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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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형 김현승의 다채로움
김현승 시인의 다채로운 시
다형(茶兄) 김현승은 1913년에 태어나 1975년에 죽었다.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김현승이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직후부터다. 김현승의 시 중에는 교과서에도 실린 작품들도 많아서 우리에겐 이미 친숙한 이름이다.
김현승의 시에는 더러 어려운 시가 많지만, 쉬운 시도 있다. 어렵고 쉽고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지난 한 학기 동안 배웠던 시인들 중에 김현승이 가장 어려웠다. 제목부터 어려워서 큰 압박이 느껴졌다. ‘인생송가’, ‘건강체’, ‘고전주의자’ 등의 시가 말이다. 나의 몸을 ‘건강체’라고 칭하고 제목으로 정한 것이 새로웠다. 제목보단 내용이 훨씬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김현승 시인은 시의 제목에 상당히 힘을 준 것처럼 보였다.
시의 내용은 아주 세련됐다. ‘나무와 먼 길’을 보면 ‘나무, 나는’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는데, 긴 시이고 호흡이 무척 긴 데도 운율이 살아있다. 흔히 부르는 ‘반복법’이지만 계속 ‘나무, 나는’이 아니라 ‘나무, 너는’이라고 변형하기도 하여 시를 읽을 때 훨씬 세련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무와 먼 길’은 김현승의 시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다. ‘나무’라는 제목 때문에 단지 서정적인 시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나무와 여인’, ‘오월’, ‘물’, ‘신’, ‘가을’ 등의 소재가 많이 등장하는 데 다채로운 색을 띠고 있어 분위기가 신비로웠다. ‘신’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이 신은 아니겠지만, 시를 읽으며 그리스로마 신화의 어느 정령이 그려지기도 하고 나무와 물의 조화로움이 눈앞에 펼쳐지기도 했다.
나무와 먼길
-김현승
사랑이 얼마나 중한 줄은 알지만
나무, 나는 아직 아름다운 그이를 모른다.
하늘 살결에 닿아 너와 같이 머리 고운 女人을 모른다.
내가 詩를 쓰는 五月이 오면
나무, 나는 너의 곁에서 잠잠하마,
이루 펴지 못한 나의 展開의 이마아쥬를
너는 공중에 팔 벌려 그 모양을 떨쳐 보이는구나!
나의 입술은 메말라
이루지 못한 내 노래의 그늘들을
나무, 너는 땅위에 그렇게도 가벼이 느리는구나!
목마른 것들을 머금어 주는 은혜로운 午後가 오면
너는 네가 사랑하는 어느 물가에 어른거린다.
그러면 나는 물속에 잠겨 어렴풋한 네 모습을
잠시나마 고요히 너의 영혼이라고 불러 본다.
나무, 어찌하여 神께선 너에게 영혼을 주지시 않았는지
나는 미루어 알 수도 없지만,
언제나 빈 곳을 향해 두르는 希望의 尺度-- 너의 머리는
내 영혼이 못 박힌 발부리보다 아름답구나!
머지않아 가을이 오면
사람마다 돌아와 집을 세우는 가을이 오면,
나무, 너는 너의 收獲으로 前進된 어느 黃土길 위에 서서, 때를 맞춰 불빛보다 다스운 옷을 너의 몸에 갈아입을 테지,
그리고 겨울이 오면
너는 머리 숙여 기도를 올릴 테지,
부리 고운 가난한 새새끼들의 둥지를 품에 안고
아침 저녁 안개 속에 너는 寡婦의 머리를 숙일 테지,
그리고 때로는
굽이도는 어느 먼 길 위에서,
겨울의 긴 旅行에 호올로 나선 외로운 詩人들도 만날 테지......
‘가을비’에서는 ‘은시계처럼 차다’, ‘우산을 받고 혼자 섰다.’ 등 쉽고 가슴에 와 닿는 표현들이 보여서 좋았다.
‘가을의 시’, ‘이별에게’와 같은 시는 종교성이 다분해 보인다. 마치 신에게 바치는 시처럼,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이별에게’에서 말하는 ‘당신’은 이별일 수도 있지만, 이 세상의 이별이나 만남 등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는 ‘신’을 이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나무와 먼길’, ‘푸라타나스’, ‘눈물’, ‘사랑을 말함’ 등 김현승의 시에서는 ‘당신’을 지칭하는 것들이 많이 나온다. 당신은 푸라타나스나 눈물, 사랑, 나무일 수도 있지만 그가 믿는 종교의 신이기도 하다. 본래 신이라는 존재는 형상이 또렷하지 않고 어딘가에 있다고 믿기에, 다들 제각기 그 신을 그리는 모습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라는 호칭이 무척 잘 어울리는 존재다.
김현승의 시에는 그의 신앙심이 잘 드러난다고 한다. 그의 시를 보면 신이 많이 등장하는데, 대체로 신에 대한 궁금증이 담겨있다.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하는가’하는 호기심보다는 ‘그의 존재가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한 탐구 같았다. ‘나무’나 ‘물’, 사람 간의 ‘이별’, ‘사랑’ 등 김현승 시인이 탐구하는 모든 것에는 그가 믿는 ‘당신’의 존재가 보인다. 모든 것이 ‘당신’으로 인한 결과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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