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조계사 뉴스
일요법회 - 은해사 주지 지안스님 법문
원교(圓敎)란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원만하게 다 수용하는 효험을 말합니다. 원교는 바닷물과 같습니다. 바닷물은 지상에서 흘러온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뿌리는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빨아들이지만, 반대로 빨아들이지는 못합니다. 깊은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보십시오. 낮은 곳에서는 위에서 흐르는 물이 흘러올 수 있지만, 낮은 곳에서 위로 흐를 수는 없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심(下心)을 하면 남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하심을 하지 못하고 ‘나’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상(?)을 내세우면 남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일요법회라고 하여 법당에 모이셨는데 부처님을 대하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부처님 생각으로 인해 정서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연히 내 마음이 공경스러운 마음이 되면서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또, 내가 의지하는 부처님이 나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불교에 있어서 가장 소박한 마음은 부처님을 의지하면 부처님의 가피가 내릴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귀의(歸依)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법당에 앉아 있으면 자연히 마음속에 귀의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이는 심리적으로도 좋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부처님을 찾는 것은 부처님의 공덕을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게 됩니다.
셋째,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부처님을 대하면 무엇인지 모르지만 지난 일을 반성하게 됩니다. 즉, ‘참회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거나, 게으름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낸 적이 있다는 반성하는 마음이 참회입니다.
넷째, 원(願)을 세워서 앞으로 이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즉, ‘발원하는 마음’ 이라 칭합니다.
법당에 앉아 있는 자체에 귀의, 찬양, 참회, 발원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정서적인 순화,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부처님을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신앙생활이 여러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 이렇게 독실하게 나가다 보면 스스로의 마음이 밝아지고 편안해집니다. 우리는 대부분 나름대로 자신의 신행생활을 실천하는 방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108배를 매일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경전을 독송하는 이, 매일 시간을 정해서 참선수행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염불이나 주력, 기도 등을 통해 각자의 근기에 맞춰 행하는 방식이 있는데 그 방식들은 ‘내 마음을 밝게 갖는 것’이 목표입니다. 어떠한 상황이든 내 마음이 밝은 상태냐 어두운 상태냐에 따라 신행생활을 바르게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통해 밝은 정신세계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현실의 어려움을 만나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가령 나한테 손해되는 일이 생겼을 때, 불쾌하고 서운한 감정으로 인해 마음이 어두워지기도 합니다. 또한 욕심이 지나치게 생겼을 때, 못마땅한 일이 생겼을 때 등 중생은 어두운 마음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을 하실 때 불을 밝히라는 말씀을 자주하였다.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란, 내 자신을 등불로 삼아서 어두운 곳을 밝힌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란 그때그때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가지고 있으면서 심리상태가 어떻게 됐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기분이 어떤가? 내 마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금강경>에는 수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행한 사람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는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문제에 너무 집착해서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스스로 옭아매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마음을 어떻게 항복시켜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만 해결이 되면 세상에 아무 문제가 없어집니다. 불교는 이 세상 모든 문제는 마음 안에 있다고 합니다. 마음을 심리적인 갈등, 불안, 초조, 안타까움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관찰해 볼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모든 문제가 밖(현실)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는 전도몽상(顚倒??)이요, 거꾸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게송)
우리는 길이 없어 못가겠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길이 막혀서 더 이상 나갈 곳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행인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산이 다하고 물이 막혀 나갈 곳이 없을 때, “더 이상 갈 길이 없다. 활로를 찾을 수가 없다.”고 외칩니다. 이렇듯 답답해 졌을 때 한숨을 쉬고 낙심을 하고 절망을 하고 자신을 포기해서 때로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생심에서 볼 때 이 세상은 절망의 경계에 많이 부딪힙니다. 더 이상 나갈 곳이 없을 때 새로운 활로를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그 행인에게 무릉도원 같은 마을이 하나 보입니다. 푸른 버드나무가 있고 꽃이 핀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중생의 번뇌를 벗어나면 누구든지 보입니다. 부처님 법에는 이 세상에 절망이란 없습니다.
어느 날 다른 절에 갔는데 마침 한 노보살님의 49재였습니다. 그런데 생시에 친하게 지내던 노보살이 유독 소리 내어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고인에 대한 정이 깊어서라고 생각해서 그 절의 주지스님께 물어보니, 그 스님 말씀이 “스님 그 보살님은 오늘만 운 게 아니라 49재 기간 내내 울었습니다.” 무슨 정이 그렇게 깊었냐고 하니까, “떠나간 보살님은 슬하의 자녀가 절에서 49재를 지내주는데 자기는 49재를 지내줄 사람이 없어서 서러워 운다.”는 것입니다. 사실, 죽음도 하나의 절망으로 다가오는 심사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절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생사의 경계가 헛된 것이라 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산다는 것은 시간을 따라서 옮겨가고 있는 진행의 과정입니다. 진행의 과정이란, 통과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인생은 모든 것이 통과하는 과정입니다. 죽음은 절망이 아니요, 슬픈 비극의 단면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태평각>이라는 중국 고전의 설화가 있습니다. 송나라 때, 과거부터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서 만든 책인데 그 가운데 하나를 이야기 할까 합니다. 불교에서 일컫는 천상의 세계(33천)에 가면 두 번째인 도리천(제석천, 옥황상제)이 인간세상을 비행하다가 어느 마을의 정자나무에 걸터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천상인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 인간들이 정자나무 밑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네 명의 사람이 소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나는 이 세상에 있는 돈을 다 벌고 싶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이 세상을 학보다 오래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양주 목사(벼슬)가 하고 싶다”고 하고, 네 번째 사람은 “앞에서 말한 모두를 다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제석천은 이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소원을 모두 이루어지게 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들이 죽기 전날 같이 모입니다. 이들은 내일이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죽음에 임하는 소감을 말하는데, 첫 번째 사람은 “눈물이 흐른다. 슬프다.”, 두 번째는 “허망하다.”, 세 번째는 “두렵다.”, 네 번째 사람은 “지금 말한 전부를 다 느낀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복된 생활을 했다하더라도 슬프고, 허망하고, 두려운 것이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을 같이 생각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설법을 하고 다니실 때, 부처님 아버지인 정반왕이 보낸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사자는 “정반왕이 임종에 가까워서 싯탈타 왕자(부처님의 속세 이름)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정반왕을 뵈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정반왕이 사는 궁으로 가서 왕의 침상 곁으로 다가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버지 이 세상에 왔다가 무얼 하시고 어떻게 가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정반왕은 고개를 저으면서 “모른다. 나는 다만 눈을 감기 전에 너를 꼭 한번 보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정반왕은 세간법으로 에서 자식인 싯달타가 왕위를 계승해 주기를 바라면서 아들은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었고, 부처님께서는 인생의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묘하게 앙상블을 이루는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대(竹)가 아무리 촘촘히 서 있어도 흐르는 물 지나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산이 높다고 구름이 산에 막혀서 가지 못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든 고비가 있다고 하더라고 큰 원력으로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불법을 믿는 마음으로 미래를 살아갑시다.
芝霞 이경주
행정학 석사, 불교가 모태신앙, 한 아이의 엄마이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저작권자 © 미디어조계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