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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되어요' 서남지역법회 유정례 불자

  • 입력 2011.07.22
  • 수정 2024.11.20

 

보시할 수 있어서 오늘이 행복하다.


7월의 일요일 오후 2시, 깔끔하게 새로 단장한 사중 식당에는 우란분절 기도를 마친 신도들이 늦은 점심공양을 하거나 차를 마시고 있다. 전에 ‘동감’이란 음식점이었을 때 몇 번 와본 곳인데, 모텔이었던 이 건물을 조계사에서 사들여 1층 음식점을 정갈한 찻집같이 꾸미고 신도들에게 식당 겸 찻집으로 개방한 듯하다.
구석의 조용한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아 이번호 ‘꽃이 되어요’의 주인공 유정례(70세, 서남지역법회 소속) 불자를 기다리는 동안, 문득 조계사의 옛 풍경이 떠올라 기억을 따라가 보았다.
기자가 처음 찾았던 70년대 중반의 조계사는 주변이 온통 음식점과 가게, 모텔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 좁고 답답하고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도량이라기에는 턱 없이 실망스러운 모습이어서 불자들은 그나마 종로 한복판에서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을 서글픈 위로로 삼았다.
그 뒤로 20여 년이 지나도 조계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0년 초에 즈음하여 조금씩 주변 땅을 사들이고 전각을 신축하면서 나날이 정돈되어 요즘은 일주문에 들어서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갈하고 단정한 경내 분위기에 저절로 경건해진다.
그 세월을 옆에서 지켜만 본 사람의 감회가 이러할진대, 하물며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은 이 대단한 불사에 땅 한 평, 기와 한 장씩을 보태며 마음을 다 쏟은 조계사 불자들의 감회는 어떠하랴 싶다.

 

‘덤’이라 여기며 산 세월

인연이 그리 오래된 건 아니나, 유정례 불자에게도 조계사는 각별하다. 땀 흘리며 살아온 평생의 대가를 조심스레 회향한 본찰인 동시에 오래 전(87년)에 ‘아배(유 보살이 바깥양반을 가리키는 말)’가 세상 떠나면서 당부한 대로 부처님께 기도하고 자비심에 기대어 노년을 보내고 싶은 발원 도량이다.

“아배는 참 외로운 사람이었어요. 어려서 친부모님 다 잃고 형제도 없이 혼자 살았어요. 다행히 작은아버님이 돌봐주셨지만,칠 남매의 막내인 나를 부러워했죠. 위암으로 병상에 있을 때 교회와 성당에서 자꾸 찾아오니까 내게 ‘다 그만두고 동네 절에나 다녀라’고 한 것이 유언이 되었어요. 발병한 지 1년 만에, 쉰한 살에 떠나더군요.”

그렇게 마흔여덟에 혼자 남겨졌다. 아니, 대학 1학년생인 큰딸과 고만고만한 고등학생, 중학생 아들 둘이 평생 농사밖에 모르는 어수룩한 그이 곁에 남아 있었다. 세상이 온통 깜깜했다. 일찍 시집가면 자식 많이 낳아서 고생할까 싶어 미루고 미루다스물여섯에야 혼인한 겁쟁이가 자식 셋을 공부시키면서 홀로 살아갈 걱정에 넋이 나갔다.

“덤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특히 세상 떠날 때의 아배 나이인 쉰한 살부터는…. 농사로는 애들 학비를 댈 수 없어서 이것저것 다 했어요. 친정이 가까워 오라버니들이 큰 의지가 되었고, 무엇보다 자식들이 착해서 제 뜻을 잘 따라줬어요.”

경기도 김포(뒤에 서울시 강서구로 편입) 토박이인 강릉 유씨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큰 고생 모르던 그이는 그렇게 단단해졌다. 그 시대 어른들이 그렇듯, 절을 자주 찾을 형편은 못 되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 위해 기도하던 친정어머니처럼 마음속엔 부처님이 든든히 자리 잡고 계셨다.

 

두 번의 큰 수술도 이겨내고

큰딸이 일찍 직장을 잡아 살림에 보탬이 되었고, 아들들도 좋은 대학을 나와서 현재 둘 다 건축설계사로 일하고 있다. 세 자녀가 대학을 마치기까지, 그 힘든 세월을 말로 어찌 다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온갖 고생을 하는 그이가 혹시 자식들을 두고 재혼할까봐 걱정하며 가끔 섭섭하게 대하던 시댁 작은어머니는 그이가 사별한 지 1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큰 찬사를 보냈다.

“자네는 하늘이고 난 땅일세. 고맙네.” 그런데 아이들 학비를 마련하느라 동동거리며 살면서도 남편 생전에 함께 일구던 논밭은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다. 집은 처분해서 작은 집으로 옮겼는데 그것만은 팔 수가 없었다. 그걸 팔아서 편히 좀 살라고, 주변에서 아무리 권해도 아배의 유품 같아 꼭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은 버틸 수 있어도 힘든 건 몸이 먼저 아는 법, 2007년 척추협착증으로 9시간에 걸쳐 대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2009년에는 퇴행성관절염으로 무릎도 고장이 나 또 병원 신세를 졌다. 꿋꿋하던 유 보살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무릎이 아프니까 정말 살 희망이 없대요. 아등바등 살아온 시간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고….”

외손자 봐주던 일도 그만두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좋은 소식이 들렸다. 그이가 그토록 힘들게 지켰던 땅이 개발 계획에 포함되어 토지 보상금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기대만큼은 아니어도 그냥 파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이었다.

 

조상님 덕, 조상님께 회향

어머니는 생전에 “조상님 잘 모셔서 안 되는 집 없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자신은 다만 아배와 살았던 지난 시간 때문에 놓지 못했는데 그 땅이 행운이 되자 먼저 남편 생각부터 났다. 그리고 그 땅을 지켜준 것이 조상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시아버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섭섭함도 컸다. 막상 팔고 나니 허전하고 아배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남들 몰래 논에 가서 실컷 울고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오곤 했다.

토지 보상금이 나오자 자녀들과 상의했다.

“조상님 덕이니 보시하자고 했더니 다들 그러라고 하더군요. 친한 분이 마침 조계사에서 탑 불사를 한다는 걸 알려주셨어요. 무릎이 아파 절에 나오지 못할 때였거든요.”

친정과 시댁 조상 열여덟 위를 모셨다. 가슴이 벅찼다는 유정례 보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알뜰하게 움켜쥐고 어렵게 살아온 시간을 톡톡히 보상받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내게도 이런 날이 있을 줄이야…. 시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화목한 가정이 제일 큰 복

교통비 한 푼 아껴서 초 한 자루라도 보시하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는 유 보살의 아들답게, 큰아들도 요즘은 등산길에 참배차 들른 절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기와 한 장이라도 올려야 어머니 뜻을 따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단다.

“보시하는 마음으로 베풀라”는 그이의 당부는 큰딸이나 작은아들에게도 예외가 없다. 사회 활동이 활발한 큰딸은 그런 어머니 가르침을 따른 덕에 어디를 가도 오히려 대접 받고 인기도 좋다고 기꺼워한다.

큰딸의 넓은 마음 씀씀이는 형제간의 우애도 두텁게 만들어 두 며느리도 시누이를 존경하고 따르니, 온가족이 화목한 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주변에 그 흔한 가족간의 종교 갈등도 유정례 보살과는 먼 이야기다. 삼 남매 가족, 유 보살까지 다 모이면 12명인데, 가까운 곳에 살면서 수시로 만나 재밌게 시간을 보낸다. 자기 가족들끼리 만나는 법이 별로 없을 정도다. 딸과 큰아들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그 담장 밖에 유 보살의 집이 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마음이 편해요. 딸하고 작은아들 집을 장만해주지 못한 게 좀 걸리지만, 더 욕심내면 안 되겠지요!”(웃음)

소박한 그 마음이 진짜 보살이니, 요즘 얼굴이 더욱 환해져서 ‘회춘하느냐’는 소리를 많이 듣는단다.

문득 신라 때 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운 김대성의 어머니 ‘경조’가 생각난다. 홀몸으로 남의 밭을 빌려 품을 팔고 살면서도 그 밭마저 자식을 위해 보시함으로써 아들 김대성이 부잣집에 다시 태어나 신라의 대사찰을 세우게 했다는 이야기다.

긴 세월, 유 보살을 지켜준 건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1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흔들림 없이 위대하지 않은가.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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