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라. 서산대사의 시(詩) 답설(踏雪)이 아니어도 지나온 한 해, 나는
느끼려 드는 습성은 오래도록 추운 길 위에 떨어 보았던 기억 때문이라던 당신의 말을 생각한다.
▲ 눈 덮인 길을 갈 때에 모름지기 어지럽게 걸어가지 말지니
그 나지막한 토로가 눈물겨웠던 내가 이제는 그때의 당신인 것을_ 겨울, 새날은 가장 화려한 침묵의
언어로써 교훈을 준다. 그러나 "다시는 아무것도 다짐하지 않으리라"던 다짐을 접어 둔 채 "2012"라는
숫자가 금박으로 찍힌 작은 수첩을 문고 서점에서 장만하면서 느꼈던 은밀한 기쁨은 반야심경
(般若心經)을 처음 익혀서 읊조리던 그때의 기쁨처럼 아직도 내가 희망에 소양이 있음을 말해준다.
아직도 모바일 메신저에 익숙하지 못해 순간 기억해야 할 메모나 아이디어들을 수첩에 적어 넣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와 친해지리라 작심을 하지만,
그 문고 서점에 즐비하게 진열된 예쁜 수첩들에 마음이 홀려 이것저것 들춰 보다 결국 작고 허름한
수첩 하나 집어 들고 흐뭇해하던, 이렇듯 사소한 일에도 서투른 노릇은 학창시절 책방에만 들르면
이성을 잃을 만큼 욕심을 내던 그 혼란의 버릇이 그대로 새 공책이나 수첩에 전이된 것이 아닐까 싶다.
▲ 올 한 해는 동짓날 하얀경단을 정성스럽게 빚는 보살의 마음으로
미성년 뜨락에서 그토록 탐독하고자 했던 삶의 내용에 이미 식상해 버린 지금, 텅 빈 수첩의
여백에 가지런하게 찍혀 있는 예쁘장한 나날의 숫자들로 이 복잡한 생의 복잡한 암호를 풀어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듯 1월에는 별로 쓴 흔적이 없는 지난해 일기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새 수첩을 펼쳐 드는 설렘으로 뿌듯한 마음이 있다. 그래도 아직은 미지의 날들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일말의 안도가, 텅 빈 새벽 전철의 불빛처럼 신선하게 느껴진다.
망가질 듯 말 듯한 그림을 그리느라 애를 쓰다가 구겨 버리고 나서, 흰 도화지를 펼쳐 들고 다시
시작하는 아이와도 같이, 막연한 계획이 실패경험 속에서 새롭게 힘을 얻어 가지는, 색다른 희열이
있는 것이다. 가장 추운 계절이어서 가장 아늑할 수 밖에 없다는 이 역설이 마음에 들었던 탓으로
나는 마치 얼음집과도 같은 그대를 최상의 그리움으로 이름 지어 불렀던 것이었을까.
▲ 모처럼 차를 우려 그대와 함께 맞는 새날의 시간
적당한 체념과 만성화된 기다림이 오히려 신세계를 연출하는 바탕이 되는 모순의 미학을 이제서야
깨달으며, 박하 향내 그윽한 신년음악회의 선율이 울려 퍼지는 아침, 나는 정성스럽게 차를 우려
찻잔에 모처럼 접시받침을 하여 그대를 초대하는 여유를 가지고, 무광택 순은 액세서리와도 같은
음색(音色)의 오페라 아리아를 듣는다. 부처님 품이어서 더욱 아늑한 미명의 시간,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머무는 기쁨을 알았기에 내 1월의 작은 수첩에도 저 눈밭을
건너는 사슴 발자욱 같은, 신새벽의 사연들이 가득하기를 기도하면서...
▲ 부처님 같은 연꽃의 삶을 살리라 또 다짐을 하며_
2012.1.1 미명의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