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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세시명절과 불교이야기 ④ - 출가절

  • 입력 2007.03.19
  • 수정 2024.11.24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해서였다.

<중아함경 권56, 라마경>

 

 

 

오는 3월 26일은 음력으로 2월 8일,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기 위해 출가하신 뜻 깊은  날입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해서 인도의 작은 나라 왕자였던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가 삼계(三界)의 도사(導師)이자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셨으니 우리 불자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할 당시의 심정을 부처님의 일대기를 적어 놓은 ‘불소행찬(佛所行讚)’에서는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읽으시는 분들의 편의를 위하여 동국대 정태혁 선생님의 한글번역본을 인용하였습니다.

 

 

(전략)

이와 같이 나타난 모습과 본성을 알고 그날 밤에 성문을 나갈 마음을 일으키니 신들은 그 마음을 알고 성문을 열었다.

잠자고 있는 여인들을 비천하게 여기면서 누각을 내려온 왕자는

미혹을 떨쳐 내고 궁전 밖 뜰로 나갔다.

마부 짠다카를 깨워 말했다. "급히 말 간타카를 끌고 오라. 나는 죽지 않는 감로를 얻기 위해 나가련다.

오늘 나의 마음은 만족스럽다. 나를 이끌어 줄 스승이 있으니, 나는 지금 애욕을 없앴다.

 

(중략)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없는 영화를 미련 없이 버리고 궁성을 떠나갔다.

진흙 속에 피어난 연꽃 같은 눈을 뜨고 도성을 바라보며 사자후를 토했다.

"삶과 죽음을 떠난 저 언덕을 보지 않으면 다시 가필라 성으로 돌아오지 않겠노라."

 

(후략)

‘삶과 죽음을 떠난 저 언덕을 보고자’서원하며 출가하신 싯다르타 태자의 결연한 의지는 다른 경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중아함경 권56, 라마경>에 보면,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해서였다.” 라고 말슴하신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어 부처님의 출가가 오늘날 우리가 어떤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출가절과 일주일 간격을 띄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열반절(음력 2월 15일)이 있어 불가에서는 오래 전부터 츨가절과 열반절을 함께 모시고 기념하는 풍습이 전해지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출가절과 열반절 사이의 일주일간을 ‘경건주간’, ‘정진주간’으로 정하고 부처님의 출가 후 6년 설산고행을 본받듯이 더욱 열심히 수행정진에 임하고 있습니다.

 

출가절과 연관된 풍속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삼국유사 권5 >에 나와 있는 '김현감호(金琅感虎)‘설화를 보면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 초8일로 부터 15일까지 서울(경주)의 남자와 여자들은 흥륜사(興輪寺)의 전탑(殿塔)을 다투어 돎으로써 그것을 복회(福會)로 삼았다고 합니다.

 

음력 2월 8일에서 15일은 출가절과 열반절과 일치하고 고려시대에는 2월 보름에 ‘연등회’를 열었다는 기록 - 정월 보름과 이월 보름에 번갈아 열리기도 함 - 이 있는 것을 보면 이들과 아주 무관한 풍속은 아니었던 듯 여겨집니다. 널리 알려진 설화이지만 다시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성왕 때에 낭군 김현(金琅)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밤이 깊도록 홀로 탑을 돌면서 쉬지 않았다. 그 때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 사랑하게 되어 깊은 정을 통하였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가니 처녀는 사양하고 거절했으나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서산 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에 들어가니 늙은 할미가 그 처녀에게 물었다.

"함께 온 이가 누구냐?"

 

처녀는 그 사실대로 말하자 늙은 할미가 말하길,

"비록 좋은 일이지만 안 한 것보다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니 나무랄 수도 없다. 구석진 곳에 숨겨 두어라. 네 오빠들이 해칠까 두렵다."

하고, 김현을 이끌고 가서 구석진 곳에 숨겼다.

 

조금 뒤에 세 마리의 범이 으르렁 거리면서 오더니 사람처럼 말을 하며,

"집안에 비린내가 나는구나! 요기나 하면 오죽 좋겠느냐?"

하니 늙은 할미가 꾸짖기를,

"너희 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 왜 미친 소리를 하느냐?"

라고 했다. 이때 하늘에서 호령하기를,

"너희들이 산목숨을 해치길 좋아하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서 악을 징계하겠노라."하니, 세 호랑이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근심하는 기색이었다. 그 때, 처녀가

"만일 세 오라버니가 멀리 피해 가서 스스로 악을 고친다면 제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모두 기뻐하며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치면서 도망해 가 버렸다.

 

처녀는 들어와 김현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저는 낭군이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으나 이제는 감출 것이 없으니 감히 마음을 털어놓겠습니다. 천첩이 비록 낭군과 같은 족류(族類)는 아니오나, 하룻저녁의 즐거움을 같이 했으니 부부의 의를 맺은 것입니다. 세 오라버니의 악독함을 하늘이 미워하시니, 우리 집안의 재앙을 제가 혼자 감당하려 합니다.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서 은덕을 갚는 것과 같겠습니까? 천첩이 내일 저자거리로 들어가 마구 사람들을 해치면 사람들이 나를 어찌 할 수 없으므로, 임금께서 반드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나를 잡게 할 것입니다. 낭군은 겁내지 말고 나를 쫓아 성 북쪽의 숲 속까지 오시면 나는 낭군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고 했다.

 

다음날, 과연 사나운 범이 성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해침이 심하니, 감히 당해 낼 수 없었다. 원성왕이 이 소식을 듣고 영을 내려 말했다.

"범을 잡는 사람은 2급의 벼슬을 주겠다."고 했다. 이에 김현이 대궐로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그 일을 해 내겠습니다." 라고 하니, 벼슬부터 먼저 주어 그를 격려했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 속으로 들어가니, 범은 변하여 낭자가 되어 반가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젯밤에 낭군과 정이 서로 결합된 일을 낭군은 잊지 마십시오.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모두 흥륜사의 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발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

하고는, 이내 김현이 찼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넘어지니 곧 범이었다.

 

김현은 숲에서 나와 그 사연은 발설하지 아니 하고, 다만 호랑이 말대로 상처를 치료하니 그 상처가 모두 나았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범에게 입은 상처에는 또한 이 약방문을 그대로 쓴다. 김현은 벼슬길에 오르자마자 서천(西川)가에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이름하고, 상시 범망경(梵網經)을 강하여 범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또한 범이 제 몸을 죽여 자기를 성공하게 한 은혜에 보답했다.

 

 

부처님께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초개와 같이 버리시고 생사해탈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결심한 금강석 같은 출가의지와 자신을 버림으로써 가족과 사랑하는 이를 살렸던 호랑이의 자비로운 마음을 출가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은 화두로 삼고자 합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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