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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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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행사

기신론(起信論)-신심(信心)을 수행(修行)하는 부분(部分) 2

  • 입력 2004.06.22
  • 수정 2025.01.15

지난 시간은 믿음에 대한 공부를 하였고 오늘은  어떤 수행으로 그 믿음을 성취하여야 하나를 공부하겠습니다.

어떤 종교든 그 종교는 믿음이 있습니다.

첫째 무엇을 믿는가,  어떻게 믿는가,  왜 믿는가

둘째 그 종교의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셋째 그 종교인들은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즉 불교를 믿는 사람과 범속인의 일상생활 속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라는 생활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세가지의 질문을 던져 놓고 그에 대한 답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 하는 물음에 여러분은 어떻게 답을 하십니까?

사실 불교는 일문 백답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닦는 것이 불교입니다. 성불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극락가는 것이 불교입니다.. 등등 수없이 많은 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대답은 일부분만 답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는 무엇을 믿고 목적은 무엇이고 불교를 믿는 불자는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가 이 세가지로 답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무엇을 믿는가?

불. 법. 승. 삼보를 믿습니다.

항상 법회를 시작할 때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라고 삼귀의를 합니다.  믿음과 귀의를 비교해 보면 일반적으로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정해져 있으므로 영원히 믿음의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고 수행하여 모두가 성불하는 것이 가능한 종교입니다.  부처님께 귀의 한다는 뜻은 부처님을 의지해서 부처님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이 되려고 왔다고 하면 큰일납니다. 그러나 절에 가서 부처님이 되겠다고, 성불하러 왔다 하면 주지스님 앞으로 모셔 갑니다.

불교는 불. 법. 승 . 삼보에 귀의하는 종교입니다.

 

2. 불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모든 행사가 끝나면 사홍서원을 합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이를 사홍서원이라 하는데 바로 네가지 원력입니다. 목적이라기 보다는 원력인 것입니다.  원력이란 원할 원(願)에 힘 력(力)자를 씁니다.

일체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모든 번뇌를 다 끊겠다는 원을 세우고 부처님 법문을 다 배우겠다는 원을 세우고 그 세가지가 다 이루어지면 성불해야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즉 사홍서원의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원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세가지 죄악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배워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는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배우겠다는 답을 드리겠습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완성은 그 사람이 더 배울 것이 없을 때 까지 가르치는 것이니 바로 중생을 다 제도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할 수 있는 데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남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데 마음을 내면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안하는 것은 게으름, 욕심, 번뇌등이 원인이니 번뇌를 끊어버리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 있는 경지를 얻는 것입니다.

 

3. 불자는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가?

삼보에 귀의하고 사홍서원의 원을 세워서 그를 다 이루고자 하는 즉 성불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육바라밀을 수행하는 생활이 우리 불자들이 살아가야 할 바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삼보에 귀의하고 사홍서원의 원력을 세워서 육바라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수행의 종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계문(戒門)을 수행(修行) 하는가?

이른바 살생(殺生)도 아니하고, 도둑질도 아니하고, 음행(添行)도 아니하며, 양설(兩舌)도 아니하고, 악(?)한 말도 아니하고, 꾸미는 말도 아니하며, 탐심(貪心), 질투(嫉?), 사기(詐欺), 아첨(阿諂), 진에, 사견(邪見)을 멀리 여의는 것입니다.

탐심만 내도 불교에서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모든 것이 계율을 어긴다는 생각을 하여 몸으로도 죄를 짓지 말고 입으로도 죄를 짓지 말고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않는 심.구.의 삼업을 청정히 하는 것이 계율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만약 출가자라면 번뇌를 절복(折伏)하기 위하여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항상 고요한 데 머물러 소욕(少欲) 지족(知足) 두타(頭陀) 등의 행을 수습(修習)하며, 아무리 작은 허물이라도 마음에 두려움을 내서 부끄러워하여 뉘우쳐 고치고, 여래(?來)께서 제정(制定)하신 금계(禁戒)를 가벼이 여기지 아니하며, 마땅히 기농(譏弄)과 혐의(嫌疑)를 막아 중생(衆生)으로 하여금 망(忘)으로 과죄(過罪)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비가 추석에 집에 돌아와 보니 머슴도 집에 가고 소에게 풀을 먹일 사람이 없어 직접 풀을 베러 가니 어느 한 곳에 풀이 좋은지라 막 베고 있는데 그 밭 임자가 나타나 낫과 망태를 빼앗고 꾸짖었습니다. 아들이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안계신지라 찾아가보니 풀밭에 마냥 앉아 있었습니다. 사정을 전해 들은 아들이 그만 집에 가자 하니 아버지는 -조금만 있다 가자. 저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돌아가자. 어찌 도적이 벌건 대낮에 머리를 들고 다니겠느냐.. 하였답니다.  이렇게 아무리 작은 허물일지라도 마음에 두려움을 갖고 지옥 무서운 줄 알며 세상에 부끄러움을 일으키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또한 어떻게 인문(忍門)을 수행(修行) 하는가?

이른바 다른 사람이 괴롭게 함을 참아서 원수 갚을 마음을 품지 아니하며, 또한 마땅히 이(利)와 쇠(衰), 훼(毁)와 예(譽), 칭(稱)과 기(譏), 고(苦)와 락(樂)등의 법(法)을 참는 것입니다.

이를 팔풍이라 하며 팔풍이 불면 마음이 흔들리는데 이 흔들림을 없이 하는 것이 불교에서의 인욕인 것입니다.

남이 나를 괴롭히더라도 원수 갚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에게 이로운 일이 생겼을 때에도 올바른 마음 갖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갑자기 돈을 잃었다든지 하면 자기중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명예가 생겼다든지, 그를 훼손당했다든지, 창찬이나 비난을 받을 때에도, 즐거운 일이나 어려운일이 닥쳐도 곧 흔들리고 마는 것이 중생입니다.

이렇게 여덟가지 바람 (팔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 자기 마음이 항상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인욕입니다.

 

어떻게 진문(進門)을 수행(修行)하는가?

이른바 모든 착한 일에 게으르지 아니 해서 입지(立志)가 견강(堅强)하여 겁약(?弱)함을 멀리 여의며, 과거(過去)구원(久遠)으로부터 헛되이 몸과 마음으로 큰 괴로움을 받아 이익(利益)이 없음을 생각하여 모든 공덕(功德)을 부지런히 닦아서 자기도 이(利)롭고 남도 이(利)롭게하여 여러가지 괴로움을 여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진입니다.

일반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면서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쁜 일은 오늘만 하고 안 할 것이고 착한 일, 해야 할 일은 내일부터 하겠다고 뒤로 미루게 됩니다.  그런데 내일은 늘 내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만, 오늘만 하며 나쁜 일은 계속하게 되고 좋은 일은 내일로, 내일로 미루어지며 점점 하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정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실천력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지속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집중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다말다.. 그럭저럭.. 흐지부지.. 하다보니 중생이 성공치 못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 보면 불로 나무를 태울 수 있는데 적은 불로는 크고 젖은 나무를 태울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한아름되는 생나무를 베어다 놓고 성냥개비 하나로 불을 붙일수 없다는 이치입니다.

그렇게 집중하여 열심히 부지런히 꾸준히 정진하여야 합니다.

이 보살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리이타(自利利他)입니다.  보시의 마음이 자리이타일 때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것이 남도 이롭게 하고 자기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장 못 사는 것이 남도 해롭게 하고 자기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리이타를 하려면 열심히 수행하여 그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자리이타의 수행을 하여 모든 괴로움을 다 없애야 하겠습니다.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修行)하나 선세(先世)로부터 지금까지에 무거운 죄악(罪?)의 업장(業障)이 있는 사람은 사마(邪魔)와 제귀(諸鬼)의 뇌란(?亂)한 바가 되며, 혹 세간(世間)의 사무(事務)-일의 처리- 때문에 여러가지로 견전(牽纏)-끌리고 얽혀짐- 되어지거나, 혹은 병고(病苦)에 시달리는 바와 같은 등 많은 장애(障碍)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응당히 용맹정근(勇?精勤)하되 밤낮으로 육시(六時)에 부처님께 예배(禮拜)하고 성심(誠心)으로 참회(讖?)하며, 권청(勸請)하고 수희(隨喜)하며, 보리에 회향(廻向)하되 항상 쉬지 않고 계속하여 모든 장애(障碍)를 제거(除去)하고 선근(善根)을 증장(增長)하여야 합니다.

수행이 잘 안되는 이유는 전생부터 지금까지 무거운 죄악의 업장이 두터워서 무거운 장애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장애가 많아서 정진이 안될 때는 그 장애를 제거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참회하여 업장을 소멸해야 장애가 없어져서 신심수행이 잘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불자로서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고 믿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을 열심히 하여야 신심이 돈독해지고 믿음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경전 한구절만 읽어도 발심하게 되고 부처님 법이 사라지려해도 발심하게 되고 중생이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저 중생을 제도해야겠다는 발심을 하여 신심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의 세가지 발심을 살펴보면 사정취중생은 어떤 경우라도 발심을 못하는 것이고 부정취중생(不定聚衆生)은 인연 따라 어느 때는 불자의 신심을 일으키다가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중생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며 정정취중생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퇴하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 내용은 부정취중생이 정정취중생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공부인 것입니다.

 

아주 잘 들으시니 보너스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 의견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면 기본적으로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주장하는 것을 하나의 의견(견해)으로 받아 들여 잘 검토를 해야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자기 주장을 밀어 붙이려 상대를 설득만 하지말고 자기의견이 왜 받아들여지지 않나 잘 반성하며 그 중 의견이 일치되는 것 부터 논의를 조금씩 진행하여 합일점을 찾아내어 의견의 통일을 이루어야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리:  김수정| 조계사 보도부 법문녹취팀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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