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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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콘서트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 나는 사람...
사람들은 박수 치는 것도 잊은 채 그녀의 목소리가 이끄는
목련꽃 아래로 걸어 들어갔다.
나이 든 사람들이 객석을 가득 메운 콘서트.
굳이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잔잔하게 마음으로
통하는 가수와 관객들.
젊은 시절의 열정과 고음(高音)은 아니더라도
결코 녹록하지 않은 삶의 아픔과 우여곡절이 배여 있는 그녀의 목소리.
그래서 듣는 사람을 더욱 숙연하게 만드는 늙은 여가수의 목소리.
넓고 붉은 선글라스를 쓴 그녀가 마치 맹인가수처럼 쓸쓸해 보인다.
억지로 비틀어 짜지 않아도 굴곡진 삶속에서 배태되었을 목소리가
객석에 앉은 천여명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린다. 때론 시위 현장에서,
때론 직장에서, 그리고 때론 젊은 날의 상처 속에서 울고 괴로워했을
관객들의 지난 시간이 모래 위의 빗질 자국처럼 얼굴 위에
새겨져 있는 사람들.
각자 살아 온 사연은 다르더라도 수많은 시간을 상처를 만들며 살았을
그들의 가슴속에, 그녀의 노래가 위로처럼 젖어 든다.
그 위로 같은 노래를 들으며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젊은 날의 꿈과 기대, 설레임과 조바심을 떠올려 본다.
그래,
그 때 봄비가 몹시 심하게 쏟아지던 날,
그가 도서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비를 맞아 축축해진 국방색 잠바 뒤로, 최루탄에 젖은 교정이
오후의 어둠 속에 잠기고 있었지. 그 때 우린 참, 가난했었어.
미래에 대한 확신도, 삶에 대한 욕망도 잃어버린 채
그저 매캐한 연기 속에서 시간을 땜질하고 있었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한 때는 내 가슴을 들뜨게 했고 가슴 가득 충만한 사랑을 느끼게 했던
그는 어느 새, 하잖게 보이는 삶에 짓눌려 허덕이고 있었다.
하루 늦으면 은행 이자가 얼마인지 알아?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미적 거려?
좋은 음악을 들으면,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말했던 그 사람.
그는 콘서트장에 들어오기 전까지 공과금 문제를 들고 나왔다.
겨우 벗어나 보려던 집안 살림을 여기까지 와서 메지메지
풀어 놓는 그가 몹시 실망스러웠다.
내가 다시는 당신과 함께 음악회에 오나 봐라...
맛있어야 할 카푸치노 맛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그의 입에서도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런데 그가 노래를 부르려고 숨을 토해낼 때마다,
입에서 역한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그 때가 언제였더라... 젊은 시절 키스할 때면,
부드러움과 감미로움으로 내 눈을 감게 했던 그 입.
그 똑같은 입에서 이젠 악취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나를 눈멀게 했고, 마음을 뒤섞게 했던 그의 입에서 이젠...
그렇게 세월은 그의 가슴을 갉아먹고 있었던가 보다...
그 냄새를 맡자 갑자기 그에 대한 연민이 내 속을 휘저어 놓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 시간까지 정신없이 일하다 뛰어왔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힘겹게 집어 삼킨 독한 삶의 쓰라림이 자신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지도 모르고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 사람.
한 때 나의 밤을 빼앗아갈 정도로 사랑했던 그 사람.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아침 이슬 내릴 때까지...
천정까지 이어진 통유리 밖으로는 어느 새 어둠이 내려 앉고
축제와도 같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가수들이 바뀔 때마다 박수를 치며 어린 아이처럼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은 잠시 현실을 떠나 젊은 시절의 순수함으로
되돌아 가 있었다.
돈 문제도, 사람들과의 사소한 마찰도,
아이들에 대한 조바심과 일에 대한 부담스러움도
이 순간만큼은 꺼 버린 핸드폰과 함께 사라졌다.
대신 추억속에 잠긴 그리움만으로도 우리들은
충분히 위로 받는 듯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수많은 얘기를 다시 시작해야지. 별로 할 얘기가 없고
쳐다보기조차 맨숭맨숭하더라도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봐야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해야지.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
실망스런 느낌 같은 것은 조용히 내려 놓고
이젠 내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어봐야지...
우리는......끝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우리는...
우리가 비록 천둥치는 운명으로 만나지 않았다 해도,
이젠 타오르는 가슴 하나로는 충분한 사이가 아니라 해도
다시 시작해 봐야지.
머리가 벗겨져서 마치 암치료를 받다 나온 사람같은
옛날 가수가 키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손끝으로가 아니라 혼을 실어 온몸으로 키타를 쳤다.
마치 자신의 노랫소리에 취한 듯 눈을 감은 가수는
비록 세월의 바람에 머리카락이 빠지고 쇠락했지만
내 눈에는 아름다워 보였다. 그 어떤 젊은 가수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나,
그 노래를 듣는 관객 모두 이젠 축제 때문에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에서는 밀려났지만 그렇다고
기억마져 지우지는 않았다. 4월이 되면,
죽은 대지에서 라일락을 꿈꾸는 잔인한 4월이 되면,
우리들은 또다시 라일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일락을 볼 수 있다는 꿈만으로도...
아직 우리들은 죽은 목숨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아직...살아 있는 것이다...
꿈을 꾸고 있는 한...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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