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생원이, 조선달이, 동이가 악수를 청한다.
메밀밭, 하얀 꽃들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그리움 속으로 걸어간다. 잔잔한 달빛의 바다. 한줄기 바람 휘 불어 바닷가 염전에 막 건조되어 생성된 햇 소금같은 자잘한 메밀 알갱이들과 상면한다. 저 산 너머 큰 고래를 타고 현세의 허생원이, 조선달이, 동이가 악수를 청한다. 어이, 그간 잘들 있었나? 아무렴 잘 지내고 있지. 이내 바다는 닫히고 하얀 침묵만 세월의 시간을 말하며 서서히 소설의 허구속으로 침몰한다. 교교한 달빛의 바다. 다시 묵언의 순간. 성씨네 처녀가 옷고름을 풀며 웃음을 흘린다. 짧은 찰나의 대면, 그가 내 안으로 자리하는 순간의 통정, 쾌감이 온몸을 전율케 한다. 비릿한 배냇꽃향은 이 은근한 통정의 분비물인양 한결 흥건해 진다. 가쁘게 호흡하는 처녀의 숨결이 역동적으로 다가와 나른해진 기행자의 원기를 수혈한다. 빨간 정갱이를 들어내며 물방아간 뒤로 숨는 처녀의 생동에서 방전된 의식이 충전된다. 갇혀 있던 문체(文體)의 구속들이 날개를 달고 훨훨 산허리를 부전나비처럼 난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어찌 저리 표현할 수 있을까? 선생의 수채화 같은 문구(文具)를 훔치고 싶어 수년을 메밀밭에 갇혀 구속되었던 사내, 결코 그가 될 수 없음을_ 흐뭇한 달빛에 마음을 비워 비로소 평안해지고 자유로워 진다.
아무려나, 전시(展示) 물레방아만 속사정도 모르며 하염없이 돌고 상술에 얽매인 쓸쓸한 초가에 가련한 디웅박이 불쌍하다.너희들이 문학을 아는가? 메밀밭 옆으로 늘어선 상가 앞에서 손님을 유혹하는 아낙들의 웩웩거림이 귓전에 와글거린다. 언제부터인가 얄팍한 상흔에 변질된 "메밀꽃 필 무렵" 문학축제 표제가 서글퍼 진다. 발길을 돌린다. 메밀꽃밭에서의 밀애(密愛)를 뒤로하며_ 선생의 생가. 흐드러진 메밀 텃밭을 지나 단아한 단칸의 기와집, 마당 앞 화단에 빨간 백일홍과 키 높은 해바라기가 배시시 반긴다. 나는 방금 메밀밭 속에서 성씨처녀와의 포옹으로 풋풋한 연애을 가슴에 담고 왔는데, 댁(宅)에서의 소설 밖 외면(外面) 모습은 쓸쓸하고 허전한 가식 생동의 처연(悽然)함 뿐, 선생의 주술같은 문학혼(文學魂)을 설명해 줄 사람도 하나 없는 생기 잃은 쓸쓸한 빈집에서 고단한 기행자 사진을 찍는다. 돌아 나오는 발길이 씁쓸하다.
씁쓸함을 달래려 지척 팔석정으로 발길을 옮긴다. 팔석정, 팔석정은 조선 전기에 시와 글로 유명했던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임시 이 곳에 이르러 수려한 경치에 취한 나머지 정무도 잊은 채 여드레 동안 신선처럼 지내다 갔다는 데서 얻은 이름 이랜다. 노송과 기암괴석 그리고 시원스레 굽이쳐 흐르는 면경수, 이것들이 그려 내는 한 폭의 동양화, 예가 바로 도솔천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 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각 바위마다 각인된 잘난 사람들의 이름석자들 얼마나 오래 살며 부귀를 누리고 싶었으면 저 웅대한 바위에 상처를 냈을까, 찜찜하고 어정쩡한 마음을 풀어 계곡물에 흘려 보낸다. 마음이 맑아진다. 버선을 벗어 발을 담그고 물장난을 친다. 시를 짓는, 글을 짓는 학도들이 갑자기 유년의 아이가 된다. 좌정하고 앉아 "청산리 벽계수야"쯤은 읊조려야 격일 진데 바지가랑이 걷어 올리고 송사리를 잡으려, 피래미를 잡으려, 물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며 히히덕 댄다. 낙낙댄다. 늦은 하오에 익은 햇살이 난 반사로 흩어지며 봉평에 허공을 산뜻하게 채색한다.
이제 나 돌아갈 것이다. 작년에도 또 재재작년에도 왔었을, 그리고, 내년에도 또 후년에도 와야할 이 봉평에서 비록 경제적 논리로 어설프게 늘어나는 상술이 가슴 아플지라도, 내가 옮으로, 다녀감으로 한 평, 한 평, 땅뙤기에 메밀이 더 심어지고 하양꽃이 산허리를 덮어 먼 하늘 은하수가 되는 날, 님(李孝石)에 대한 하얀 그리움들을 밤을 새워 연서로 쓰면 달빛이 슬프게 시린 메밀꽃 피는 가을날에 행여, 네 가슴에도, 내 가슴에도,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 시어(詩語)들이 무수한 별이 되어 반짝 반짝 빛나지 않겠나? 이 땅에 사람들이 모두가 다 시인(詩人)이 되고 소설가가 되는_
2011. 9. 중순, 가을을 맞이하며 봉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