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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덕주공주의 지고한 사랑과 그리움을 품고

  • 입력 2007.11.30
  • 수정 2024.11.23

이제쯤은 늘 그렇듯 발작처럼 일어나는 가을날에 가슴앓이도 멈출 나이 때가 되었건만 낙엽이 짙은 산사(山寺)를 찾아가는 여행길에 서면 나는 아직도 설레임으로 몸을 떨게 된다.

 

절집에 분연히 서 있는 하찮은 돌멩이, 풀포기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여 합장을 하고, 일상의 누추함과 초췌함을 떨치며 옷깃을 여미어 신성의 경건함을 호흡하려 애를 쓴다.

 

산세가 좋은 우리 산하(山河) 그 자리, 명당 품에는 언제나 산사가 있고 그 산자락 길이 끝나는 막다름에는 암자가 있다. 가는 길은 바람이 좋고, 풍경이 좋고, 이름 모를 들풀과 산새들의 지껄임이 있어 좋다. 거기서 만나는 속세의 경계 안, 푸르게 다가서는 편안한 소리들, 노승의 독경 소리와 허름한 대웅전 추녀의 앙증맞게 달린 풍경이 울리는 맑은 청랑(靑?)의 소리, 천년은 더 되었을 거북 돌확에서 똑똑 떨어지는 감로수 물방울 소리, 그러한 자연의 풍경과 소리들은 어려운 인생길에서 지치고 외로워 홀연히 길 떠난 나그네의 울적한 마음을 보듬어 안아 주고 다시 기운을 차려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게 해 희망을 주는 것이다.

 

단풍은 자연이 들려주는 애절한 이별의 시가 아닐까? 늦가을 청풍 호반을 끼고 덕주사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 물길과 계곡을 따라 현란한 색채의 단풍들이 나무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애틋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색계(色界)의 무릉도원이다. 짓 푸른 호수에 비친 한 줌 햇살들이 보석처럼 눈부시다. 무감어수(無鑒於水)라는 말이 있다. 물에다 얼굴을 비추어 보지 말라는 뜻으로 사물에 대하여 외모나 표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경계로 들리지만, 파란물이 너무 맑아 한 번쯤 차를 세우고 얼굴을 비춰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리하여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자작나무 터널과 단풍나무 터널을 지나 월악산으로 오르는 길, 소담한 송계계곡을 끼고 20여분 오르면 거기에 덕주사가 있다.

 

 

덕주사(德主寺),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 3번지에 위치한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고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본사 법주사의 말사. 창건연대는 587년, 신라 진평왕 9년으로 처음에는 월형산(月兄山) 월악사(月岳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후 신라가 멸망한 후 경순왕의 장녀 덕주공주(德主公主)가 불교에 입문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한 후 덕주사로 개칭하였다고 전해 진다.

 

 

덕주사의 전신은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라 하고, 지금의 덕주사를 하덕주사라고 하였는데 1950년 경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1963년에 지암 권정철스님이 지금의 덕주사를 중창했고, 이어서 1970년에는 박해찬 스님이 법당을 중수하였는데 이때 1206년(희종 2)에 조성된 고려시대의 금고가 출토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85년 성주스님이 절을 다시 중건하여 오늘의 모습을 보인다. 1985년의 중창 당시에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는 한수면 역리에 있던 고려시대 덕주사로 석조약사여래입상을 옮겨 봉안했다. 최근 1998년 청하 성일스님이 주석하면서 건물 오른쪽에 새 부지를 마련하여 대웅보전을 새로 건립하였다. 2007년 까지 조계사에 계시던 원경스님이 부임하셔서 현 도량 불사 등 사세 중흥에 매진하고 계신다.

 

주지 원경스님, 월동준비로 대웅전 문창호지를 다시 바르고 계시던 스님을 뵈었다.

모처럼 찾은 산사에서 청정함을 마음에 가득 담고 스님과 나누는 차담(茶談)은 생활과 삶의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스님과 마주 앉아 마시는 우전녹차 한잔, 그리고 덕담 한 소절은 큰 법당에서 스피커를 통하여 들어오는 법문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디지털과 아나로그의 차이라 할까 디지털은 편리한 방면, 리얼리티와 인간적 정감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사람다운 아나로그를 좋아하고 - 지친 도회의 찌꺼기들을 걸러 내고 새로운 기를 받는 시간, 차 맛에 홀리고 산사 분위기에 홀리고, 참 대단한 호사이다.

 

원경스님은 그랬다. 그냥 지나다 슬쩍 어깨를 뚝 치며 장난을 걸고 싶은, 소년의 고운 미소를 간직하신 - 그래서 스님 주위에는 항상 아이들이 바글댄다. 두 손을 끌어대며 숨바꼭질도 하고 어깨에 무등을 타기도 하고, 그렇게 아이들을 좋아하고 그들 안에서 아이들을 이해하기에 늘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간직하려 애쓰신단다. 어차피 아이들이 미래 한국불교의 등불이며 희망이기에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을 찾아오는 아이들이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씀하신다.

 

부임하신지가 얼마 안되었는데 하신 일이 많다. 일만개 등불조성으로 산사를 밝히고 덕주 공주 위령제 및 산사음악회를 개최하고, 재난을 당한 수재민들에게 구호물품전달과 의료봉사반을 조직, 생활이 어려워 병원을 못 찾는 지역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 등, 동네 주민 안에서 그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생활불교가 자리할 수 있도록 포교 방법론적 방향을 제시 몸소 실천하고 계신다.

 

이제 절 구경을 좀 해 보자.

덕주사, 사찰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구석도 있지만, 이제 막 꽃을 피우려 안간힘하는 한 떨기 수련화처럼, 그렇게 단아하고 수덕하게 몽우리를 벙그고, 지역 주민들과, 월악산을 찾아 길을 나선 등산객, 홀연히 문득 길을 나선 나그네까지 편안을 깊게 호흡하며 모두의 가슴에 안녕(安寧)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구김이 생기는 날, 그렇게 스스럼없이 찾아가 한 생각 접을 때까지 한참을 머물러도 좋다는 얘기이다.

 

산사는 계절따라 계곡과 숲이 연주하는 음악의 깊은 소리를 들으며 흘러 온 세월들의 더께를 여과없이 보여 준다. 늦가을 정취에 홀린 덕주사대웅전도 첼로의 점잖은 선율로 감미롭게 시작되어 바이올린으로 반복되고 이어서 첼로와 바이올린이 하모니를 주고받다가 목관악기로 옮아가는 - 송계계곡에 개울이 들려주는 늦가을 센티메탈의 음악, 브람스의 3번 교향곡 3악장를 들으며 가을앓이를 심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안단테 안단테, 안단티노 조화로운 음률에 휑댕거니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사색에 젖는 모습은 몇 일전 구름처럼 몰려왔다 썰물처럼 빠져 나간 속세 대중들의 부질없는 정을 그리워하는 건지도. (10월 20일, 덕주공주 위령제와 산사음악회가 성황리에 개최 됨.)

그러한 행사를 치루기 위함이었을까? 건축 된지 오래지 않아 너무 선명한 단청 색상을 입고 선 대웅전은 규모에 비해 나무 한 그루 없이 지나치게 넓은 마당과 조화되지 못한다. 빈 마당에 덩그란 공허는 일찍 지는 산골의 붉은 노을과 더불어 대웅전을 더욱 쓸쓸하게 한다.

저기 마당에 나무라도 하나 심어 놀까. 언제나 그렇듯 역사의 흥망성쇄는 이땅 전국 사찰 터 위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전쟁의 아픔을 견디지 못한 절들은 대부분 소실되고 근래 불사로 고색창연 함 보다는 너무 화려하고 또렷한 색감이 주변 풍감에 이질스럽다. 두세 평생 쯤 지나면 그 숲에 풍경으로 녹아 들겠지만.

 

산신각, 대웅전 마당을 넘어 오른쪽으로 일백미터 쯤 가면 약간 후미진 곳에 비각과 산신각이 있다. 이 비각에 비를 대불정주범자비(?佛頂呪梵字碑)라 하는데 충북 유형문화재 231호이다. 비석에 높이는 161cm 너비는163cm로 고려후기 성행하던 수능엄경(首릉嚴經)에 있는 능엄주를 음각으로 새겨 넣은 것이다. 내용은 불교수행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실천 과정은 어떠해야하며, 수행자들의 위상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 비석의 능엄주는 제 7권 다라니로서 모든 마군(摩軍)과 외도(?道)를 항복받고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인 옛 범자(梵字)로 새겨져 있다.

비각 옆으로는 10여 미터 떨어져 산신각(山神閣)이 조성되어 있는데, 커다란 자연의 바위가 2미터쯤 갈라진 틈새에 화강암으로 산신도를 그려 봉행하고 월악산 영봉에 정기를 받아들여 외호신으로서 덕주사에 안주해 참배객들의 무사 안녕과 염원을 섭수하게 되었다.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대웅전을 왼편으로 낀 월악산 쪽으로 찻집같은 종무소와 150여미터 떨어진 곳으로 가 축조된 공양간이 있고, 그 옆으로 고려시대 조성된 유서 깊은 약사전이 있다. 이 약사전에 부처님은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신심이 돈독한 불자의 원력으로 소박하게 조성된 가장 한국적 부처님이라 할 수 있다. 한수면 역리에 모셔져 있던 것을 충주댐 건설과 함께 역리가 수몰되자 이 곳 덕주사로 모셔 봉안하였다. 현재까지 구전되어 오는 약사불의 영험함은 약사불의 온 몸이 성한 데가 한군데도 없는데, 이는 예전부터 아픈 환자가 와서 기도를 드리고 약사여래의 몸에서 자신의 아픈 곳과 같은 부위를 가루로 긁어다 약으로 쓰면 말끔히 나았다는 일화를 믿고 환자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약사여래부처님의 전신은 상처투성이이다.

 

약사전 옆으로 관음전이 있고, 관음전을 끼고 10여 미터 떨어진 월악산쪽으로 이곳에서 열반에 드신 고승들의 부도탑이 자리하고 있다. 어떻거나 눈 여겨 보면 일렬로 드문드문 늘어선 전각과 건물들이 한눈에 산뜻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산만하다. 하여 할 수만 있다면 원을 하나 그리고 모두 옮겨 원 안에 선 따라 배치하고 싶다. 그래도 이러한 경치에 산사하나 있다고 해서 구도(構圖)에 거슬리지는 않겠지. 저 덕주사가 자연속, 풍경으로 완전히 융화되는 그날 까지 우리 기다려 보기로 하자.

 

이제 마애불 얘기를 해 보자.

마애불, 덕주사에서 월악산으로 1.5Km 쯤 더 걸어 올라가면 높이가 15m쯤 되는 커다란 바위에 암각 된 마애불이 있다. 이 마애불이 바로 덕주공주와 마의태자 오누이가 조성한 것으로 천년의 세월동안 한결 같이 지고한 사랑과 그리움을 품고 묵묵히 세월의 풍화를 견디고 서 계신 부처이시다.

 

신라말기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망국의 한을 안고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병사를 양병하고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게 되는데 일행은 그 곳에서 야영을 하며 하룻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그 날 밤 마의태자는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고, 그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은 왕자에게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西?)에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 곳에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며,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億兆蒼生)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라고 현몽하였다 한다.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 생각하고 마의 태자와 덕주공주 두 남매는 계곡 물에 목욕재개 하고

서쪽 하늘을 향해 합장 배례 한 뒤 다음날 서쪽으로 자리를 이동하게 되는데, 일행이 서쪽으로 가며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고개마루턱 큰 바위에 한 권의 황금빛 포경문(布經文)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일행은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며 최고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를 찾아 석불입상을 세우고 북두칠성의 별빛이 한껏 비추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며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그 곳이 바로 덕주사다.

 

공주는 그대로의 삶, 불사에 전념하며 구도의 길을 걸음에 만족하였으나 왕권을 계승하지 못하여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마의태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태자는 동생인 덕주공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고 금강산을 향해 떠난다. 마지막 혈육인 오빠와 헤어져 혈혈단신이 된 공주는 출가하여 절에 몸담고 아버지인 경순왕의 애틋한 부정을 그리워하고 오빠인 태자의 건승을 서원하며 일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이 서린 마애불은 그 앞에 서면 누구나 고개를 숙이고 합장 예배하게 된다.

그 커다란 크기와 장엄에 압도당하여 발 조차 떨어지지 않는 위압과 거룩을 느낀다.

어떻게 저 높은 암벽에 저토록 미려한 부처님을 조각할 수 있었을까? 새삼 그 옛날  석공들의 기이한 원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마애불 앞에서 한 석달 열흘 기도하고 불공을 들이면 내 이생에 소원 다 들어 주실까? 그 옛날 여기가 본래 덕주사, 상덕주사여서 일까 중턱을 더 오른 산허리 이 곳 마애불을 기점으로 여기 저기, 건물이 들어섰던 버려진 빈 터에는 텅빈 공허가 한줄기 바람이 스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리움들이 낙엽처럼 가슴에 쌓이는 늦은 가을날, 그 그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우린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며 마냥 센티해 지곤 합니다. 혹여! 그 옛날 눈물같은 첫사랑 때문일까? 혹여! 지나간 시절 꿈결 같은 첫 키스의 그 황홀한 기억 때문일까? 지나온 아득한 시간들과 방금 지나쳐온 거리의 풍경들이 그새 그리운 건가?, 되돌아 보면 그리워하고 아쉬워 해야 할 얘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심하게 가을엔 가슴앓이를 하고...

당신의 마음에 구김이 생겨 시리고 아픈 날, 어디 한적한 산사(山寺)라도 떠나세요.

법당 앞에 앉아 두런두런 세상사 속상한 얘기도 부처님께 아뢰고, 낮설은 스님께서 은근히 권하는 우전녹차 한잔 못이기는 척 받아 마시며, 법문 한 자락 청해 듣는 일, 대웅전 처마에 초승달 들면 공양간 찾아 정갈한 절 밥으로 공양을 하고 기도 삼매에 빠져 밤을 지새우는 일, 긴 밤 무서리에 그 고운 들국이 다 시들어 진다하여도, 당신은 내일 우리가 꿈꿔 왔던 아름다운 세상의 빛나는 별처럼 언제고 그리움으로 기억될, 아무리 쌓여도 무겁지 않은 추억을 한 아름 챙겨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행복해질 터이니까요.>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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