부를 해서 내가 나의 참 주인이 되면 동대문 시장에 가 있어도 시장 상인들이 불보살이 춤추는 집단으로 보이게 됩니다. 시끌벅적한 시장이 아니지요. 내가 가는 곳이 극락이고 그 세계가 바로 불국토이지 나하고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 근본적인 것을 자각하지 못하기에 생활하고 불교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머리 속으로 이해하는 불교인이 많아져 이상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이상향에 묶여 있어서 생활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어요.
불교의 가르침은 인연법입니다. 물을 끓여 차를 마십니다. 그러면 차향이 나서 향기롭지요. 그것을 마시면 오줌이 되어 나옵니다. 오줌은 더럽다고 느끼죠. 그 오줌은 땅속으로 들어가 사라집니다. 그 물을 나무나 대지의 식물이 먹습니다. 강이나 호수의 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 물은 비가 오면 다시 대지를 적시고 만물의 근원이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물의 성질이 변했습니까? 형태는 변했지만 그 본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땅에 스며들면 물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안보이니깐 우리는 물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 안의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무명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불성이 있는데 그 의식이 무명으로 덮여져 내 안의 불성을 등져 버리기에 어리석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선사들은 이 어리석음을 빼앗기 위해 주장자 설법을 하신 겁니다.
굳이 12연기니 ‘안이비설신의’를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쉽게 생활속에서도 인연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연법을 알게 되면 나를 집착하지 않게 되고 어떤 순리를 따르기에 자기 주장을 안 하게 되고 나라는 생각이 안 일어나서 본성으로 돌아오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인연법을 설파하셨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이유는 불교가 너무 교리적인 입장에 집착되어 있기에 불교가 불교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습입니다. 부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수행을 통해 깨달아 있는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지 없는 것을 만들어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것을 바로 보는 것이 ‘팔정도’ 입니다. 그렇게 보면 선과 교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이 사회에서 어떻게 선을 가르칠 수 있을까가 최근 저의 화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20년간 여러 선방에서 수행을 했고 이후 이후 서양에서 20년간 포교하며 수행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왜 이 문명사회에서 불교가 필요한지 확연히 느꼈습니다.
한국은 방향도 없이 서양의 물질문명의 그림자를 쫒고 있고 물질만능주의를 배우고 있지만 서양에서는 물질에 대한 회의로 그 해답을 불교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서양을 향해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고 있는 사람과 한편으로는 정신적 만족을 희구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부처가 자신 안에 있다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활속에 불교가 있음을 확연하게 경험했습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깐 중생이 사는 생활이 불교를 전혀 안 떠나 있다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어렵다고 합니다. 특히 선불교는 현실과 괴리되어 뒷방에서 앉아 혼자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쉬운 방법을 찾기 위해 제3 수행법이라고 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올바른 살아있는 선은 생활속에서 있는 것이지 이것을 떠나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은 밥 먹을 때나 시장 갈 때나 친구를 만날 때나 항상 그 자체가 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혼자 참선할 때도 시끄럽다거나 방해된다 주위를 탓하지 마세요.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그렇게 좁고 협소하고 너그럽지 않고 융통성이 없다면 불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처를 붙들고 있는 한 그것이 내 마음을 가려서 조그마한 불교를 만듭니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부처를 버리면 내 안에 부처가 있다는 사실을 직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드러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듣고 손으로 일을 나누면 그것이 참 불교입니다. 어려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선에 주눅들지 마세요. 저는 지금도 아침 저녁으로 한 시간씩 앉아 참선하는 것 이외에 특별히 수행을 따로 하지 않습니다. 다만 생활 속에 진리가 있음을 경험해가고 있을 뿐입니다.
예전에 저도 개인적으로 해인사에서 하루 12시간에서 20시간까지 정진을 10여년 동안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늘지 않고 어렵게만 느껴졌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화두도 버리고, 깨달으려는 생각도 버렸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니까 거기서 공부가 시작이 되더라구요.
수행은 스승을 믿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스승을 믿어야 내 생각을 안 내게 됩니다. 생각을 안 내다 보니 아상이 없어지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연이 됩니다. 거기서 화두를 조금만 해도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불성이 있으니 나도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혼자 앉아서 수행합니다. 그러면 절대 이 공부가 늘지 않습니다. 스승을 믿어 버리면 항상 스승이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감히 삿된 생각이나 알음알이를 낼 수 없게 됩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에서 내 안의 싹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모두 깨달음의 씨앗이 있는데 그것이 나올려고 하면 관념의 생각들이 뭉개버립니다. 그래서 부처의 싹이 나오려 하다가 뭉개지고 뭉개지고 하기를 수 천번 같은 실수를 반복해오며 살아 왔던 것입니다.
전강 스님이 수원 용주사에 계셨을때 저는 큰스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매일 새벽 법문을 하셨는데 하루는, 육조혜능 스님과 남악회양 스님이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다’는 말을 인용했는데 제가 그 말에 그냥 팍 놓아지더라구요. 그리고 20년간 제방에서 공부했던 것을 돌아보니깐 눈물이 펑펑 나더군요. 전강 스님께 여쭤 보니깐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도 아침에 앉아 있다가 어느 날 새벽에 물 항아리 밑이 깨져 나가는 것을 경험 했습니다. 거기서 변화가 오더라구요. 내가 공부를 이렇게 해야겠다, 보임을 이렇게 해야겠다는 것도 아니었는데 생활 속에서 변화가 와서 어리석음이 자각으로 바꿔지더군요. 그러면서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나고 그러면서 성격도 고쳐지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지요. 그러고 나니깐 세상에 어려운 일들이 적어지더라구요.
여러분도 스승을 믿으세요. 제 경험으로는, 믿음이 없을 때는 스승의 법문이 내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지만 믿고 난 뒤부터는 하찮은 말이라도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 생각을 없애 버리고 아만을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아만이 없어지니 마음속의 불성이 되살아나 의심이 생기고 화두를 들면 의심이 끊어져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생활 속에 불교가 다시 살아납니다. 모든 것이 불법 아닌 것이 없다는 이야기죠.
매일 새롭고 생활의 변화가 와요. 날마다 변화가 오기 때문에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아요. 그러면 여러분도 선사들의 어록을 한번만 봐도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자만하지 말고 꾸준히 수행하세요. 그러면 세상 모두가 나와 연결이 되어 있고 내가 부처라는 믿음이 확연해 질 것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생활 속에서 수행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묻고 답하기’ 현장
▲선수행을 많이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선은 곧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많고 적음이 어디 있습니까? 불교는 바로 들어가야지 옆이나 짐작으로 들어가면 안됩니다. 꼭 깨달아야 아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바로 믿는 것이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많이 한다, 많이 했다는 생각은 선과 멀어지는 것이므로 생각을 바꾸세요.
▲저의 경우 화두 참구를 하다보면 화두 염불이 되는 것 같고 사량분별에 떨어집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행할 때 그런 의심이 들 때는 내가 혹시 혼자 공부하고 있지 않나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절대 혼자 붙들고 있으면 공부가 안됩니다. 스승을 바로 믿고 행해야 합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은 단순히 스승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선사들과 불조를 믿는 길로 연결됩니다. 그래야 의정을 끊을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 현웅(?雄) 스님
1967년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68년 사미계를 받았다. 71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20년간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경봉, 성철, 구산, 전강 스님을 모시고 수십 안거를 성만했다. 1986년 미국 시애틀에 돈오선원을 창건한 은사스님의 유지를 이어 현재 미국 버클리 육조사에 주석하며 해외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5월 서울 가회동에 육조사를 창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참선을 지도할 계획이다. 지난해 선문답집<묻지 않는 질문>(민족사 펴냄)을 출간하기도 했다.
정리- 김두식 기자·| 현대불교신문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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