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조계사 뉴스

조계사 뉴스

기타

조계사신도회 덕암 구자선 상임고문

  • 입력 2010.12.25
  • 수정 2024.11.22

비운 곳간에 행복이 그득, 곳간을 비우니 행복이 그득하네


참, 편안했다. 어렵게, 마감을 바로 코앞에 두고 아주 어렵게 인터뷰 시간을 정하고부터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이유(?) 있는 부담감이 마주앉는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평범하지 않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 그리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남다른 수행력에다 흉내 내기 힘든 대시주 공덕의 주인공 덕암(德庵) 구자선(74세, 조계사신도회 상임고문, 중앙신도회 상임고문 겸 의료봉사단 ‘반갑다 연우야’ 단장, 한국경제인불자연합회 회장) 거사. 일흔네 해의 풍상이 살짝 비껴간 듯, 구 상임고문의 얼굴이 맑고 소탈해서다.
“허허! 여기자 양반인 줄 알았으면 좀 이쁘게 하고 나오는 건데…. 어제 늦게까지 모임에 참석하느라… 꾀죄죄해서 이거 어쩌나. 실례가 많습니다.”
바야흐로 연말. 참석해야 하는 행사나 얼굴을 보여야 하는 모임이 많은지라, 눈치껏 중간에 빠져나오지 않으면 이튿날, 무엇보다 매일 올리는 새벽 기도에 지장이 생겨 자신을 단속하고 있단다.



사냥총, 낚싯대 꺾고 살생 참회, 마흔아홉 살의 발심

어린 시절, 어머니는 늘 “쌍가사를 입고 나오는 태몽을 꾸고 널 낳았다. 그러니 너는 부처님을 믿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집안 원찰은 그가 자란 변산에서 가까운 내소사였다. 그런 인연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상경한 그는 교회에 다녔다. 결혼식도 목사의 주례로 교회에서 올렸다. 불자로서 마지못해 예배에 참석하던 부인은 설교시간에 코를 골기 일쑤여서 남편을 난처하게 했고, 3년을 다녀도 영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20대 젊은 나이에 (주)태우주택을 세워 돈도 웬만큼 벌고 사업이 번창하자 앞만 보고 달리던 그가 골프, 등산, 낚시, 바둑 등 잡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특히 사냥과 낚시에 흠뻑 빠져 살았다. 총으로 짐승을 쏠 때, 물고기가 걸려 낚싯줄이 팽팽해질 때의 그 짜릿함에 매료되었다. 부인과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죄의식 없이 사냥과 낚시로 중년의 풍요를 마음껏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도봉산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친구들이 그를 몰아세웠다.

“‘네 어머니와 집사람은 방생을 하며 생명을 살리는데, 너는 사냥하고 낚시나 하면서 살생을 밥 먹듯 하니 넌 아주 나쁜 놈이야’ 하는 거예요. 은근히 부아가 나더군요. 그래서 ‘창조주가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했는데 그것 좀 잡으면 어떻다고 야단이야?’ 하고 대들었죠. 아웅다웅하다가 결국 내려오는 길에 천축사에 가서 물어보자고 했어요.”

그는 절문에 들어서서 ‘큰 중님’ 좀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만난 스님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사냥과 낚시가 제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인데, 그게 그리 큰 죄가 됩니까?” 하고 묻는 그에게 스님은 딱하다는 듯 말했다.

“처사님도 위험한 일을 당하면 살아나려고 발버둥치겠지요? 동물도 마찬가집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을 치지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생명은 단 하나뿐인데, 그걸 재미로 해치는 건 죄 중에서 제일 큰 죕니다.”

스님은 낚시나 사냥이 그렇게 좋으면 ‘잡긴 하되 도로 놓아주라’고 했다. 스님 말씀을 들으면서 머리카락이 하늘로 곤두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곧바로 산신각에 들어가 산신령님께 참회하고 맹세했다. 다시는, 평생 절대로 살생하지 않겠노라고….

그 길로 사냥총은 태릉선수촌에 기증하고 낚싯대는 꺾어 버렸다. 그렇게 불문에 들어선 게 마흔아홉 살, 그 뒤 단 한 번도 그 약속을 어겨본 적이 없다. 아마도 전생에 닦은 공부가 깊었던 모양이다. 단 한순간의 깨침으로 20여 년의 오랜 악업을 떨쳐버렸으니 말이다.

 

 

 

 

“무엇이 더 필요하더냐!”

구자선 상임고문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자수성가했다. 맨손으로 서울로 상경해 이런저런 궂은일을 다해봤다. 결국 아버지에게 종잣돈을 빌려 몇 년 뒤 세 배로 갚고, 고향 마을에 번듯한 노인정까지 기증했다. 노인정 기증은 국내 처음일 거라고 기꺼워한다. 불교에 귀의한 이래 20여 년간 계속된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편집자 주)’의 보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계사를 비롯해서 해인사, 부석사, 천축사, 불국사 등 그의 불사 손길 닿은 곳이 어디 그뿐이랴. 사찰 불사는 물론, 동국대 일산병원과 동국대(덕암세미나실) 후원, ‘반갑다 연우야’ 진료버스(2대) 기증, 저소득층 청소년 장학금, 동남아 지역 불자 돕기, 청각장애인 화상전화기 설치 등 사회복지 분야까지, 그간의 보시 행적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그런데도 “가진 걸 조금 나누는 것뿐”이라며, 그냥 ‘부처님과 대화’하는 얘기만 하잔다.

그래서 그는 가진 게 많다. 경제적인 여유를 말하는 게 아니다. ‘소유’에서 자유롭지 않으면 절대 실천할 수 없는 ‘무주상 보시’의 공덕과, 나누는 걸 ‘기쁨’으로 여기는 실천, 집착을 버리고 놓을 때를 아는 지혜와 신행이 그것이다.

‘부처님과 대화’하는 것만 해도 그렇다. 그가 조계사 법당에서 기도하는 걸 지켜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집중력에 깜짝 놀란다. 법회가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전혀 쉬지 않고 절을 하면서 그만의 방법으로 부처님과 대화한다. 오직 부처님만 보인단다. 한겨울에도 땀에 흠뻑 젖을 만큼 기도에 빠져 있어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기쁜 일이 있어도 부처님께 여쭙고 스스로 답을 찾는다.

몇 년 전, 당시 주지였던 지홍 스님이 그를 알아보고 신도회장을 권한 적이 있다. 그때까지 20년 넘게 조계사에 보시는 했지만 감투를 쓴 적은 전혀 없었다. 그때 사양하다 못해 맡은 조계사신도회 상임고문이 불교계 첫 감투다. 그걸 계기로 중앙신도회 상임고문도 맡고 ‘반갑다 연우야’ 단장도 되었다. 하지만 역시 몰래 하는 보시가 기쁨이 크단다.

부처님은 그에게 항상 현명한 답을 주신다. 7~8년 전, 믿었던 직원이 사기를 쳐서 회사가 큰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배신감에 분노하는 그에게 부처님은 “소유할 게 더 있느냐? 그만 내려놓아라.”라고 하셨다. 회사를 쪼개서 그간 함께 고생한 직원들에게 나눠 독립시키고, 재산도 정리했다. 아마 부처님이 아니었으면 집착과 배신감 때문에 마음에 병이 들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고 한다.

 

▲ 동지기도회향법회에서 팥죽 작반의식을 함께하는 구자선 고문

아름다운 삶에 아름다운 향기가 배다
요즘도 새벽 4시면 일어나 3시간 정도 예불을 드린다. 평생 전국 사찰을 다니며 기도해온 부인이 간암 판정을 받은 건 약 20년 전. 그때부터 구자선 상임고문의 뼈를 깎는 ‘대참회’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악업 때문에 부인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암 수술 세 번과 폐 수술 등, 대수술을 6번이나 했어요. 보통 사람 같으면 못 살았죠. 도와달라고, 살생한 죄를 참회하니 제발 아내를 살려달라고…, 부처님께 매달리고, 애원하고 기도했어요.”
현재 일흔한 살인 부인은 많이 회복되었다. 격한 운동은 못해도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 그래서 그는 기도의 힘을 믿는다. 부석사에서 3일간 화엄기도를 한 적이 있다.
“3일 밤낮을 기도하고 나니 몸이 이리저리 비척거리는데, 그때마다 ‘아름다운 손’이 몸을 받쳐주는 거예요. 체험해본 사람만 알 수 있지요.”
그때부터 ‘헛된 짓’이라곤 전혀 하지 않았다. 부드러움 뒤에 강건함을 갖춘 그는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내는 강단이 있다. 옳다고 생각하거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20년째 새벽 기도를 거르지 않는 것도 그 강한 확신과 신심에서 나온다.
행복하냐는 질문에 “보시할 때 기쁘고, 부처님 만나서 정말 행복하다”라는 구자선 상임고문. 그에게서는 향긋한 보시의 향기, 청량한 기도의 향기가 느껴진다. 비워서 맑아진 노년의 삶이 향기롭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저작권자 © 미디어조계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