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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주의 화두-부처님 품이어서 더욱 아늑한 1월

  • 입력 2012.01.02
  • 수정 2024.11.24

적당한 체념과 기다림 그리고 "다행함"

 

신년 새날 아침에는 달그락 달그락 조심스럽게 식탁을 준비하는 소리가 있다.

뽀글 뽀글 스르르 주전자에 물 끓어 오르는 소리...

미명의 신새벽 알싸한 공기를 가르고 산사의 도량석이 울고, 저기 저 동해에 힘차게 솟아오르는

태양, 그 용광의 황금빛이 간밤에 푸짐하게 내린 흰 눈과 더불어 내 작은 공방, 창가에 환희와

설레임으로 다가서면, 비로소 기침을 하시고 열심히 양치질 하시는 부처님의 기척이 내 곁까지

넉넉히 들릴 듯 하다.

 

▲ 동해에 힘차게 솟아오르는 용광의 장엄한 태양을 품에 안고_

그렇게 1월 아침에는 작은 소리와 울림이 살아 있다. 적당히 볼륨을 낮추어 놓은 라디오 FM의
선율만으로도 행복을 흑단 젓가락으로 집어 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쁨이, 일순 눈 위에 햇살처럼
반짝인다. 문득, 창문을 열어젖히고 소복이 쌓인 눈밭을 바라본다.

눈 덮인 들판을 갈 때에 모름지기 어지럽게 걸어가지 말지니,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라. 서산대사의 시(詩) 답설(踏雪)이 아니어도 지나온 한 해,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반추해 보는 시간, 실내 온도와 바깥 기온의 차이가 벌어질수록 `다행함`을
느끼려 드는 습성은 오래도록 추운 길 위에 떨어 보았던 기억 때문이라던 당신의 말을 생각한다.

▲ 눈 덮인 길을 갈 때에 모름지기 어지럽게 걸어가지 말지니

그 나지막한 토로가 눈물겨웠던 내가 이제는 그때의 당신인 것을_ 겨울, 새날은 가장 화려한 침묵의
언어로써 교훈을 준다. 그러나 "다시는 아무것도 다짐하지 않으리라"던 다짐을 접어 둔 채 "2012"라는
숫자가 금박으로 찍힌 작은 수첩을 문고 서점에서 장만하면서 느꼈던 은밀한 기쁨은 반야심경
(般若心經)을 처음 익혀서 읊조리던 그때의 기쁨처럼 아직도 내가 희망에 소양이 있음을 말해준다.

아직도 모바일 메신저에 익숙하지 못해 순간 기억해야 할 메모나 아이디어들을 수첩에 적어 넣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와 친해지리라 작심을 하지만,
그 문고 서점에 즐비하게 진열된 예쁜 수첩들에 마음이 홀려 이것저것 들춰 보다 결국 작고 허름한
수첩 하나 집어 들고 흐뭇해하던, 이렇듯 사소한 일에도 서투른 노릇은 학창시절 책방에만 들르면
이성을 잃을 만큼 욕심을 내던 그 혼란의 버릇이 그대로 새 공책이나 수첩에 전이된 것이 아닐까 싶다.

▲ 올 한 해는 동짓날 하얀경단을 정성스럽게 빚는 보살의 마음으로

미성년 뜨락에서 그토록 탐독하고자 했던 삶의 내용에 이미 식상해 버린 지금, 텅 빈 수첩의
여백에 가지런하게 찍혀 있는 예쁘장한 나날의 숫자들로 이 복잡한 생의 복잡한 암호를 풀어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듯 1월에는 별로 쓴 흔적이 없는 지난해 일기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새 수첩을 펼쳐 드는 설렘으로 뿌듯한 마음이 있다. 그래도 아직은 미지의 날들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일말의 안도가, 텅 빈 새벽 전철의 불빛처럼 신선하게 느껴진다.

망가질 듯 말 듯한 그림을 그리느라 애를 쓰다가 구겨 버리고 나서, 흰 도화지를 펼쳐 들고 다시
시작하는 아이와도 같이, 막연한 계획이 실패경험 속에서 새롭게 힘을 얻어 가지는, 색다른 희열이
있는 것이다. 가장 추운 계절이어서 가장 아늑할 수 밖에 없다는 이 역설이 마음에 들었던 탓으로
나는 마치 얼음집과도 같은 그대를 최상의 그리움으로 이름 지어 불렀던 것이었을까.

▲ 모처럼 차를 우려 그대와 함께 맞는 새날의 시간

적당한 체념과 만성화된 기다림이 오히려 신세계를 연출하는 바탕이 되는 모순의 미학을 이제서야
깨달으며, 박하 향내 그윽한 신년음악회의 선율이 울려 퍼지는 아침, 나는 정성스럽게 차를 우려
찻잔에 모처럼 접시받침을 하여 그대를 초대하는 여유를 가지고, 무광택 순은 액세서리와도 같은
음색(音色)의 오페라 아리아를 듣는다. 부처님 품이어서 더욱 아늑한 미명의 시간,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머무는 기쁨을 알았기에 내 1월의 작은 수첩에도 저 눈밭을
건너는 사슴 발자욱 같은, 신새벽의 사연들이 가득하기를 기도하면서...

▲ 부처님 같은 연꽃의 삶을 살리라 또 다짐을 하며_

2012.1.1 미명의 새벽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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