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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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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행사

우리 불자들의 이상향

  • 입력 2004.08.30
  • 수정 2025.01.15

오늘이 칠월칠석이라서 그런지 신도님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그 동안 잘 계셨는지요?

스님들이 하시는 법문 중에 칠월칠석날 법문이 제일 하기가 힘든 법문입니다.

불교의 전통적 신앙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견우와 직녀가 떨어져 지내다가 일년에 한번 오작교를 건너 눈물속에서 재회했다가 헤어진다는 슬픈 러브스토리이니까 혼자 사는 스님들에게는 법문을 하기가 그 내용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어찌되었던 각 나라마다 특색이 있는 민간신앙이 있게 마련입니다.

옛날에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어 여러나라로 전파될 무렵에 중국은 도교신앙 성행했고 일본에는 신도 신앙이 성행했었습니다.

그런 민간신앙의 일부를 불교가 흡수 하면서 우리나라에 도입이 되면서 대표적 민간신앙인 칠석 신앙이 불교의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물론 법당 상단에 모시는 내용은 아니지만 중국에 도교신앙이 일어나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민간신앙과 결합되어서 칠석신앙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칠월칠석에는 남녀의 애뜻한 러브스토리가 내려오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이 날은 어찌되었던 ‘남편 승진 시켜주시고 사업 번창하게 해주시고, 자식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발복 기도를 하는 날로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 시공간을 초월한 보살님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어떤 사람을 좋아해야 하고 어떤 사람을 좋아함으로 인해서 닮아 가야 하는 것인가를 스님이 된 입장에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불교신자들이 이성적으로 좋아하던 동성적으로 좋아하던 종교적으로 좋아하던 불교신자들이 좋아해야 할 것이 두 가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 중에 한분이 보살(菩薩)님들입니다.

보살님들을 불교신자들은 좋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경전에도 굉장히 많은 보살님들이 나옵니다. 

저도 열심히 수행을 하면 나중에 '원담보살'이 될 수가 있고 여러분들도 수행을 열심히 하면 자기 법명이나 속명을 따서 무슨무슨 보살이 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불교신자의 이상향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보살(菩薩)입니다.

그런데 보살님은 보살이라는 칭호를 갖기 위해 가지고 있는 속성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보살은 시간의 구애를 별로 받지 않는 분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구애를 받고 있습니까?  안 받고 있습니까?

실제로 우리는 굉장히 많은 시간의 구애를 받고 있습니다.

당장 하루 시간의 구애도 받고 있고, 기도하는 시간의 구애도 받고 있고, 결혼 전과 후의 시간, 그리고 학생 때의 신분과 사회인으로서 또는 사회에서의 직급에 따라서 온갖 시간의 구애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생사의 시간까지 구애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몸뚱이를 받고 세상에 나온 것 자체가 죽음을 동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살은 시간의 구애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한참 젊었을 때 연애하던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 인류 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 특징 중에 하나가 시간과 생사에 대해서 초월하려고 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내가 일년만 더 좋아하겠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애잔한 러브스토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드라마를 봐도 영화를 봐도 그렇고 옛날에 내려오던 소설을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들은 전부다 시간을 초월한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남녀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감동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부분이거나 아니면 어느 시간에 국한이 되었거나 하는 것에 대한 내용들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보살이라는 분들은 시간에 초탈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과거에도 미래에도 우리가 찾으면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으려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시간 속에 있지도 않은 분들입니다.

제가 아는 신도분 중에는 참선하시는 스님들이 이야기하시듯 '한 경계'를 보신 거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무엇을 하셨던 분인가 하면 외국에 나가는 원양어선 선장 일을 하셨던 분인데 외국으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서 배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때 아무 생각이 안 나고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있었겠지요.

자기가 배웠던 지식이나 어떤 생각들은 다 사라져 버리고 어렸을 때 엄마 손을 잡고 절에 가서 엄마가 기도를 하면 집에 빨리 가자고 보챘는데 그때 어머니 입에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렇게 정근하던 소리가 갑자기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거사님이 아무 것도 안하고 갑자기 어머님이 생각이 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관세음보살님 명호를 불렀답니다.

다른 것들은 아무 것도 생각 한바가 없고 오직 주력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고서 4일째 되던 날 그곳을 지나가던 외국배가 구해줬다고 합니다.

돌아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진짜 삶과 죽음이 덧없다는 생각이 들고 자기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데 한쪽 면만 가지고 살았구나 싶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마음을 비우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어서 마음을 비우고 기도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은 어찌되었던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흘동안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부른 기도 때문에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본인은 관음기도를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불교는 부처님같이 깨달음에 대한 행위를 하는 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그분이 처음에는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어디가서 큰스님 법문을 들어보니까 참선하을 하라, 도 깨닫는 공부를 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더래요.

그래서 자기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기도해서 이 한몸 살은 것이고 도를 깨달으면 다겁생래에 해탈을 한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그 거사님이 그때부터 참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이 실제로 보면 몸이 장군처럼 아주 크신 분입니다.

제가 호를 받았던 지우큰스님 밑에서 정진을 열심히 하시다가 그 거사님도 스님들이 흔히 말하는 '한 지견'이 터졌습니다.

세속에 사는데도 불구하고 만나면 늘상 도반 같고 저도 제 마음에는 꼭 사형같이 편안한 마음이 들었던 분입니다.

이 거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스님 신도님들이 처음 절에 들어와서 기도를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왜 그러시는데요?" 하고 물었더니 자기가 겪었던 과정을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바다에서 사고가 나서 4일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관세음보살님을 체험을 하지 못했는데 귀국해서 기도를 하면서 관세음보살님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열심히 기도를 하면 관세음보살님을 체험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체험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만큼 본인이 기도에 열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세음보살님은 조계사 대웅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산에도 있을 수가 있고 제주도에도 있을 수가 있고 일본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곳이던 중생이 있으면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를 거치지 않고 어느곳에서든 출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있는 분이라는 것은 여러분들과 같이 살고 있는 부인이나 남편도 많이 살아봐야 오십년 내지 육십년입니다.

그 후에는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홀아비로 살던 총각으로 살던 결혼해서 살던 늙어서 죽으려 할 때에도 상관없이 관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 문수보살님 보현보살님은 언제 어디서든 여러분들이 발원을 하면 감흥하는 곳에 있답니다.

 

그래서 불교 신자들이 이상향으로 추구하는 그 보살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들이니까 여러분들이 지금이던 앞으로 1년 후, 10년 후, 그 다음 생이던 관계없이 늘상 보살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고 보살님이 자신의 이상향이 되면 여러분들도 그와 같이 시간을 초탈한 사람으로 자기도 모르게 그 분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게 되어 있지요.

불자들은 부처와 보살을 닮아 가려고 애써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러한 불보살님들을 늘상 염원을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 보살님을 닮아 가게 됩니다.

그렇게 보살님들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어떤 소설을 쓰려고 해도 또 어떤 러브스토리를 이야기 하려고 해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쓰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우리의 일심(一心)안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살을 언제든지 영접할 수가 있는 겁니다

 

 

 

-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 보살님

 

또 보살은 그 속성이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부르는 각종 경전에 등장하기도 하고 법사스님에게 듣기도 하는데 그 보살님 중에 요즘 시쳇말로 성질 더러운 보살님이 계신가요?

성질 더러운 보살님이 한분도 없습니다. 다 마음이 따뜻한 보살님이지요.

지장보살님은 지옥에 한명의 중생이라도 있으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런데 그러한 지장보살님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 마음입니까.

저도 제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아쉬울 때가 있는데 이 지장보살님은 부처가 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 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옥에 중생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성불을 하지 않겠다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늘상 해보세요.

자기 마음이 따뜻하면 모든 것을 보는 경계들이 전부 따뜻해지는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이 그 전에도 그랬지만 르네상스 이후에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넘어와서 만든 것이 오늘날 21세기 지구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주장하느냐 인본주의 즉, 사람 중심의 세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중심의 세계에서 우리가 따뜻함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우리가 사는 현실사회는 보기 좋고 아름답고 따뜻할 수가 있는데 우리 스스로가 이 따뜻함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반대로 더 공격적이고 더 욕심을 내고 시기질투를 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채워가고 있기도 합니다.

따뜻한 물이 얼음을 녹이듯 따뜻한 마음이 있으면 자기의 심성을 다 따뜻하게 녹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무슨 이유에서든 자기의 마음 안에 따뜻한 것들이 자리잡고 있으면 응어리진 것들이 풀어집니다.

현대사회에서 많이 앓는 암과 같은 종양은 무엇으로 규명하든 상관없이 그 원인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발란스가 맞지 않아서 생겨나는 병입니다.

언발란스 한 마음을 어느 한쪽으로 몰아서 생각할 때 종양이 생긴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다 맺힌 모습들입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것들은 맺힘이 풀어져 있고 그 맺힘이 모아져 있는 응어리들은 독소를 가지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여러분들 결혼을 해보셨으니까 아실 것 아닙니까.

부부싸움을 했는데 남편이나 아내 중 어느 한사람이 풀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자라면 짐 싸서 친정으로 갈 것이고 남자라면 여관이나 호텔에 가서 안 들어 올 수도 있구요.  그런데 자기 마음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내어서 어느 한쪽에서 풀려고 노력을 하면 그것의 응어리는 대개 풀어집니다.

그게 풀어지지 않은 사람과 살고 있는 사람은 진짜 업장이 두터운 사람입니다,

자신이 자기 남편에게 마음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가지고 인욕심을 내서 했는데 그 것을 잘 받아주지 않는 영감이 있다고 한다면 그 남편과는 전생의 인연이 금생에 안 좋은 인연으로 합한 거예요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집에서 있는 사람이 밖에 나가서 일하고 들어온 남편하고 논쟁이 붙으면 집에 있는 사람이 대부분 이기지요

남편이 들어오면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답변해야지...하면서 미리 생각해 놓는 이야기들을 쏟아 놓는데 어떻게 이기지 안겠어요.

그것을 남편이 오해가 생길 수가 있고 자식이 그렇지 않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도 아내가 자기 마음의 문을 꽉 닫고 살면 이것이 독소로 작용하여 종양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꽁하게 하고 있으면 남편 되시는 분도 마음을 한쪽으로 접으시면 됩니다.

내가 금생에 아내 인연 복이 이것밖에 안되나 보다하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무엇으로 한순간에 아름답게 설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만 툭하니 아름답게 내놓으면 됩니다.

 

제가 인도에 자주 갑니다.

10년 전쯤 이야기인데 인도 서북부에 가면 니시켇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 도시는 히말라야 만연설이 흐르는 강이 마을 한가운데에 있고 마을 저쪽 편은 아쉬람이라고 해서 명상센타가 200여개 쯤 있고, 이쪽은 생활을 하는 주거 공간입니다.

오후에 아쉬람쪽에 가서 정진하고 있다가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서 마지막 배를 탈 요량으로 다트(인도인들이 종교의식을 하는 곳)에서 앉아 있는데 늦은 오후시간이라서 그런지 하늘은 석양이 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오십 전후된 프랑스인 부부가 서로 등을 대고 떨어지는 석양빛을 바라보고 만연설이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무념의 명상에 빠져 있더라구요.

그런데 귀국해서도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아직까지도 그 때 풍경이 떠오릅니다.

제가 중년에 아름다운 모습을 본 기억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의 산과 떨어지는 석양과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분들인들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안 바빴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이 평온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삶을 살아가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엇을 가지려고 바둥거리며 애를 써도 다 가질 수가 없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다 비워내야 할 시간에 접어든 사람들입니다.

이제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 우리가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아라한님

 

불교에서는 보살님만 우리의 이상향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분들이 더 있습니다. 그 분들은 아라한님들 입니다.

여러분들 나한전이라고 해서 많이 보셨지요?

그 법당에 모셔져 있는 나한님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대접이 조금 소홀한데 남방불교에서는 아라한을 인간세상에서 정점을 갈 수 있는 수행을 한 사람들로 나한님들로 보고 있습니다.

나한님들을 번역하면 뜻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망념의 세계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망념의 세계로부터 벗어난 아라한을 우리 불교신자들이 사랑 해야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고요함과 편안함을 스스로가 얻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무슨 일을 아무리 해도 예를들어서 길거리를 가면서 옷에 이것저것 묻혀서 돌아다니면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고 웃는 모습과 똑같은 것입니다. 밥은 먹어도 배설을 못하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고요함을 가질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불교신자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마음의 고요함을 얻지 못하고 가꾸지 못하면 본인의 마음씀을 따뜻하게 내기도 실제로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자신이 잡생각이 많아서 부처님 앞에서 입정을 하고 있어도 온갖 잡생각을 하고 앉아 있는데 '내가 절에 40년 다녔다.'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고요함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또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불교신자가 가지고 있는 심성의 마음이고 다른 의미로는 사랑학 개론입니다.

온갖 생각에 머리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사람을 불자들은 조금 멀리하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과 같이 있다보면 본인도 온갖 잡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조계사에서 만난 도반들을 보면 "그 보살님은 조용하고 참 편안한 사람이야."하는 분이 좋지 "그분은 복잡해."하는 분에게 마음이 끌리지 안잖아요. 그렇지요?

여러분들의 마음에 늘상 자기 스스로 고요함을 챙길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고요함이 두려운 사람이 바로 현대인들입니다. 

현대인들은 고요함이 두려워요.

외로움이 두려운 거예요.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인도사람, 방글라데시 사람, 아프리카 남미에 있는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몸이 바짝 말라가는 사람들을 해외뉴스에 자살했다는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런데 고등교육을 받고 돈 많고 온갖 생각 많이 하는 사람이 많은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의 자살율이 훨씬 높습니다.

본인에게 닥쳐오는 일에 대해서 본인이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닦질 않는 것입니다.

본인이 혼자 어떤 일이 잘못되거나 또는 사업이 잘 안 되어서 정말 어려움에 처할 때 남자들은 있을 수 있습니다.  승려생활을 한 저도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그럴 때일수록 고요함을 평온함을 닦는 훈련을 한 사람과 안한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고요함도 괴로움도 고독도 다 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자들이 고요함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어떤 면으로 보면 불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라한님들은 온갖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고요함을 성취하신 분들입니다.

늘상 자기마음의 고요함을 닦는 훈련을 자기 스스로 하십시오.

이런 고요함을 성취를 하는 분들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힘이 점점 발달한다는 겁니다.

사물을 볼 줄 아는 힘이 수행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해인삼매라는 용어를 많이 들어보셨지요.

해인삼매라는 것은 바다에 무엇이든지 비추면 그 모습 그대로 비춘다는 것입니다.

 

 

-  차고 뜨거운 것을 스스로 앎과 같은 것

 

우리 조계종의 모처가 되는 혜능대사께서 살았던 산 이름이 조계산 입니다.

육조 혜능대사의 가풍을 이어 받는 것이 우리 대한불교 조계종이고 우리 조계사도 그런 뜻으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고승대덕스님들이 이야기 한 것은 논, 소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육조 혜능스님께서 하신 법문만은 유일하게 팔만대장경에 육조단경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만큼 승가에서는 부처님처럼 모시는 분이 혜능스님입니다.

육조혜능대사가 행자시절에 게송을 홍인대사에게 올려서 법을 전수 받았는데 5조 홍인대사가 생각해 보니까 행자가 부처님 법을 증득했으니 법을 전수를 하긴 해줘야 하는데 만약에 행자에게 법을 전해 줬다고 하면 그 절이 발칵 뒤집힐 것 같으니까 오조 홍인대사가 혜능스님에게 시절인연이 돌아 올 때까지 부처님의 바루와 가사를 전해주고 몸을 피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육조혜능스님이 심야에 도망을 갔습니다.

오조 큰스님의 법이 육조에게 전해 졌는데 그 법을 받은 사람이 행자라는 소식에 다른 스님들이 "부처님의 법을 행자에게 전해 주다니 큰스님께서 망령이 나셨나보다." 생각을 하고 육조스님을 잡으러 그 절에 스님들이 다 출동을 했습니다.

수백리 길을 도망가는데 산 중에 있던 혜명스님이라는 분이 장군 출신이라 힘이 좋아서 열심히 쫒아가 결국 육조혜능스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렇게 붙잡아서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면 본인은 깨닫지 못했으니까 법이 전해졌는지 않 전해 졌는지 모르겠는데 그 의발이 행자에게 잘못 전해진 것이니 부처님 바루와 가사는 빼앗아 와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혜능스님의 얼굴을 보니 스님의 얼굴에서 풍기는 느낌이 범상치 안았던 거예요.

그래서 혜명스님이 육조스님에게 물어봅니다.

"행자 자네가 오조 홍인스님에게 법을 전수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예. 그렇습니다."

"정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그 바루와 가사를 가져가야 하는데 절에서는 발칵 뒤집혔다네."

"오조스님에게 인가를 받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도 깨달을 수 있나?"

"물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럼 자네가 깨달은 것을 가르쳐 주게. 그럼 그것을 인정하고 돌아가겠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 바루와 가사를 가져가겠네."

그런데 육조혜능대사가 가만히 혜명스님을 보니까 모습이 우직하고 과격해도 나름대로 순수한 법계의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요. 스님 그럼 제가 하라는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도를 깨닫는 일인데 자네가 하라는대로 못할 것도 없지. 가르쳐 주게."

"그럼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해보십시오. 그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조 홍인대사에게서 공부를 해도 깨닫기가 힘들었는데 행자가 깨닫게 해준다고 하니 혜명스님이 놀라는 겁니다.

그래서 앉아서 이야기를 해보니 육조스님이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스님 저를 잡으러 오겠다는 생각 등 많은 생각을 하시는데 그러한 생각들을 다 놓아 보세요."

그래서 혜명대사가 육조스님이 시키는 데로 모든 생각을 놓았습니다.

그래도 육조스님이 보니 덜 놓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혜명스님이 장군 츨신이라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의협심이 강했던 분이였나봐요.

"혜명스님 다 놓은 김에 착하고 악하다는 생각도 다 놓아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악한 것은 놓기가 쉬운데 착한 것은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행자가 신속정확하게 도 깨닫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니까 착한 것에 매달려 있을 상황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혜명스님이 "내가 자네 말을 듣고 선도 악도 다 비웠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가?"하고 묻습니다.

"지금 그 상태에서 스님이 부모님께 몸 받기 전에 스님 본래의 모습이 있는데 스님은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그렇게 육조스님이 묻는 소리에 혜명스님이 활연대오를 했다는 것입니다.

고요하다는 말은 많은 개념과 생각과 상식을 다 비워버렸을 때가 가장 고요한 모습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의 본래 면목이 무엇이냐고 육조스님이 우리한테 물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앉아 있는 혜명스님이 그렇구나 하면서 한마디를 했습니다.

"행자님 그 경계가 물을 마시는데 차고 뜨거운 것을 스스로 앎과 같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들 저는 미지근한 물을 좋아하지 않는데 법상에 올려놓은 녹차가 조금 식어 있습니다. 제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 물을 마셨을 때 물이 차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지요?

그것을 모르면 종로에 살면서 저 동대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혹자가 무엇으로 이마를 딱 쳤는데 "아프다." 이것을 아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도는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고 고요함에 앉아 보면 부처님의 자리가 그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혹자가 물을 마시는데 차고 더운 줄을 스스로 모르는 바보가 아무도 없는데 이것이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기도만 해봤지 참선을 안해 봤는데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겠어...." 아니면 본인의 온갖 잡생각이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  있는 그대로 볼줄 아는 힘

 

여러분들의 자기자신의 마음에 고요함을 훈련시키고 고요함에 닿을 줄 알면 직시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조금 전에 이야기를 했는데 해명대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는 냉난자제 하는 힘, 스스로 차고 더운 줄을 스스로 아는 힘, 덕상스님이 누가 와서 물으면 무조건 주장자로 한 대 때렸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마음을 다 비운 상태에서 한 대 맞으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아이고. 아프다.." 이것이 냉난자제의 소식인데 잡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만약에 때리면 "그냥 물어 본 것인데 왜 때렸을까? 주장자를 가까이 하면 도를 깨닫는 다는 이야기인가?"

하면서 별스러운 생각을 다하는 사람은 고요함을 성취 못한 사람입니다.

고요함 속에서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힘을 기르는 것이 불자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불교의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보살과 나한들인데 이 보살님과 나한님들은 기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있기 때문에 내가 언제든지 발원을 하면 가까이 갈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자기가 싫다고 하면 떠나는 것이고 자식도 떠날 수 있는 것이지만 보살은 늘상 우리의 옆에 그리고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분들이라서 우리 불자들이 사랑해야 하는 분들이고 그 분들은 속성이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절에 10년 20년 다니신 분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것은 자기 마음이 따뜻하지 않으니까 밖으로 그렇게 표출이 되는 겁니다.

마음이 따뜻하면 방긋방긋 웃습니다. 멀리에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보고 보살님을 보세요. 절대로 인상을 쓰지 않습니다. 항상 밝고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여러분들이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과 더불어서 고요한 것을 늘상 챙기고 가까이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고요함과 고독과 외로움을 멀리하려고 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요와 고독과 외로움을 친한 벗으로 생각할 줄 알면 그분은 수행적으로 굉장히 성숙한 분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멀리하고 기피를 하면 그분은 수행에 깊이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 어느 스님이 산중에서 살고 있는데 갑자기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이 그 절 암자를 태우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은 그 암자 시주자였는데 자기 하인들을 데리고 와서 태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사님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내가 수행하는 스님 한 분을 시봉하고 모시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천하에 나쁜 사람 이였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들어보니 그 집에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임신을 한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누구의 자식이냐고 물으니까 자기와 사랑을 한 남자의 이름을 대면 뱃속에 있는 아기와 자신과 남자가 죽을 것 같았겠지요.

그래서 평소 아버지가 시봉을 열심히 하는 스님 법명을 대면 죽을 것 같지 않으니까 뱃속의 아기 아버지가 스님이라고 거짓말을 한 겁니다.

수행 열심히 하시라고 그 동안 스님을 모셨는데 그 소리를 들은 아버지가 어이가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차마 스님을 죽이지는 못하겠고 본인이 시주해서 지은 암자를 불태우고 스님보고 떠나라고 합니다.

그 스님도 생각을 해보니 기가 막히거든요. 그런데 수행이 많이 되셨던 분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거사님. 죄송합니다. 그 아이 낳으면 제가 잘 키우겠습니다. 그리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금생을 살아갈 터이니 봐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잘못을 했는데 부처님 모신 법당을 태워서야 되겠습니까?"하면서 사죄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거사가 생각하기를 자기가 이 절에 시주도 하고 자신이 존경하며 모셨던 스님을 하인은 시켜서 몰매를 때리려고 하는 것도 걸리고 하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마을로 내려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딸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거사님은 아기를 스님에게 데려다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아이를 안고 다니면서 동냥젖으로 3년을 키웁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아기 엄마와 아버지는 속이 탔겠지요.

3년을 키우는데 그 거사의 외동딸이 참다가 자신이 큰 업장을 짓는 것 같으니까 죽을 생각을 하고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 거사님이 그 이야기를 임신 사실이 알려졌을 때 사실을 알았다면 다 맞아 죽었을 것인데 삼년을 참다가 이야기를 하니까 그 아기의 아버지를 데려다가 주리를 트는 것보다 그 아기를 데리고 3년 동안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살으신 스님과 자신이 받을 과보를 생각하니 아찔한 겁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자 말자 참회 해야겠다는 생각에 스님에게 달려갑니다.

절에 도착하니 스님이 아기를 안고 앉아서 공부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스님께 울면서 참회를 하고 사죄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본 스님은 아이 잘 키우라고 아이를 마루에 뉘어 놓고 스님은 방에 들어가서 방문을 잠굽니다.

그래서 거사님은 스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를 않자 문을 열어 봅니다.

그런데 스님은 뒷문을 열고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내 마음을 고요함 속에서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힘을 기르는 것이 불자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 더위는 갔고 좋은 가을이 왔습니다.

항상 기분좋은 가을날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서혜정| 조계사 보도부 법문녹취팀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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