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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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선림원(禪林院) 禪교육 제1강
초청법사 : 원택 스님
주 제 : 백일법문(白日法門)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백일법문≫은 성철 큰스님께서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신 후, 그 해 여름 안거중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법문하신 것을 기초한 것이다. 사부대중이 모여 하루 2-3시간씩 진행된 법문은 거의 일백일 동안 토론되었다. 까닭에 이 강의를 절집에서는 ≪백일법문≫이라 불렀다. 당시 이 법문을 시자이신 천제스님이 녹음을 해 두었는데 이 녹음이 ≪백일법문≫간행의 바탕이 되었으며 녹음된 법문은 禪林院 첫 강사이신 원택스님이 글로 옮겼다. 그런데 녹음된 원래 법문을 보신 성철 큰 스님은 본인의 취지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셨다고 한다. 육성 법문을 글로 옮겨 놓았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어와 문어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해서 다시 원영스님이 학인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원고 정리를 하고 교리적 설명이 필요한 곳은 보완도 했다. 또 최종 교정은 지난 해 열반하신 법정스님, 그리고 당시 이미 교학의 최고로 알려졌던 원운스님이 보셨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을 큰 스님께 갖다 드렸더니 한 순간에 읽으시고 빨간 펜으로 수많은 오자를 찾아내서 불호령을 내리기도 하셨다.
성철스님은 이미 禪을 실참실수(實參實修)하신 이후에도 중도사상의 확립된 기초교리를 실천하며 禪이 바른길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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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강사: 김종인 박사
주 제: 성철스님의 한국불교사에서의 업적
성철 큰스님은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 신화적 존재가 되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스님이 군사정권의 시절에 사회 일반인들에게 아무런 메시지도 전하지 않아서 최고 종교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성철 스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일반사회인들이 당시의 한국 불교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이 종정으로 계시던 당시 한국불교는 대 사회적 발언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한국불교를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은 불교정화는 일단락 되었지만, 내적으로 한국불교는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었다. 많은 스님들이 승려의 본분사인 수행의 필요성조차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기보다 경시의 대상이었다. 스님은 바로 이런 상황을 직시하셨기 때문에 철저한 수행을 통한 승려와 불교의 정체성 형성을 조계종 敎의 최우선 과제로 삼으셨고 몸소 앞장서셨다. 그 덕분에 오늘날 조계종은 간화선 종풍을 형성할 수 있었으며, 스님들은 역설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스님께서 빈번히 정치적 메시지를 발표하셨더라면 종단 내부에 분열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사회에서 불교인들을 향해 사회에 간섭을 하려한다는 비판을 했을 가능성이 많았다.
≪백일법문≫에는 바로 성철 스님의 이러한 인식과 실천이 담긴 책이다.
원택 스님 약력 : 67년 연세대 정외과 졸업/ 71년 백련암출가/ 저서:성철스님시봉이야기
김종인 박사 약력 : 고려대학교국문과졸업/ 서울대철학과석사/ 미뉴욕주립대박사
제1강은 2011년3월10일 오후7시 안심당 3층에서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이 탄생한 배경을 주제로 학습한 주요 내용을 요약했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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