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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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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행사

원효의 일심사상

  • 입력 2004.06.18
  • 수정 2025.01.15

오늘은 원효스님의 저서인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발심수행장』은 수도하는 사람의 결심과 그의 가질 바 태도를 가르친 내용으로서, 불교 초심자에게 적절한 교과서 같은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적멸궁에 계심은 오랜 세월 동안에 욕심을 버리고 고행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불난 집과 같은 다급한 사바세계에서 윤회하고 있는 것은 한 없는 세월 속에 탐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당에 가는 것을 막는 사람이 없음에도 가서 이르는 자가 적은 것은 삼독 번뇌를 스스로 자기의 재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도로 인도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삼악도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은 오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내 욕심뿐인 마음을 망령되게 마음의 보배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스스로 모든 쾌락을 능히 버리면 많은 사람들이 말을 성인처럼 믿고 공경할 것이고, 계율같이 지키기 어려운 행동인 난행을 능히 행하면 부처님 같이 존중할 것이다. 물질을 간탐 하는 자, 즉 물질에 애착심을 가지고 물질 갖기를 노력하는 자는 마귀 본성이라고 했습니다. 자비보시 하는 자는 바로 부처님의 자손입니다.

 높이 솟은 산은 지혜로운 자의 거처할 바요, 그런 곳에 사는 사람은 지혜롭다. 푸른 소나무 깊은 계곡은 수행하는 자의 처소이다. 풀뿌리 나무 열매, 이런 것들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흐르는 물 마시어 갈증을 식히는 것이 바로 수행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은 단 것을 먹고 애써서 가꾸어도 반드시 죽는다. 부드러운 비단, 좋은 옷으로 아무리 보호하고 지켜도 명필유종이라, 우리의 목숨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메아리치는 바위 굴 속에서 염불하면 기도가 잘 된다. 메아리 치는 바위 굴 속을 법당으로 삼아 염불을 열심히 하면 슬피우는 새 소리가 벗입니다.

 

 1,600년 전, 원효스님께서 이미 그런 것을 갈파를 하셨습니다. 우리나라가 불교를 받아들인지 얼마 안 되는 통일신라 시대에 이미 원효스님은 불법당을 좋아하셨고 산새소리 울리는 것이 수행자의 처소라고 후학들에게 이미 일렀습니다.

 

 절 할 때 무릎이 얼음장 같이 차가와도 따뜻한 방을 생각하지 않는다. 배가 고파 창자가 끊어질 것 같아도 음식 생각을 안 한다. 잠시 동안에 백년이 지나가는데 어찌해서 배우지 않겠느냐. 일생이 얼마나 짧은 데 닦지 않고 놀고만 있겠느냐. 내 마음 가운데 애착심을 여위는 것을 시명으로 삼으라. 내 마음에 애착심이 멀리하고 여위었을 때, 이런 것을 이름하여 사문, 수행자라 한다. 세속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출가라 한다.

 행자나망 구피상피(行者羅網 狗被象皮). 수행자가 비단 옷을 입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쓰는 것과 같이 어울리지 않는다.

 수도하는 사람이 그리운 것을 마음 속에 품고 사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들어가면 못나온다. 이런 마음을 품으면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배움이 아무리 많아도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보물이 많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도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수행을 열심히 해도 지혜가 없는 자는 동쪽으로 가고자 했는데 결국은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다.

 지혜 있는 자의 소행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자의 소행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원효스님께서는 진평왕 39년에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서 칠십년을 사셨습니다. 원효스님의 일화 중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의상 스님과 함께 당나라 유학 길에 올랐는데, 지금의 당진 부근에 하룻밤 쉬게 되었습니다. 저녁에 갈증이 나서 옆에 더듬어 보니 그릇에 물이 있어 달게 마시고 갈증을 해소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골바가지 였습니다. 그래서 저 물을 먹었다 생각하니 구토가 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상은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고 원효 스님은 서라벌 고향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유학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내 마음이 생한 즉 이 세상 모든 법이 다 생하다. 내 마음이 멸한 즉 이 세상 모든 법이 다 멸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입니다. 원효 스님께서도 말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갈증을 해소한 물 때문에 확실하게 알아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배워서 알지만 긴가민가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증득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증득은 실천할 있을 정도로 확실히 깨닫는 대각입니다.

 

 원효 스님께서 깨친 이후에 240권을 저술하셨는데 현존하는 책은 23권입니다. 그 중에 널리 알려지고 대표적인 글이『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입니다.

 원효스님의 중심 사상은 일심사상(一心??)입니다. 오늘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일심에서 모든 것이 전개됩니다. 그래서 원효스님의 회통(會通), 쉽게 말해 회향은 일심으로 귀착됩니다.

 책에서는 스스로 원효스님이 질문하고 답합니다.

 일심이 과연 무엇일까?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니다. 참 됨과 거짓됨의 둘은 다름이 없으므로 하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둘이 아닌 것에서 모든 법은 가장 진실됨. 그래서 원효스님은 그것을 중실(中實)이라 이름했습니다. 가운데 中, 열매 實,

 그리고 그것은 마치 허공과 같이 변함이 없어요. 그 성품은 스스로 신령스럽게 알아차리기에 그것을 귀신 신(神), 풀 해(解)라 해서 신해이고, 곧 마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잘 이해하셔요.

 중실과 신해. 이것을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가 있으며 하나도 있지 않거늘 무엇을 두고 마음이라 하겠는가?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부처님을 이름 붙일 때 부처님이 없는 데 그래도 부처라 이름한다. 그것과 같습니다. 마음입니다.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졌으므로 무엇이라 지목할 지 몰라서 마음이라 했어요. 무엇이라 할지 몰라서 그것을 원효 스님은 일심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했어요. 더 쉽게 우리말로 한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라 해도 불편해서 한마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리에도 한마음 선원이 있는데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생은 곧 멸이 되나 멸을 고집하지 않는다. 멸이 곧 생이 되나 생에 머무르지 않는다.  생과 멸이 둘이 아니다.

 움직임과 고요함은 둘이 아니다. 즉, 정과 동은 다름이 없다. 고요함이 움직임이고 움직임이 고요함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일심의 법이고 이치라고 합니다. 비록 실제 둘이 아니나 하나라고 고집하지 않고, 이 사바세계 삼라만상 전체가 연 따라 일어나서 연 따라 생하고 움직이고 또한 연을 따라 적멸하게 됩니다.

 이같은 도리로 말미암아 생이 즉 멸이고, 태어남이 곧 적멸이다. 적멸이 생이며 막힘도 없고 거리낌도 없다. 그렇다고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원효스님께서는 알아듣도록 해주려고 여러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의 통일인 일심을 통해서 국토의 분열, 민족의 분열, 마음의 분열을 한 줄기 회통의 길로 초점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일심에서 이문으로 갈라지는데 생멸문과 진여문입니다. 이 생멸문과 진여문을 하나로 합치는 대승심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정신적 논리가 된 것입니다.

 결국 분열된 마음은 일심을 통해서만 통일이 가능하며 그 통일은 중생심이며 대승심이고 국민의 마음인데 그것이 곧 여래장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일심의 회복을 통해서 마음의 평정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원효 스님께서 긍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갈라진 마음을 한 줄기 마음의 통일로 묶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온갖 주장을 하나로 회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음을 통해서 부정과 긍정의 상대적 대립을 없애고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원효 스님이 요석 공주와 함께 지낸 후 부터는 스스로를 고승대덕으로 인정 않고 소승거사라 낮추고 거리를 다니면서 요즘 같으면 유행가나 부르고 서울 역전에서 노숙자와 같이 뒹굴고 그래서 부처님 말씀이나 전하고 사셨습니다. 

 하루는 의상 스님께서 사형인 원효 스님이 걸식을 하니까 대접하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당시 의상 스님은 계율을 잘 지키는 큰 스님이었기에 천상의 공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공양이 오지 않는 거에요. 기다리다가 원효 스님이 나가자 그제서야 천녀들이 공양을 들고 다급히 들어오는 겁니다. 의상 스님께서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하자, 밖에서 화엄신장이 못 들어가게 해서 못 왔다는 것입니다. 의상 스님은 그때야 알았습니다. '아, 사형이 도가 높아서 내가 먹는 알량한 천상의 공양은 안 드시려고 했구나.' 그래서 동구 밖으로 나가는 사형을 향해 큰절을 올렸습니다.

 

 계행을 잘 지켜서 천상의 공양을 받는 의상스님의 행덕을 기리는 것도 중요하죠. 또한 서울 역전에서 노숙하는 그 많은 중생들과 더불어 사는 원효 스님의 두타행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모습 속에서 공히 배움을 얻어야 합니다. 계행을 잘 지켜 의상과 같이 훌륭한 모범의 삶도 중요하고, 여실하게 너와 내가 둘이 아닌 깨달음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증득해서 원효와 같이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심으로 가기 위한 수련은 모든 불교적 실천 속에 다 내포되어 있습니다. 원효만이 아니라 부처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동안 티벳, 만주, 중국, 한국, 일본 등 많은 세월 동안 조사, 선배 스님들이 다 일심을 향해 꾸준히 수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일심에 관한 수련을 정확히 하셔야 하기에 일심에 관한 수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이 하신 수련법은 당시 인도 사회의 좌선법인 수식관입니다. 호흡을 셈 한다고 해서 수식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평소 숨 쉴 때는 들숨과 날숨이라고 생각 않지만  우리가 염불을 할 때도, 화두를 챙길 때도 들숨과 날숨을 생각하면서 해야합니다.

 화두를 들고 하는 간화선에서도 들숨과 날숨을 함께 하면서 화두를 첨가하면 되는 것이고 금강경 읽는 간경할 때도 들숨과 날숨을 생각하면서 하면 됩니다.

 처음에는 헷갈리고 복잡하지만, 운전도 하다보면 저절로 되듯이 '이 뭣꼬?' 하는 간화선, 염불, 간경을 할 때 들숨과 날숨이 저절로 잘 챙겨질 때 그것이 일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효 스님은 일심을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뽑은 것입니다.

 

 마음을 잘 챙기는 것을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 그리고 들숨, 날숨, 화두 이것을 한꺼번에 뭉쳐서 하나로 회통하면 이것이 원효 스님이 말하는 일심입니다. 여러분이 이 공부를 열심히 하셔야 중생과 부처와 내 마음이 하나라고 하는 경전 상에 나오는 그 말씀을 확실하게 증득할 수 있습니다. 이 공부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일심으로 회통 해서 끌고 가려고 하면, 우리들의 의식, 화두, 호흡,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딱 묶어서 정진을 해야만 그것이 일심정진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수행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이것만 잘하면 여러분들이 성불합시다하는 서원은 성취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불합시다.

 

*************

 

『발심수행장』 원문

 

 <發心修行>

?諸佛諸佛, 莊嚴寂滅宮, 於太劫涇, 捨欲苦行; 衆生衆生, 輪廻火宅門, 於無量世, 貪欲不捨. 無防?堂, 少往至者, 三毒煩?, 爲自家財; 無誘?道, 太往入者, 四蛇五欲, 爲?心寶. 人誰不欲歸山修道, 而爲不進, 愛欲所纏. 然而不歸山藪修心, 隨自身力, 不捨善行. 自樂能捨, 信敬?聖, 難行能行, 尊重?佛. ?貪於物, 是魔眷屬, 慈?布施, 是法?子. 高嶽 巖, 智人所居, 碧松渙谷, 行者所捿, 飢 木果, 慰其飢腸, 渴飮流水, ?其渴?. 喫甘愛養, 此身定壞, 着柔守護, 命必有終. 助響巖穴, 爲念佛堂, 哀鳴鴨鳥, 爲歡心友. 拜膝?氷, 無戀火心, 餓腸?切, 無求食念. 忽至百年, 云何不學, 一生幾何, 不修放逸. 離心中愛, 是名沙門, 不戀世俗, 是名出家. 行者羅網, 狗被象皮, 道人戀懷, 蝟入鼠宮. 雖有才智, 居邑家者, 諸佛是人, 生?憂心; 設無道行, 住山室者, 衆聖是人, 生歡喜心. 雖有才學, 無戒行者, ?寶所導而不起行; 雖有勤行, 無智慧者, 欲往東方而向西行. 有智人所行, 蒸米作飯; 無智人所行, 蒸沙作飯. 共知喫食而慰飢腸, 不知覺法而改癡心. 行智具備, ?車二輪; 自利利他, ?鳥兩翼. 得粥祝願, 不解其意, 亦不檀越應羞?乎? 得食唱唄, 不達其趣, 亦不賢聖應 愧乎? 人惡尾蟲, 不辨?穢, 聖憎沙門, 不辨?穢. 棄世間喧, 乘空?上, 戒爲善梯. 是故破戒, 爲他福田, ?折翼鳥, 負龜翔空, 自罪未脫, 他罪不贖. 然, 豈無戒行, 受他供給? 無行空身, 養無利益, 無常?命, 愛?不保. 望龍象德, 能忍長苦; 期?子座, 永背欲樂. 行者心?, 諸?共讚; 道人戀色, 善神捨離. 四?忽散, 不保久住, 今日?矣, 頗行朝哉. 世樂後苦, 何貪着哉, 一忍長樂, 何不修哉. 道人貪, 是行者羞?; 出家富, 是君子所笑. 遮言不盡, 貪着不已, 第二無盡, 不斷愛着. 此事無限, 世事不捨, 彼謀無際, 絶心不起. 今日不盡, 造?日太, 明日無盡, 作善日少. 今年不盡, 無限煩?, 來年無盡, 不進菩提. 時時移移, 速經日?, 日日移移, 速經月晦, 月月移移, 忽來年至, 年年移移, 暫到死門. 破車不行, 老人不修, 臥生懈?, 坐起亂識. 幾生不修, 虛過日?, 幾?空身, 一生不修? 身必有終, 後身何乎? 莫速?乎, 莫速?乎!

 

<涇東>沙門<元曉>述.

 

<발심수행장>

부제불제불, 장엄적멸궁, 어다겁해, 사욕고행; 중생중생, 윤회화택문, 어무량세, 탐욕불사. 무방천당, 소왕지자, 삼독번뇌, 위자가재; 무유악도, 다왕입자, 사사오욕, 위망심보. 인수불욕귀산수도, 이위부진, 애욕소전. 연이불귀산수수심, 수자신력, 불사선행. 자락능사, 신경여성, 난행능행, 존중여불. ?탐어물, 시마권속, 자비포시, 시법왕자. 고악 암, 지인소거, 벽송심곡, 행자소서, 기 목과, 위기기장, 갈음유수, 식기갈정. 끽감애양, 차신정괴, 착유수호, 명필유종. 조향암혈, 위염불당, 애명압조, 위환심우. 배슬여빙, 무연화심, 아장여절, 무구식염. 홀지백년, 운하불학, 일생기하, 불수방일. 이심중애, 시명사문, 불연세속, 시명출가. 행자나망, 구피상피, 도인연회, 위입서궁. 수유재지, 거읍가자, 제불시인, 생비우심; 설무도행, 주산실자, 중성시인, 생환희심. 수유재학, 무계행자, 여보소도이불기행; 수유근행, 무지혜자, 욕왕동방이향서행. 유지인소행, 증미작반; 무지인소행, 증사작반. 공지끽식이위기장, 부지각법이개치심. 행지구비, 여거이륜; 자리이타, 여조양익. 득죽축원, 불해기의, 역불단월응수치호? 득식창패, 부달기취, 역불현성응 괴호? 인오미충, 불변정예, 성증사문, 불변정예. 기세간훤, 승공천상, 계위선제. 시고파계, 위타복전, 여절익조, 부구상공, 자죄미탈, 타죄불속. 연, 기무계행, 수타공급? 무행공신, 양무리익, 무상부명, 애석불보. 망용상덕, 능인장고; 기사자좌, 영배욕락. 행자심정, 제천공찬; 도인연색, 선신사리. 사대홀산, 불보구주, 금일석의, 파행조재. 세락후고, 하탐착재, 일인장락, 하불수재. 도인탐, 시행자수치; 출가부, 시군자소소. 차언부진, 탐착불이, 제이무진, 부단애착. 차사무한, 세사불사, 피모무제, 절심불기. 금일부진, 조악일다, 명일무진, 작선일소. 금년부진, 무한번뇌, 내년무진, 부진보제. 시시이이, 속경일야, 일일이이, 속경월회, 월월이이, 홀래년지, 연년이이, 잠도사문. 파거불행, 노인불수, 와생해태, 좌기란식. 기생불수, 허과일야, 기활공신, 일생불수? 신필유종, 후신하호? 막속급호, 막속급호!

 

<해동>사문<원효>술.

 

 

한글 해석

 

<발심수행장>

 

1. 탐욕을 끊고 수행하라

 

모든 부처님께서 적멸궁을 아름답게 꾸미신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욕심을 끊고 수행하신 까닭이요, 수많은 중생들이 불타는 집(火宅)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끝없는 세상 동안 탐욕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다. 막는 사람이 없는데도 천당에 가는 사람이 적은 까닭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 번뇌로 자기의 재물을 삼기 때문이요, 유혹하는 사람이 없는 악도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자신의 몸에 대한 애착과 온갖 욕심을 망녕되게 마음의 보배로 삼는 까닭이다.

어느 누가 고요한 산에 들어가 진리의 도를 닦으려 하지 않으리요마는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달콤한 일들에 대한 애욕에 얽매인 탓이다.

 

2. 출가하여 용맹 정진하라

 

산사가 있는 높은 산과 험한 바위가 있는 곳은 지혜 있는 수행자가 살 만한 곳이요,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깊은 골짜기 또한 수행하는 사람이 머무를 만한 곳이다. 배고프면 나무 열매를 먹어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목이 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그 갈증을 식힌다. 좋은 음식을 먹고 애지중지 보살피더라도 이 몸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며, 비단옷을 입어 보호하더라도 이 목숨은 반드시 마칠 때가 있는 것이다.

메아리 울리는 바위굴을 염불당으로 삼고, 슬피 우는 새 소리를 마음의 벗으로 삼아라. 추운 법당에서 절할 때 무릎이 얼음장과 같이 차가워도 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굶주린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하여도 먹을 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 잠깐이면 백 년이 지나는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인생이 얼마나 되길래 수행하지 않고 게으르며 졸기만 할 것인가.

 

3. 참된 수행자가 되라

 

마음속의 애욕을 모두 여윈 수행자를 사문이라 하고, 세상일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 도를 닦는 수행자가 호화스런 비단옷을 입는 것은 개에게 코끼리 가죽을 입힌 것과 같이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수행자가 이성에게 연정을 품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든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재주가 있더라도 쾌락의 유혹이 가깝게 있는 세속에 사는 사람에게는 부처님께서 가엷게 여기는 마음을 내시고, 설사 도를 닦는 힘이 모자라더라도 산사에서 수행하는 사람은 모든 성현들께서 그를 기쁘게 여긴다.

재주와 학문이 있더라도 계율을 실천하지 않으면 보배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도 길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고, 비록 부지런하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목적지가 동쪽인데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다.

지혜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행위는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밥을 먹어 그 배고픈 창자를 위로할 줄 알면서도 진리의 불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네.

계행과 지혜를 갖추는 것은 굴러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기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은 날아가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

 

4.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라

 

정성어린 시주를 받고 축원하면서도 그 참뜻을 알지 못한다면 보시한 시주자에게 수치스런 일이며, 공양을 받고, 경전을 외우며 축원하면서도 그 깊은 이치를 알지 못한다면 또한 불보살님께 부끄럽지 아니하겠는가.

사람들이 더러움과 깨끗한 것을 가리지 못하는 벌레를 싫어하듯이 성현께서도 출가 사문이 깨끗하고 더러움을 판별하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네.

세상일의 시끄러움을 버리고 하늘나라에 올라가는데는 청정한 계행이 좋은 사다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율을 지키지 않고 남의 복밭이 되려는 것은 마치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이를 등에 태우고 하늘에 오르려는 것과 같다. 자신의 죄도 벗지 못하고서 어떻게 남의 죄를 풀어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계행을 지키지 못하고서는 다른 사람의 공양이나 시주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수행이 없는 헛된 몸은 아무리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무리 아끼더라도 보전하지 못한다.

용상(龍象)과 같은 큰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고통을 참아야 하고 사자좌에 앉아 있는 부처가 되고 싶거든 세상의 향락을 영원히 버려야 한다. 수행자의 마음이 깨끗하면 모든 천신까지도 다같이 찬탄하나, 그렇지 않고 수행자가 여인을 그리워하면 착한 신장들도 그를 버리고 떠난다.

흙·물·불·바람의 사대(四?)로 구성된 몸은 곧 흩어지는 것이므로 오래 살수가 없다. 오늘도 벌써 저녁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

세상의 향락 뒤에는 고통이 따르거늘 무엇을 탐내랴. 한번 참으면 오랜 즐거움이 되는데, 어찌 도를 닦지 않는가. 도를 구하는 사람이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자들에게 수치스러운 행위요, 출가한 사문이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려는 행위 또한 군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5. 늙으면 수행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막는 말이 끝없이 많은데 탐착과 애욕은 왜 그리 끊지 못하며 닦아야 할 수행이 끝이 없는데 세상일을 버리지 못하며,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끊을 마음은 일으키지 않는다.

오늘이란 하루는 끝이 없건만 오늘 한 번만 행한다는 생각에 악한 죄는 많아지고, 내일 내일하고 미루는 내일이 끝이 없지만 착한 일은 날마다 줄어들며, 금년이란 한 해가 다함이 없거늘 한없이 번뇌는 계속되고, 내년하고 미루는 내년이 끝이 없거늘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구나.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하루가 지나가고, 하루하루가 흘러서 어느덧 한 달이 되며, 한 달 한 달이 지나서 어느덧 한 해가 되고, 한 해 한 해가 바뀌어서 잠깐 사이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망가진 수레는 굴러갈 수 없듯이 사람도 늙으면 수행할 수 없으니, 누우면 게으름만 생기고 앉아 있어도 어지러운 생각만 일어난다.

몇 생애를 닦지 않고 낮과 밤을 헛되이 세월만 보냈는데, 또 헛된 몸을 얼마나 살리려고 이 한 생을 닦지 않겠는가.

이 몸은 반드시 마칠 날이 있는 것인데 죽어서 다시 받는 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찌 급하고 또 급하지 않는가.

 

 

 

정리: 장훈 (조계사 보도부 법문녹취팀)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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