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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불교대학 2학년 고춘월 보살

  • 입력 2011.03.25
  • 수정 2024.11.20

 

나이팅게일을 꿈꾸던 만년 소녀

▲ 고춘월 보살님

 “에이, 다 늙은 사람한테 뭔 얘기를 듣겠다고 그래. 요즘 자꾸 까먹어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창피스럽구먼….”
불교대학 강의가 끝난 월요일 오전 12시 반. 교육관 2학년 강의실 앞을 지키고 서 있다가 힘들게 만난 고춘월 보살은 올해 여든 넷, 1927년생이다. 두 시간 동안 강의를 듣느라 힘들 법도 한데, 밝게 웃으며 도반들과 인사를 나누는 얼굴에서 고단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아, 고춘월 도반님 만나러 오셨어요? 잘하셨네요. 우리 반 제일 어르신인데, 공부도 열심이고 질문도 가장 많이 하세요.”
두 해째 같이 공부해온 도반들의 고춘월 도반 자랑이 이어진다. 사찰 순례면 순례, 행사면 행사, 불교대학 일이면 어디든 빠지지 않고 앞장선단다. 멀리 순례라도 갈 참이면 떡부터 시작해서 하다못해 과일이라도 챙겨와 도반들에게 공양한다.
그러고 보니 인기 좋은 이유가 있었다. 나이 든 대접을 받으려 하기보다 어른으로서 베풀기를 좋아하고, 얼굴에 소녀 같은 웃음과 애교가 떠나지 않으니 말이다.

똘똘한, 북청 고부잣집 외동딸
고 보살은 사중에서 실시하는 문화강좌, 금강경 강의 등을 이미 섭렵하고 작년에 불교대학에 입학, 현재 2학년이다. 파인 김동환의 ‘북청 물장수’란 시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 출신답게 공부 욕심이 끝이 없다. 그의 고향 북청은 물장수를 해서라도 자식들 공부를 시킬 만큼 교육열이 높은 고장이다.
“북청군 신포읍 중보주리가 내 고향이야. 어릴 때부터 공부 욕심이 많아서 만날 1등 했어요. 학자였던 아버지가 무슨 벼슬인가를 해서 말 타고 다니셨어. 내 꿈은 나이팅게일이 되는 거였어요. 열여덟 살 때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함흥 도립병원 간호과에 합격했는데, 딱 기숙사에 도착해서 짐을 풀려다가 다시 싸들고 집으로 왔어요. 처녀들을 정신대로 끌어간다니 어떡해, 서둘러 혼인했지.”
나이팅게일의 꿈은 그렇게 접었다. 보통학교 때부터 똘똘하다고 근방에 소문이 자자할 만큼 반장, 회장을 도맡아왔지만, 그 시대에 여자인 그가 공부할 수 있었던 건 아홉 남매 가운데 그이만 혼자 남고 일찍 다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그 고부잣집 외동딸은 열아홉 살에 한 살 더 많은 신포읍 상보주리 문씨 가문의 3대 독자에게 시집갔다. 시아버지도 당시 학자로 널리 알려진 분이었고 가세도 넉넉했다.
하지만 부잣집에서 금쪽 같이 자란 남편은 생활력은 없고 남 퍼주기를 좋아했다. 그 많던 재산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 새듯 바닥나고, 80평짜리 작은 과수원만 겨우 남더란다.


전쟁 통에 겪은 개의 죽음
과수원 50그루의 사과나무에 기대,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털게로 바꿔서 끼니를 때우는 등, 어렵던 신혼살림 중에 전쟁이 일어났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면에서 개를 다 없애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정든 개를 차마 죽일 수 없어서 고방(광)에 안고 들어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쯧쯧, 사정이 이러니 어쩌겠니. 절대 짖지 말고 얌전히 숨어 있거라.”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개가 고방 앞에서 앉은 채로 죽어 있었다. 아무 상처도 없이….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스스로 죽음을 택한 건 아닌가 싶다. 참으로 영물이 아닐 수 없다.
스물세 살이던 1․4후퇴 때, 먼저 집을 떠난 남편을 찾아 13일 동안 함흥시내를 헤매다가 소호진역에서 기적적으로 만났다. 운 좋게 흥남부두에서 같이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거제도 장승포.
사과 팔아서 모은 전재산 2천 원을 밑천 삼아 1년 정도 버티다가 부산으로 옮겨 살면서 큰아들을 낳았다. 부산 사거리시장에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서울로 올라왔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자리 잡기까지, 전쟁 통에 겪은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돈 벌고 모으고 살림하는 것까지 죄다 고 보살 몫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남편은 자식들에게 무서운 아버지였으며, 권위적인 가장이었다. 자주 밥상을 뒤엎고 걷어차도 ‘왜 그러냐!’고 말 한마디 못했다. 대들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마흔 살도 못 넘기고 세상 뜬 남편도 참 외로웠겠다 싶은 생각이 요즘 가끔 든다.


가슴에 묻은 큰아들, ‘우리 교수님’

▲ 고춘월 보살님

그렇게 고생하면서 4남매를 키웠다. 천성이 부지런한 데다 자식들 생각에 한시도 쉬지 않고 노력한 덕분에 집도 크게 짓고 4남매를 다 대학까지 보냈다. 사기를 당해서 운영하던 회사를 잃기도 했지만 좌절할 수 없었던 건, 자식들 때문이었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 고달픈 일상에서 자식은 그의 전부였다. 특히 대학교수였던 큰아들은 그이에게 신앙이었다. 어머니에게 유난히 다정다감해서 절에도 꼭 같이 다녔다. 홍련암에서 2만 배도 같이 했고, 손을 잡고 봉정암에 올라가 기도하던 기억도 생생하다.
지난 97년 그 아들이 어머니 곁을 떠났다. 등산길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이름도 아까워 ‘우리 교수님’이라 불렀던 큰아들을 가슴에 묻고, 고 보살은 오직 부처님만 의지했다. 요즘은 그 아들이 남긴 하나뿐인 혈육, 맏손자를 위한 기도로 할머니 고 보살의 무릎이 닳는다.
“대학 2학년생인 그 손자가 박사학위 받는 걸 보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간절히 빌고 있어요. 그때까지 건강하게 살려고 불사도 하고 기도도 드리고, 공부도 하는 겁니다.”

도반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 대학원까지 마칠 터
내년 1월, 불교대학을 마치면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게 고춘월 학생의 계획이다.
잘 까먹어서 속상하다고 엄살이지만, 고춘월 학생의 성적표에는 이른바 ‘올 A’, A만 즐비하다. 우등생 할머니의 성적표를 본 맏손자가 “전 할머니보다 공부 잘할 자신 없어요. 올 A를 어떻게 맞아요.”라며 혀를 내둘렀다.
읽고 돌아서면 까먹어도, 고춘월 학생은 젊은 도반들과 한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게 행복하다. 그이를 친언니나 누님처럼 챙기는 젊은 도반들의 모습도 이젠 꽤나 자연스럽다.
조계사와의 인연은 출퇴근길에서 시작되었다. 회사를 접고 시댁 조카의 주선으로 ‘대한뉴스’를 제작하는 문화공보부 사무실에 출근했는데, 조계사 앞을 지나다녔다. 그때마다 ‘나중에 꼭 저 절에 다니겠다’고 맘먹었다. 반드시 대한민국 최고의 절 ‘조계사’에 시부모와 친정부모 위패를 모시고, 자식들을 위한 기도도 하겠다고 발원했다. 그리고 1983년, 10여 년간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면서 그 발원이 이루어졌다.
고 보살에게는 불교가 모태신앙이다. 외할머니가 전주 이씨, 이성계의 후손으로, 고향의 ‘보주 나한사’가 외할머니 집안의 절이었다. 외할머니는 그 절에 사시면서 어린 외손녀가 오면 손을 잡고 부처님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그렇게 자연스레 불자가 되었고,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보주 나한사 부처님이 먼저 떠오른다.
평생 쉬어본 적이 없어 쉬면 오히려 병이 날 것 같다는 고춘월 보살, 요즘도 집 옥상 텃밭에 푸성귀를 키우는 등 부지런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조계사 범종각을 시작으로, 극락전과 탑, 대웅전 등 경내 곳곳에 담긴 선망 부모와 자식들에 대한 자신의 염원과 정성이 소홀해지지 않았는지 틈틈이 돌아본다.
더욱 커져만 가는 자식들에 대한 미련도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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