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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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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반딧불이가 날다

  • 입력 2004.06.08
  • 수정 2024.11.19

  여름 속으로 들어선 천태산 영국사는 발 디디는 곳마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은행나무의 짙은 녹음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폭포수처럼 싱그럽습니다. 은행나무는 여름 내내 영국사를 찾는 내방객에서는 감로수와 같이 마음에 흰 그늘을 내려줄 것입니다.   

   나는 저녁 공양도 잊은 채 은행나무 흰 그늘 속에 몸을 뉘이고 천태산의 끝자락 국사봉에서 대자연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를 바라봅니다. 어둠이 내리는 이 때쯤에 만물에는 영혼이 깃드나 봅니다. 하나의 풍경, 그 내면에 영원을 부여하는 어둠은 물상들을 제 자리로 돌려 놓아주지요. 이 세상과 저 세상이 합일되는 시간이 곧 해질녘이 아닐까 합니다. 해질녘 땅거미가 갈리는 이 시간에 즐겨 포행길에 나서는 연유가 여기 있습니다.       

   스님은 저녁 예불을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조용히 법당을 빠져 나와 어둠이 내리는 곳으로 향합니다. 발길 닿는 대로 거닙니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저 마음의 상을 따라 바라보면서, 느끼면서, 생각하면서 마냥 행복한 마음 하나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둠 속에 깃들고 있는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싫은 아름다움입니다. 나도 어둠 속에 묻힐 것입니다. 절 뜰의 활짝 핀 불도화도 어둠 속에 꽃송이를 지웁니다.

   새로움이란 낡고 오래된 것들과의 차별에서 생겨나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은 오래된 것들보다는 새로 형성되는 문화를 즐기며 살아갑니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구습으로 치부되어 그것들을 새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것들보다는 눈에 익은 옛 풍경 속에서 삶의 양식을 찾고 그 속에서 삶의 기쁨을 누리고 행복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내가 보고 즐기는 풍경이란 이미 우리 정서에서 멀어져간 옛 문화에 배어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사라져 가는 이 땅의 서정과 풍물 속에서 따스한 마음을 읽어내자는 것이지요. 되도록 자연과 함께 공생의 문화적 가치를 향유하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어둠이 깊습니다. 별들이 총총총 빛나면서 어둠은 깊어 가는 것이겠지요. 여름 밤 산중에서 바라보는 별들이란 마치 맑고 깨끗한 물소리를 닮은 풀꽃 같이 예쁘게만 느껴집니다. 하늘의 별들이 내려와 풀꽃을 이룬 것인지, 지상의 풀꽃이 하늘로 올라가 별을 이룬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여름밤의 별들은 물빛 머금은 풀꽃을 닮아 푸르릅니다. 

   살랑이는 밤바람을 맞으며 만세루로 올라 별을 헤아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둠 저편으로 무언가 번쩍이며 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혹 뭘 잘못 본 것은 아닌지, 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불빛이 일었던 것으로 달려가는데요, 작은 불빛은 꺼질 듯 꺼질 듯 하면서도 반짝 반짝이며 이내 풀섶으로 사뿐 내려앉는 것입니다. 반딧불이었지요.

   얼마간 만에 보는 풍경인지 모릅니다. 반딧불이를 보았던 기억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니 말입니다. 제 어릴 적에는 고향의 밤하늘에는 무수한 반딧불이가 날고 있었습니다. 마당에서도 골목에서도 들녘에서도 별이 있는 날이면 반딧불이는 바람에 날개를 달고 어둔 밤을 밝혀 주었던 것입니다. 호롱불을 끄고 자려고 누워서까지도 창호지 문 밖으로 그 빛을 볼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날 밤 제가 그 작은 불빛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은 근 30년만에 맛보는 감동이었습니다.

 

 

    산골 지내리 밭두렁 길을 따라서

    다시 비탈밭을 내려서면

    아련히 떠오르는 불빛 거기 있다

                                      ― 양문규, 「반딧불」전문    

 

    어둔 세상 외로운 발자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는

    풀섶의 뜨거운 눈시울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제 한 몸 불태워 던지고

    하늘 저편 시린 별빛으로 떠오르는

    우리들의 사랑

 

    둥구나무처럼

    아직도 말없이 거기 있다

 

 

 

   ‘반딧불이’는 반딧불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개똥벌레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산촌의 정서대로 ‘반딧불’, ‘개똥벌레’라고 불렀습니다. 반딧불이가 빛을 깜박 깜박이며 나는 것은 사랑을 나누기 위한 수신호라고 들었습니다. 암수 서로 짝을 찾아 생명을 키우는 것이겠지요. 특히 수컷의 반딧불이는 일생에 단 한 번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빛을 발한다고 합니다. 제 한 몸 던져 사랑을 나누고는 이내 사라진다니, 이보다 더 고귀하고 소중한 사랑이 천지간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언젠가 나는 신문지상에서 반딧불이 공원을 조성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충남 천안시가 반딧불의 집단 서식지인 광덕면 광덕, 지장, 보산원리 일대 풍세천 주변에 4만2천3백5십 평을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받아 ‘생태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해마다 전북 무주에서는 반딧불이 축제가 치러지고 있습니다. 혹 반딧불이를 보호하고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반딧불이를 죽이는, 그런 축제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반딧불은 생래적으로 밝은 불빛과 소리를 싫어합니다.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무슨 장터처럼 마시고 즐기는 그런 축제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우리는 지금 전지구적 자본의 물결에 떠밀려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남이야 어찌 됐든 자기 자신만 살아 남으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극에 달해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도시화와 산업화는 농경 문화에 기초한 전통 문화를 모조리 박물관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살림의 문화’였습니다. 물론 경제 발전이 가져다주는 편리와 문명의 혜택을 모조리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재래의 공동체 문화가 해체된 자리에 경제 논리에 우선한 문화산업이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면, 살림과 공생의 문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특권층을 위한 문화 일변도로 흐를 수 있겠지요. 이는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문화의 타락이고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를 역행하는 처사겠지요. 생태 공원도 그런 차원에서 조성된다면 아닌 만든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생태계의 문화적 유산을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하여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합니다. 옛 선조들이 그랬듯이, 환경공원을 조성하고 천연기념물을 지정하는 것도 좋지만, 문제는 자연-생태 공간을 그대로 살려 상생하는 삶을 이루는 ‘함께하는 자연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문화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삶을 간직한 문화 말입니다.

   위에 소개한 시는 유년의 추억을 회상하며 쓴 시입니다. 아랫마을에 밤마실을 다녀올 때나, 학교에서 늦게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반딧불이는 제 길동무였습니다. 작은 생명체이지만 소중한 삶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처럼 공동체 삶의 일원으로 회상되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반딧불이가 서식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영국사는 생명체의 보고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한데 어우러져 공존하는 총체적 삶의 근거지가 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반딧불이를 보고 싶다면 영국사 아랫마을 누교리에 차를 주차하시고 굽은 외길을 따라 물소리를 들으며 걸어서 오세요. 그리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마음속에 추억으로만 담아 가시기 바랍니다. 여름밤 작은 풀벌레가 반짝반짝 발하는 반딧불이 불빛에서 삶의 작은 희망을 향한 겸손과 연대의 미덕을 배웁시다. 녹음이 짙어 가는 계절, 영국사에는 지금도 반딧불이가 날고 있습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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