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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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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정기성지순례 - 영주 부석사, 희방사

  • 입력 2006.06.27
  • 수정 2024.11.21

불기 2550년 6월 20일에 조계사 신도회에서는 원주 도경스님을 모시고 86명의 신도님들과 오붓하게 영주 부석사와 희방사로 6월 정기성지순례를 다녀왔다.

 

6시 40분에 조계사를 출발해 영주 부석사로 달리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두 손을 가지런히 합장하고 예불을 드리는 노거사님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봉황산 부석사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에 이르기 전에 우뚝 선 당간지주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보통 당간지주는 절 입구에 세워 절의 행사 등을 당간에 매달아 알리기도 하는데, 1977년에 원래 일주문 자리에 천왕문을 세우고 일주문을 당간지주 밖에 세움으로서 당간지주가 절 안에 들어와 있게 되었다.

 

 

천왕문을 지나면 신라시대에 축조된 크고 작은 면석을 섞어 쌓은 대석단이 보이고 범종각 아래를 통과해서 범종각에 오르면 목어와 북과 운판만 보이고 종이 보이지 않는다. 종은 범종각 서쪽에 따로 위치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파른 계단을 단숨에 올라 안양문을 지나 안양루에 오르면 그제서야 한숨 돌리고 눈앞에 펼쳐진 불국토의 장엄한 광경을 굽어보게 된다. 굽이굽이 산에서 산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의 능선들을 보고 있노라면 왜 여기에 부석사를 세웠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함에서인지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비켜서 자리한 석등의 하대석은 귀꽃을 갖춘 복연의 연화문으로 장엄되어 있다. 그 중 유독 하나의 귀꽃만이 누워있는 듯 모양을 달리하고 있다. 장인의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불심이 강하고 조각에 자신이 있는 장인의 손끝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겠는가! 석등의 화사석은 사면에 창을 내었고 다른 사면에는 각각 공양 미륵상이 배치되었다.

 

 

부석사의 본전인 무량수전은 신라형식으로 보이는 석기단 위에 배흘림이 많은 두리기둥을 세웠다. 전면은 정(井)자 살창으로 되어 있고 후면은 중앙에 쌍 여닫이 판장문에 그 양쪽에는 붙박이 살창을 달고 내부에 판문을 덧댔다. 아마도 뒤쪽 산위에서 불어오는 습기가 많은 바람은 바로 빠져나가고 앞쪽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은 천천히 빠져나가게 하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이리라.

 

무량수전은 남향으로 건물의 서쪽에 불단을 만들고 그 위에 본존인 높이 278cm의 장대하고 육중한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을 동쪽을 향하게 안치하였고 상부에는 보개를 두었다. 주형광배의 높이는 380cm에 이른다. 부처님의 상호는 살이 오른 후덕한 인상으로 중생의 모든 원을 뭐든지 다 들어주실 것만 같다. 고려시대 불상으로는 정교한 편이며 남아있는 소조상으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아미타불이 주인인 극락세계는 우리가 사는 곳, 즉 사바세계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서방정토라고도 불려진다. 더욱 주목할 것은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 놓인 삼층석탑의 존재이다. 동쪽의 3층 석탑은 아미타불과 대비되는 석가모니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서방정토에 계신 아미타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에 생각이 미치니 바로 여기가 극락이 아닌가 싶다.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은 일승아미타불(一乘阿彌陀佛)로서 매우 특별한 존재이고, 열반에 들지 않기 때문에 사리묘를 뜻하는 탑을 세우지 않는다. 광명극락을 뜻하는 석등만이 있을 뿐이다.

 

무량수전에 이르는 계단이 가파르기 때문에 힘들 법도 한데 오르는 보살님들과 거사님들의 얼굴 모습에서는 그런 내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무량수전에서 원주 도경스님의 한 시간 반여에 걸친 예불은 고요한 산사에서 잔잔한 여운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조계사 신도님들의 가슴속에도 작은 감동으로 메아리쳤을 것이다.

 

무량수전 동쪽에 있는 오솔길을 따라 400m정도 오르다보면 오른편에 부석사를 세운 의상조사의 영정을 안치한 조사당이 나오고, 조사당 처마 밑에는 의상조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시던 지팡이를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시가 돋아나고 잎이 피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선비화(禪扉花)가 지금도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지금이 부석사에 하안거 중인 관계로 자연을 벗 삼아 간단히 도시락을 나누어 먹고, 희방사로 향했다.

 

희방계곡을 사이에 끼고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더위를 싹 가시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울창한 숲속을 따라 오르며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콸콸 흐르는 계곡 소리에 귀를 씻고 그렇게 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지나 굽이굽이 1400m정도 오르면 시원스레 쏟아지는 희방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거기서 200m 더 오르면 희방사가 위치해 있다.

 

 

무더위 속에서도 무던히 계곡을 오르는 보살님들의 모습에서, 힘들어 지칠 법도 한데 제일 먼저 법당을 찾아 정성을 다해 예를 올리는 모습에서 나는 불심을 보았다. 부처님의 법을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닌 노보살님의 신심 가득한 모습을 보며 어머님을 위해 손을 꼭 잡고 가는 보살님의 손길을 보며 몸으로 배운 하루였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아무 사고 없이 여법하게 모든 보살님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환희심으로 회향할 수 있어 더욱 뜻 깊은 성지순례였다.

 

 

덧붙임....................

영주 부석사는 산세가 봉황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 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또한 676년 2월에 의상(義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華嚴宗)의 중심사찰로 삼았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은 당나라에 도착해 어느 불자의 집에 며칠 머무르게 된다. 그 집의 딸 선묘(善?)는 의상을 사모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을 발하게 하였다.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에 올랐는데,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둔 법복(法服)과 집기(什器)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린 것을 알고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배를 향해 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자기는 서원(誓願)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가 신라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이교도들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으므로 선묘가 변한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 무리들을 위협함으로써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게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부석(?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선묘는 이에 그치지 않고 부석사를 영원히 지키고자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밑에서부터 석등까지 몸을 묻고 지키고 있다고 한다.

 

 

부석사는 성보문화재의 보고(寶庫)라고 할 만큼 많은 국보와 보물을 지니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 17호)을 비롯하여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제 45호), 조사당 벽화(국보 제 46호), 삼층석탑(보물 제 249호), 당간지주(보불 제 255호), 부석사 고려각판(보물 제 735호) 등등 많은 성보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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