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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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담론
<법문을 열며>
지금 여기 앉아 계신 분중 많은 분들이 어제 철야정진하셨던 분들이죠? 집에도 못가시고... 성도재일 하루는 절이 집인 사람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철야기도하면서 집에도 못가고 대웅전이나 신도회 사무실 한쪽 구석에서 잠깐 눈 부치신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까 의전부 보살들 보니까 철야했다는데 언제 화장은 해서, 우리는 얼굴이 푸석해 있는데 화장이 좋긴 한 것 같습니다.
내가 며칠 전에 아는 스님 알현으로 저녁 공양초청 받아 갔습니다. 신세를 진 보살이 있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가게 되었습니다. 왔던 보살님들이 조계사 신도님은 안계시고 강남 절에 다니는 보살들만 있었습니다. 강남의 큰 절이 있죠? 여기는 강북인데, 예전에는 강북이 일번지였는데... 강남의 보살님들과 저녁공양을 했는데, 강남 큰 절의 소임을 하는 분이시던데, 강남의 신도님들은 꼭 샌님들 같아요. 말도 소곤소곤하는데, 조계사 신도님들은 장군들 같습니다. 아마 터가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조계사 신도님들은 일선에 뛰는 전투병 같은데 강남의 신도님들은 작전과에서 도표나 그리고, 문서 작성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 얘기를 같이 공양했던 스님께 했더니 스님이 웃으시면서 “조계사 그 드센데서 어떻게 살어?” “재미도 있어요. 바람 잘 날이 없어서. 재미있습니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스님들도 봉황사, 해인사, 오대산 같은 곳에서 살면 자기도 모르게 기가 남성적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남성적인 스님도 송광사 같은 곳에서 한 1년 살면 샌님이 되서 유순해 있습니다. 아마도 터의 영향이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조계사 터가 워낙 양명한 곳이라서 여기는 오면 사람들이 활기차지고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이런 곳이 훨씬 좋습니다. 그러니 기도들 많이 하시도록 하십시오.
어제는 성도재일 철야정진 하느라 오늘처럼 법당이 꽉 차 있었고, 극락전에는 스님과 종무원들하고 철야정진 했습니다.
성도재일 기도를 하면서 생각이 나서 사담을 하나 하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출가를 해서 나도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은 들지만 20대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살고는 있지만 분주하기만 하고 영양가가 없는 것 같고, 공부는 20대 하던 게 끝이었던 것 같습니다. 10대 후반에 출가해서 한 10년간 답답할 정도로 공부만 한 것 같은데, 그 이후에는 공부를 별로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공부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성도재일에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달으셨다고 했는데, 제가 공부할 당시, 저는 새벽 별이 떨어진 것을 부처님 못지않게 많이 봤습니다. 장자할 때, 3년 동안 앉아서 잠을 자고 지낸 적이 있습니다. 밤에 잠과 싸우느라고 겨울에 부산의 범어사 금정산 꼭대기를 늑대처럼 혼자서 누비고 다녔습니다. 한 두 시간 다니다가 바위 옆에 앉아 쉬다 잠깐 졸면, 새벽 3시쯤 절에서 새벽 도량 목탁소리에 놀라서 일어나면, 밤에 유성이 흘러가는 것을 여러 번 봤었는데, 깨달아도 여러 번 깨달았어야 하는데, 공부가 부처님만 못해서, 사담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담론>
성도재일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별이 떨어진 것을 보고 깨달은 바를 담론하기로 하겠습니다. 어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부처님이 처음에 2500년 전에 태어나셨을 때는 여러분이나 부처님이나 저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부처님이 전생에 복이 저희들보다는 조금 나아서 왕자로 태어났다는 것이고 우리는 평민으로 태어난 것으로 별반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부처님이 어느 날 사춘기를 지나고 생활을 하면서 보니까 인생에 대한 고민을 우리처럼 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인류사에 한명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인생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게 돼 있습니다. 다만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이 왕자로 태어나서 고민이 없었다가 그 분도 사람이다 보니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보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점이란 생노병사였습니다. 그 고민을 쭉 하다가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도 저와 부처님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좀 어린 나이에 누가 선물로 준 조그마한 불교서적을 보고 충격을 받아 출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조계사 앞마당에 처음 들어와서 스님을 붙들고 출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스님이 수행을 많이 한 스님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성격이 활달하시고 저한테는 문수보살이셨고 모범답안을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서울서 멀리 떨어진 큰 절에 출가를 하시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원래는 해인사나 통도사 같은 곳에 가려고 했었는데, 그 전날 밤에 금생에는 술을 못 먹을 것 같아서 밤새 술을 마시다가 돈이 없어서 추풍령을 못 넘어가게 되어 할 수 없이 속리산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그 때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부처님하고 별 차이가 없어요, 어찌 보면 부처님보다 더 일찍 불교에 인연이 닿았습니다. 출가하고 나서 저도 나름대로 고행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날 갈라지기 시작했어요. 그날이 바로 12월 8일입니다. 부처님은 별 떨어지는 것을 보고 큰 깨달음이 왔는데 나는 별 떨어지는 것을 몇 번 보고도 큰 게 안와서 오늘날 한 분은 부처가 되고 한 사람은 원담이 되었습니다. 부처가 되신 분은 2500년 동안 저 뒤에 앉으셔서 만인이 주신 공양물을 당연하게 받고 계시는데, 나는 지금 올리다가 조금 승진해서 중간에 앉아서 다리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앞에는 차 한잔밖에 없는데 부처님은 공양물을 쭉 깔아 놓고 계시고, 나는 차 한잔도 고마운데, 부처님은 당연하게 받으십니다. 이리하여 한 분은 무량의 복덕을 짓는 여래가 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되지 못하면서 극명하게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도재일의 의미>
성도재일은 부처가 되신 분에게 한편으로 축하를 하고 같이 기뻐하고, 또 한편으로는
‘대체 그 분이 깨달은 법이 무엇일까? 나도 그분처럼 깨달도록 공부를 해야겠다.’는 발심을 하는 것이 성도재일의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 성도재일에 부처님을 보고 철야정진하고 가도 그것은 공덕이지만, 이왕이면 의미를 두도록 해야 합니다. 신행생활을 하면서 불교적인 날에 의미를 두고 자신을 추스르면서 새끼줄을 꼬아가듯이 매듭을 지어가는 것은 신행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한번씩 정리도 하고 자기공부도 점검해야 합니다. 12월 8일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감사하고 축복만 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과연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정법’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스승과 종교는 ‘나를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그 무엇인가를 향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에 매달리고 구원을 청하는데, 부처님은 ‘너를 구원한다.’는 말씀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나는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법 아뇩다라샴막삼보리를 너희에게 설명하겠다.”고 했습니다. 불교신자의 갈 길은 명료합니다. 부처님의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부처님이 갔던 길을 뒤따라가면 됩니다. 탁발하는 스님을 따라가듯이...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전도사라 지칭하셨습니다. 많은 말씀이 교리학적으로는 한량이 없습니다만-일본의 한 학자는 반야심경 하나로 책 100권을 만들었다 합니다-부처님의 신앙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보살심입니다.
아라한이란 번뇌가 끊어지는 법을 말합니다. 이는 절대로 어렵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 고요하게 잡념으로부터 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에 가서 부처님 코만 만지고 오다보니 본인이 거기에 앉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법문 전에 입정을 했지만, 우리는 산란스러운 마음이 고요해지는 그 순간이 아주 짧아서 망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러면 고요하고 번뇌가 끊어지는 아라한의 세계에 가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주 못 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아주 잠깐이지만 어느 순간 멍해있는 듯한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순간은 번뇌가 끊어진 우리의 본성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 순간이 좋은 줄 모르고, 들어갔다 나오다보니 이러한 상태도 생사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만난 많은 스승들에게 부처님이 이러한 질문을 제시했지만 스승들이 여러 얘기를 했지만, 부처님은 12월 8일에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나는 원래 한없이 고요함의 존재인데 그것을 모르고 자꾸 고요함에 들려고 했다. 자꾸 망념에 들어 나를 혼잡하고 중생스럽게 만들었구나. 그냥 툭! 놓고 여시하게 듣고 보면 더할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아라한의 모습이로구나.”
조계사 신도님이 무엇을 하시던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틀이 아라한의 번뇌 없는 곳으로 들어가려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 공부는 근기에 따라서 63빌딩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민한 사람은 홀연히 한순간에 알아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절에 오래 다니거나 불교에 오래 몸담았다고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항상 코만 만지는 공부만 하고 왔기 때문에 아직 부처님이 되지 못했습니다. 실질적인 깨달음에 대한 공부를 해보도록 하세요.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살님으로 떠받들게 됩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본인 스스로 부처님의 깨달음 공부를 보고자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처님은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法은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불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절에 다닌 기간, 근기, 교육수준, 금전 등은 아무런 관계없이 올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은 아무런 차별 없이 옵니다.
그 관건은 첫째, 망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아라한의 경지로 들어와야 합니다. 아함경에 보면 초기 부처님의 모습을 대 아라한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발전하면서 부처님을 후에는 보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보살이란 여러분이 보살이 아닙니까? 그 명호를 받을만한 노력을 해보세요.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차이란 우리는 우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고, 보살은 여러분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갑니다. 일단 거기에 대해서만 바꾸도록 해 봅시다. 공부를 많이 해도 잘 안되는 사람은 보살심을 가져봅시다. 보살심도 코만지듯이 하면 안됩니다. 마음안의 욕망을 드러내야 하는데, 사바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이 훨씬 중요한지라, 유물사관이 평정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빵이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내포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중요한 결심을 한번만 하면, 여러분들은 보살행과 아라한의 수행법에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듯이 쑥 올라갈 수가 있는데, 잠깐 생각하지만 법당을 나가는 순간 욕심이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한마음 한결심을 하면 여러분의 업장과 공부가 몇 생을 쭉 나갈 수가 있습니다. 나는 성도재일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성도재일을 축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도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드신 보살님들 같은 경우는 공부하는게 쉽지는 않겠지만, 남아있는 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깨달음의 길이 쑥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공부나 보살행으로 쑥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어요?
모쪼록 성도재일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는데 그 공덕을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내년 성도재일에는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앉아서 공양물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남아시아 지진.해일 피해에 대한 지원>
얼마전에 조계사에서는 총무원장 스님께 지진.해일이 난 곳에 지원하겠다는 약정서를 드렸는데, 신도 스님이 십시일반 모으고 부족하면 제 급여에서라도 떼어서라도 1억을 만들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현재, 구호 물품은 넘쳐나는데 어린아이들이 인신매매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돈으로 고아원을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원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하나는 이번에 피해당한 나라들이 어렵고 가난한 나라들이 많았고, 둘째는 불교국가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불교국가 가운데 일본 다음으로 우리나라가 잘 사니 도와야 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1억은 그 나라들에서는 고아원을 짓고도 일이년 운영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단에서는 탁발행사도 근간에 오래간만에 했는데 십시일반 모인 성금이 고아원을 짓는데 쓰인다고 알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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