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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명절과 불교이야기 ⑤ - 열반절

  • 입력 2007.03.26
  • 수정 2024.11.24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 년 전 이 땅에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길 위에서 태어나셔서(誕生) 길 위에서 출가(出家)하시고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成道) 평생 동안 길을 걸으시며 진리를 가르치셨으며 결국 길 위에서 열반(涕槃)에 드셨습니다.

 

열반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nirvāna)’란 단어를 음역한 것인데‘번뇌의 불길이 꺼져서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불교에서 지향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기에 부처님께서 육신의 몸을 벗고 진리의 세계에 드신 것을 ‘입멸(入滅)’, 즉 열반의 세계에 들어 가셨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열반은 곧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그 순간은 제자들에게 가장 슬픈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부처님께서는 자애로운 스승으로서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남기셨는데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 곧 유훈(遺訓)입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야 한다. 물과 젖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위에 기름처럼 겉돌지 말아야 한다. 함께 내 교법을 지키고 함께 배우며 함께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깨달음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이든지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자리이타의 법을 다 갖추었으니 만일 더 오래 머루른다 해도 이 이상 이익 될 바가 없을 것이다. 마땅히 제도할 사람은 이미 다 제도했으며 아직 제도 받지 못한 이가 있더라도 득도의 인연을 모두 지었다. 이제부터 나의 모든 제자들은 정법을 서로 전하고 이어 받으며, 여래의 법신이 상주하여 항상 사라지지 않게 하라.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이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인천(人?)의 위대한 스승이신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셨고 전통의 장례절차에 따라 화장 후 사리를 수습, 8등분하여 각 나라에서 탑을 세우고 공경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열반절은 이후 인도, 중국,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명절로 여겨왔는데 전해지는 기록 중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 범연나국(梵衍那國)조’에 보면 열반절을 맞아 “가람에 불입열반의 와상(臥像)이 있는데, 왕은 매해 무차대법회를 연다”는 기록이 있고, 원인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음력 2월 8일부터 15일까지 무애다반(無碍茶飯)이 있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가 전래된 나라에서는 성대하게 기념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범연나국은 오늘날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세계 최대석불이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지역을 말합니다.)

 

한편 부처님의 열반과 함께 여러 나라가 나누어 모셨던 부처님의 사리(舍利)는 이후 인도 아쇼카왕에 의해서 모아졌다가 전 세계 각지에 8만 4천여 개의 탑을 세우면서 다시 나누어 모셨다고 하며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나 국가에서는 최고의 경배대상이 되었는데 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상당히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유사>에 보면 부처님 사리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그 중 의상대사와 관련된 설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 지엄존자(智儼尊者)에게 가 있었는데, 이웃에 선율사(宣律師)가 있어서 항상 하늘의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에서 먹을 것을 보내 왔다. 어느 날 선율사는 의상법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는데 의상이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하늘에서 보내는 음식이 오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리때만 가지고 돌아가자 비로소 천사(?使)가 내려왔다. 선율사가 ‘오늘은 어찌해서 늦으셨소’하고 묻자 천사가 대답하길, ‘온 동네에 가득히 신병(神兵)이 막고 있어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선율사는 그의 도(道)가 자기보다 나은 것에 탄복하고는 다음날 지엄(智儼)과 의상(義湘) 두 대사를 청해서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다. 의상이 조용히 율사에게 말했다. ‘율사는 이미 천제(?帝)의 존경을 받고 계신데,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帝釋宮)에는 부처님의 이빨 40개 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천제께 청하여 그것을 인간에게 내려 보내어 복이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율사는 이 후에 천사를 통해 그 뜻을 천제에게 전하니 천제는 7일을 기한하여 이를 보내주니 의상은 경례를 다한 뒤에 맞이하여 대궐에 안치했다.” <삼국유사 제3권,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중에서 

(선율사(宣律師) : 도선 율사 (道宣 律師))

 

 

이후 이 부처님의 어금니 사리는 불교를 탄압한 송나라 휘종을 피해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로 와서 잘 모셔졌다고 합니다.

 

한편 금강산에 있는 명찰(名刹) 유점사(楡岾寺)의 창건설화에서도 부처님 사리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뵙지 못함을 아쉬워하자 문수보살이 금으로 불상을 조성케 하고 이 중 부처님 모습과 닮은 53존의 불상을 택하여 커다란 범종에 담아 바다에 띄웠다. 떠내려가는 범종을 바라보며 문수보살은 발원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얼을 담은 화신의 53존 부처님이시여, 바라옵건대 인연 있는 나라에 닿아 불법을 널리 펴시옵소서. 또한 부처님을 모르는 중생들과 인연을 맺게 하옵소서.’

 

53존불을 태운 범종은 바다를 떠다니다 이윽고 월지국에 다다랐다. 한편 월지국왕은 꿈에서 나타난 신인(神人)의 계시를 받고 바다에 나가 범종 속에 모셔진 53존불을 발견하게 되었다. 환희심을 일으키며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과 범종을 봉안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이 났다. 애석해 하며 다시 모시려 했으나 인연처가 따로 있다는 현몽을 받고 아쉬워하며 다시 바다에 띄웠다. 그렇게 다시 바다에 띄워진 범종은 한참을 지나 지금의 강원도 간성지방에 해당하는 안창현에 닿았다고 한다.

 

그 고을 수령인 노춘이 이를 발견하고 사람들을 모아 다시 와보니 범종이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한 아전이 커다란 물건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하고 이 자국을 따라 금강산 쪽으로 30여리 가자 어디선가 은은한 범종소리가 들려 왔다. 종소리 나는 곳으로 찾아가 보니 느릅나무에 범종이 걸려 있었고 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울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뜻과 정성을 모아 그 곳에 절을 짓고 53존불을 안치하였는데 범종이 느릅나무에 걸려 있었다 하여, 절 이름을 '유점사(楡岾寺)'라 지었고 오래도록 신라인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유점사에는 53존불이 월지국에 잠시 머물렀던 인연을 상기시키기 위해 만든 '월지왕자'라는 사당이 있고 새 떼가 몰려와 바위를 쪼고 땅을 쪼아 팠다고 하는 '조탁정'이란 우물이 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중에서

 

 

이 설화를 통해서 우리는 부처님의 법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이 땅에 전래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출가절에 이어 일주일 간격으로 열반절을 맞게 됨은 우리 불제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용맹정진(勇?精進) 해 온 오랜 수행전통을 이어받아 더욱 더 수행에 매진할 일입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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