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조계사 뉴스
거장들의 흔적
올 해 들어 가장 춥다던 날, 옥산서원에 갔다.
경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옥산서원이 있는 안강으로 가던 길은,
세상의 명리와 출세욕에 얼크러진 마음을 정리하고 오라는 듯
찬바람이 쉬임없이 불고 있었다.
오리 몇마리가 떠 있는 강가를 따라 차를 달리는 동안 바깥 풍경은
온통 기와장같은 색으로 밋밋했다. 모든 허식을 벗어낸 겨울색이었다.
옥산서원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기와장같은 밭과 나무와 집들이 이어졌다.
띄엄띄엄 놓여진 낡은 집들을 뒤로 하고 산과 산이 만나는 아늑한 마을에
들어서니 그곳이 옥산서원이었다.
넉넉한 자옥산이 품을 열어 자리를 내놓은 곳이었다.
서원 앞쪽으로 흐르는 자계천 곁으로는 수문장처럼
고목들이 버티고 서 있었는데 추상같은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의 나무는
기상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옥산서원은 16세기 영남사림파의 선구가 되는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배향한 서원이다.
그는 이(理)와 기(氣) 이전에 태극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여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주리적 성리학은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물줄기를 이루었다.
옥산서원은
보통 서원건축의 형식을 충실하게 지켜 배치되어 있었다.
진입부의 무변루(無邊樓)라는 문루를 지나면 마당이
놓여져 있고 그 뒤로 강학부인 구인당(求仁堂)이 나온다.
구인당 앞 마당의 좌우에는 공부를 배우러 온 원생들의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의 동·서재실이 좌정하고 있다.
구인당을 돌아 뒤로 가면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놓은
체인묘(體仁廟)라는 사당이 나타난다.
이는 서원건축의 기본구조인 전학후묘의 배치법이었다.
아, 이곳에서 조선의 정신이 이어졌구나.
이 곳에서의 가르침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조선을 동방의 등불이 되게 만들었구나.
향교가 국가에서 세운 관립 교육기관이었다면,
서원은 양반사림이 세운 사설교육기관이었다.
이곳에서 사림들은 훈구파에 대항하는
인재를 양성했고 학파를 형성했다.
대부분의 양반들이 서당에서 서원을 거쳐
과거시험을 치른 후에 성균관 유생이 되는 코스를 밟았다.
중세 때 서양에서 교회가 담당하던 역할을 조선에서는
서원에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입이 얼어 붙어 옆사람과 대화하기도 힘들 정도로 춥던 날,
옥산서원에는 찬기운만이 떠다니고 있었다.
후학들을 가르치던 카랑카랑한 선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스승의 정신을 지키던 제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적 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지키지 못하고 잃은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두터운 옷을 입고 있어도 몸이 흔들릴 정도로 추운 겨울 날.
스승을 찾아 이 먼 산골까지 걸어 들어왔을 과거의
학형(學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추위에 부르트고 얼어 붙은 마루바닥에 앉아
그들이 배우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의 나는 그런 배움의 열망을 지니고 있는 걸까.
내가 옥산서원에 간 것은 회재 이언적때문이 아니었다.
그 곳에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 글씨가 있어서 보러 간 것이다.
'전서의 굳센 맛을 살려내어 솜으로 감싼 쇳덩이'같다는 글씨.
'송곳으로 철판을 꿰뚫는 힘으로 쓴 글씨'라는 평을 받는
'옥산서원(?山書院)' 네 글자.
사진으로는 선학들의 주장을 도저히 담을 수 없어
직접 현장을 확인하러 나선 길이었다.
그곳에 가면 뭔가가 있을까.
현장에 가면 추사의 힘과 만날 수 있을까.
그 글자가 '구인당'의 처마밑에 걸려 있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단정하게 쓴
'?山書院'
네 글자. 서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맞춰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대로 절제하며 써내려간 네 글자.
네 글자 옆으로 '만력 갑술(1574) 사액 후 266년 되는
기해년에 화제로 불타서 다시 써서 하사하다'라는 현판을
쓰게 된 내력을 적고 있었다.
이 글씨는 추사가 1839년 그의 나이 54세 때 쓴 것이다.
그 해에 5월에 형조참판이 되었던 추사의 자신감이 응축된 글씨였다.
바로 다음 해에 불거진 옥사로 제주도에 유리안치 되리라는 운명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명문가 자제의 단호함과 자신만만함이 배여 있는 글씨였다.
내 좁은 정신으로 수용하기에는 너무 큰 인물 추사 김정희.
그는 내게 너무 벅찬 상대였다.
그의 정신세계에 근접하기에 그의 산은 너무 높고 가파랐다.
추사는 내게 첩첩산중이었다. 아무리 올라가도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 험준한 산맥이었다.
난 지금 추사의 어디쯤 와 있는 걸까?
7부능선? 아니 5부 능선? 아니었다.
아직 나는 추사의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집에서 신는 운동화로도
금새 꼭대기까지 오를 것 같았다.
등산화를 신고 아이젠을 부착하고 완전군장을 하고
작심하고 올라가도 도달할까말까 한
험준한 산봉우리를 나는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 준 길을 착실하게 따라가다보면
추사라는 꼭대기에 쉽게 도달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말한 길은 그저 지시된 길일 뿐이었다.
오르는 사람은 나였다. 다른 사람이 대신 올라가주지 않았다.
오로지 내 두 발로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저 산이 추사라는 산이오.'라는 지문 속에는 나의 얄팍한
개인차가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
종횡무진 거침없는 고전에 대한 해박함,
상상을 초월하는 학구열, 서법을 결코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법식을 뛰어넘은 추사체의 완벽함...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완당전집』은 내게 끝없는 절망과 좌절을 안겨준 책이었다.
한 문장을 읽어 나가려면 대여섯개의 각주를 들여다봐야 건너갈 수 있었다.
아니, 대여섯개가 아니었다. 간단하게 적힌 각주가 이해되지 않을 때면
원전을 찾아 읽어 나가야 했고 그러다보면 한 문장 위에서
하루가 가고 다음 날이 시작되었다.
그의 인생과 작품세계는 8년간의 유배지에서 깊어졌다.
그리고 그 전까지 그의 글씨에서 보이던 기름기는
유배지에서 거둬졌다.
천성적으로 타고는 학자로서의 탐구열과 지적 욕망이
유배지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고통의 끝까지 자신을 밀어 부친 힘이
오늘날의 추사체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주도 이후의 글씨에는 고통과 번민과 울분과
한을 녹여 낸 대자유인의 호흡이 들어 있다.
"침계( 溪), 이 두 글자를 부탁받고 예서로 쓰고자 했으나
한(漢)나라 비문에서 첫째 글자를 찾을 수 없어서 감히
함부로 쓰지 못하고 마음속에 두고 잊지 못한 것이
이미 30년이 되었다. 요사이 자못 북조(北朝) 금석문을 많이 읽는데
모두 해서와 예소의 합체로 씌어 있다.
수나라·당나라 이후의 진사왕(陳??)이나 맹법사(孟法師)와 같은
비석들은 그것이 더욱 심하다.
그래서 그런 원리로 써내었으니 이제야 평소에 품었던 뜻을
쾌히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추사가 침계( 溪) 윤정현을 위해 써 준 현판 글씨이다.
먹을 적시기만 하면 글씨가 되는 사람이 부탁 받은지
30년동안이나 고민하다 쓴 글이란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추사 김정희는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내게는 아직도 밑창 내야 할 벼루 10개가
고스란히 쌓여 있고 붓 한자루도 제대로
몽당붓으로 만들지 못했다.
아직은 나의 재능을 탓하기 전에
게으름을 탄식해야 할 것이다.
박사과정 수업을 하려는 추사에게
유치원생의 머리로 마주해서는 안될 것이다.
난 이제부터 또다시 시작해야한다.
아니, 날마다 시작할 것이다.
추사의 문장을 각주 없이 읽을 수 있고
그의 강의를 친구처럼 편하게 받아 들일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쉬임없이 벼루를 갈 것이다.
홑옷속으로 사정없이 파고드는 추위를 뚫고
스승의 가르침을 찾아 옥산서원으로 찾아오는 학형들.
유배지의 칼바람과 절망을 추사체라는
용광로 속에 녹여버린 위대한 학자 김정희.
우리 역사는 그런 거대한 물줄기속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물줄기가 비옥하게 땅을 적시고
곡식을 살찌우게 하는 것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고 의무이다.
10개의 벼루를 밑창내고
천여개의 붓이 닳을 때까지 쉬임 없이 갈 일이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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