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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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깨어있음이 얼마나 행복한가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하면
승조항사칠보탑((勝造?沙七寶塔)이니라.
보탑필경화위진((寶塔必景化爲塵)이나
일념정심정정각(一念?心成正覺)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고요히 앉아 잠시라도 일념에 들면
그 공덕이 항하사 모래수의 칠보탑을 쌓는 것보다 크다.
보탑은 반드시 쇠락하여 무너지고 흩어져 흔적이 사라지지만
한 생각 맑은 마음은 깨달음을 이루게 해주기 때문이니라.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 가지 가치를 추구합니다. 물질과 정신적 가치입니다. 이 게송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우월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질 위주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돈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우리는 정신적으로 고뇌하고 휘둘리게 됩니다. 그런 때를 대비해 미리미리 정신적 부(富)를 쌓아 두어야 합니다.
최근 들어 ‘간화선 위기론’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지적이 나오게 된 것은 내ㆍ외적인 요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외부적인 요인은 10여 년 전부터 남방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아봐타 마음수련, 요가명상 등 불교 유사수행법이 전래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화선 풍토의 우리 선(禪)이 상대적으로 비교됨에 따라 일련의 문제들이 제기됐다고 봅니다.
저는 오늘 간화선 전통이 이러한 상황을 겪게 된 문제를 우리 간화선 풍토 안에서 한번 짚어보려고 합니다. 또 재가불자가 ‘일생생활 속에서 선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재가불자 선수행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간화선 풍토의 문제점 몇 가지를 짚어 보겠습니다. 물론 선의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선 그 자체는 흥할 것도 없고 쇠할 것도 없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간화선 상황이 여기까지 온데에는 간화선 풍토의 내적ㆍ구조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번째 문제점은 조실 스님들의 역할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조실 스님은 조계종의 선풍을 주도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배로 비유하면 선장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조실 스님들께서 하시는 역할이 많아졌습니다. 법문이다, 불사다, 행사참석이다 해서 밖으로 다니시기 때문에 안거 중에도 조실 스님 뵙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문이나 공부점검도 원하는 때 듣고 묻기가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간화선 풍토에서는 법에 관해 묻는 일은 오직 조실 스님께서 전담하시는 일이라 초학자(初學者)가 공부 길을 물어가며 바로 가는 일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이 작은 일같지만 사실은 선원의 분위기나 선객들의 의식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감히 청을 들인다면, 조실 스님께서 밖에 나가서 하시는 법문은 법사 스님들에게 맡기고, 불사는 주지 스님들이 주관하게 해서 가급적이면 선방에서 정진하는 수좌들에게 정성을 더 기울여 주실 수는 없습니까? 그래야 간화선 풍토가 새로워진다고 믿습니다.
둘째는 계율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게 문제입니다. 불교는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근본으로 합니다. 정혜를 아무리 잘 닦아도 행동과 사는 모습, 마음 쓰는 데서, 계행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수행을 잘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셋째, 간화선 전통의 한문투 설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한글세대가 게송위주의 큰 스님의 법문을 경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재가불자들은 더욱 어렵습니다. 수백전의 그 시대에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의심을 유발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그 시대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넷째는 선수행자의 구도자세가 느슨한 점입니다. 지금 선방이 양적으로는 팽창해 있으나 질적으로는 문제가 있습니다.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법을 위해서 몸을 바치겠다’는 구도열은 옅어졌습니다. 이를 위해서 수행 자체를 즐기며 공부하는 방법이 모색돼 좌선 일변도 수행풍토를 개선해야 합니다.
다섯째는 그간 선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역할을 중시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입니다. 최근에는 선학에 관심 있는 교수들을 초빙해서 지도급에 있는 스님들이 함께 간화선 지침서를 만드는 등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수좌 스님들이 실참실구를 중시하다보니 선학자를 약간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리학에도 이론물리학자가 있고 실험물리학자가 있듯이 선학자들이 발표한 이론이 적절하다고 생각될 때, 수행자가 그런 점을 자기 수행에 적용해 보는 것도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고 봅니다.
여섯째는 여러 가지 수행법이 도래하는 문제입니다. 기존의 간화선 자체에 문제가 있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수행법에 솔깃해하니 간화선 수행방법 풍토에서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습니다. 간화선 수행자는 이 같은 불교유사수행법을 외면만 할 것이 아니라 직시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위빠사나를 직시하고 그 원리를 잘 알아 화두공부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수의 불자들이 진지하게 정법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도 간화선 발전을 저해하는 한 문제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일도 골치가 아픈데 새삼스럽게 어려운 불교를 할 게 있나. 마음이 시끌할 때 절에 가서 마음이나 좀 쉬다오면 되지’ 하는 안이한 생각과 무관심이 문제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재가불자들이 정법을 알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면 된다고 봅니다.
그럼, ‘선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은 연기의 세계입니다. 한 개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데는 많은 관계가 얽힌 인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특별하게 구속하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지도 편안하지도 못합니다. 선은 이러한 현대인의 상황을 얽매임에서 풀어주고 편안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번 법회 주제를 ‘선-스스로 만드는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선수행을 통해서 이미 우리 속에 있는 행복을 스스로 찾아 써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다음 순간을 알 수 없는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삶의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뿐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항상 자신을 살피는 선을 일상화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살며 넓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을 행복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외부적인 조건이 갖춰져야만 합니다. 여기에 비하면 선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본래 갖춰진 행복을 찾아 쓰는 조건 없는 방법입니다. 그렇기에 조금만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을 성실히 이행하면서 간단히 화두만 드는 것으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화두를 드는 집중력과 지속력에 의해서 번뇌 망상의 구름이 사라지면 곧바로 맑은 기쁨이 드러나고 행복감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선은 화두를 들고 공부함으로써 집중력, 지속력, 기쁨, 행복감, 일념지경으로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 노력하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가불자들은 생활 일선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가족간에 서로 마음을 써야할 일들이 많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도님들이 쉽게 수행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생활을 우선으로 하십시오. 그리고 틈틈이 공부를 하면서 서서히 화두공부가 몸에 배이도록 하세요.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듯이 마음에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깨달아야 한다든지 성불해야 한다는 말은 접어두고, 지금 현재 이 순간에 자기가 지금 붙들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정성스럽게 사는 것에서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화두만 타파하면 된다는 강박관념보다는 평소에 화두 외적인 문제에도 마음을 쓰십시오. 마치 농사짓는 사람이 농사일을 하듯이 말입니다.
봄이 오면 농부는 삽이나 괭이를 들고 밭에 나가 먼저 단단해진 땅을 뒤집어 밑거름을 하고 씨를 뿌립니다. 그처럼 참선하는 사람은 먼저 계를 잘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괭이나 삽으로 묵은 밭을 일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선행도 평소에 착실히 쌓아아야 합니다. 이것은 밭을 일군 곳에 밑거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에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는 것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근본화두를 챙기는 것입니다. 계를 지키고 선한 공덕을 쌓는 것은 밖으로부터 자신을 안으로 고쳐가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것은 안으로부터 자신을 밖으로 고쳐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안팎이 만날 때 원만한 인격을 점진적으로 갖춰져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화두를 앞세워 놓고 일상생활을 해나가려 하지 말고, 지금 현재 자기가 붙들고 있는 일을 평소보다 적극적으로 재미있게 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해야 할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일을 또박또박 잘 해나가다 보면,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으로 인해서 기쁨이 생겨나고 그곳에서 만들어진 행복감이 차분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여유가 생깁니다. 저는 그 마음 바탕에 ‘이뭣꼬, 이뭣꼬’ 알 수 없는 의심을 꼭꼭 챙겨나가라고 합니다. 그렇게 오래오래 자연스럽게 하다보면, 화두를 또박또박 챙기는 마음이 일상생활 전반에 서서히 스며들게 됩니다. 나중에는 ‘이뭣꼬’ 하는 알 수 없는 의심이 바탕을 이룬 곳에서 일상생활의 모든 일들을 진행해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를 ‘힘을 얻은 때’라고 합니다.
깨달아야 한다든지 성불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화두를 들고 늘 깨어있는 그 자체를 행복하게 누리세요. 그래서 그러한 순간순간을 우리의 일상에서 조금씩 늘려가는 것으로 수행을 삼으세요. 그러다보면 점차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밝아져서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실상을 깊이 체험하게 되고 집착을 조금씩 덜게 됨으로써 삶의 모든 문제에 급급하지 않고 점차 이상에서 초연해지고 자유로워집니다.
재가불자 여러분. 우리는 가끔 마음을 크게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 살고 못사는 일도 어제 죽은 사람을 생각하면 살아 있다는 이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히려 그런 큰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주변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시원스럽게 풀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또 ‘성불하는 좋은 법 만난 인연’을 행복하게 생각하면서 화두의심, 알 수 없는 ‘이놈’을 잘 챙기십시오.
‘묻고 답하기’ 현장
▲진흙소가 쟁기질 한 이치를 알고 싶습니다.
-진흙소가 되어 쟁기질 해보세요. 그럼 알 것입니다.
▲행간의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수행해서 스스로 아세요.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 의심이 성성합니다. 그러나 잠만 자면 화두 의심은 온 데 간 데 없고 잠만 잡니다. 어떻게 화두 의심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잠이 오면 자세요. 깨어있을 때 화두를 잘 챙기세요.
■ 도현(道?) 스님
일반은 물론 불교계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도현 스님은 1963년 부산 범어사에서 입산 출가해, 72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은사는 범어사 덕명 스님으로, 법랍은 40년. 현재 스님은 전기도 수도도 들어 오지 않는 지리산 연암토굴에서 홀로 수행정진 하고 있다.
정리- 김철우 기자| 현대불교신문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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